23.05.30 04:45최종 업데이트 23.05.3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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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세계 각국의 노년층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요? 노년의 삶이 축복인지 재앙인지, 각국의 젊은이들은 노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노인의 경험을 사회가 잘 활용하고 있는지 <오마이뉴스>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소식을 보내오는 시민기자들과 함께 전 세계 노년의 삶을 들여다봤습니다. [편집자말]
지난가을 근 5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팬더믹동안 통화만 하던 80대의 양가 부모님과 시간을 갖자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탑승 직전 시어머니의 병원 입원 소식을 들었다. 시골 강원도에서 옥수수를 따다 낙상한 허리의 통증이 악화돼 생전 처음 입원을 하셨다고. 다리가 불편해 운전을 못하시는 시아버님은 주변 도움으로 나들이를 하고 끼니를 챙기시고 계셨다. 코로나로 병문안은 여전히 언감생심인 때라 어머님 얼굴은 거의 2주가 지난 퇴원 후에야 처음 뵐 수 있었다.

서울에 홀로 사는 친정아버지는 지난여름 코로나에 감염됐다. 완치 후에도 낫지 않는 잔기침이 심상치 않아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폐암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들었다. 내 또래 의사는 심각한 얼굴로 정밀 검사를 하고 본격적인 항암 치료를 권했다. 잠시 고민하던 아버지는 지금처럼 아파트 경비 일과 성당 봉사를 계속하고 싶다 하셨다. 


짧지 않은 나의 한국 방문 기간 중 가장 많이, 가장 자주 들른 곳은 '병원'이 됐다. 시댁인 강원도 횡성과 친정인 서울 화곡동을 오가며 나는 척추, 관절, 흉부, 내분비, 안과, 이비인후과, 비뇨기과, 치과, 한의원까지 거의 매일 방문해야 했다. 예약 후 접수에서 진료, 수납, 주차 티켓까지 병원은 노인들 혼자 다니기엔 녹록지 않은 곳이었다.  

마지막까지 이웃 거둬 먹인 사람  

린다의 부고가 신문에 실렸다. 지역의 대소사와 도서관 행사들, 동네가게 쿠폰 등이 실리는 미 중부 시골 지역 신문 인포럼(InForum)에. 인구 12만 로컬 신문의 1/3은 지역 사람들의 부고 알림판이다. 오늘 그 부고란엔 내 이웃 린다 브라운(Linda Faye Brown)의 일생이 길게 소개되어 있다. 
 
... 1997년 도시에 대홍수가 났을 때, 린다는 구호 식량 프로그램을 지휘하기 위해 40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매년 홍수 때마다 같은 일을 하면서 지역 사회를 위한 봉사의 순간순간을 사랑했습니다. 린다는 자신의 일을 "홍수 피해자 먹이기"라 부르며 즐겁게 그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지역 신문에 린다의 부고가 실렸다. ⓒ 최현정

 
린다는 좋은 이웃이었다. 낡은 콘도 입구에 들어서면 열려있는 문틈으로 사람들의 웃음소리, 얘기 소리가 끊이지 않던 유닛의 주인이었다. 친구가 보낸 체리로 만들었다는 파이를 나눠주고 생일날 문 앞에 놓아준 카드와 화분은 그녀 주변에 왜 그렇게 좋은 이들이 가득했는지 알게 해줬다.

어느 날 주차장에서 만난 린다가 두툼한 약봉지를 흔들며 어깨를 으쓱했을 땐 별거 아니려니 생각했다. 그리고 몇 달 만에 급격히 악화한 건강은 미처 작별 인사를 나누지 못한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허약해진 몸으로 잠시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연하게 만든 카레와 맵지 않은 깍두기를 배달했다. 가족처럼 그를 챙기던 이웃 할머니를 통해 커다란 종이에 응원의 메시지가 가득한 카드를 보내기도 했다. 왁자지껄하던 그의 집은 지인들이 보내준 쿠키와 케이크, 꽃과 화분들이 차분히 대신했다. 

"사흘 전 병원 침대에 누워있던 린다와 마지막 대화를 나눴습니다. 내가 당신 장례식에서 어떤 얘기를 해주면 좋을지 물어봤죠. 잠시 생각하던 린다가 이렇게 답하더군요." 
 

투병중인 린다 집앞의 안내판 ⓒ 최현정

 
나 같은 이웃들과 오랜 친구, 지인들, 신문 부고란을 보고 찾아왔다는 이들로 가득 찬 장례식에서 성당 신부님이 그녀의 말을 전한다. 사흘 전이면... 항암치료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 잠깐잠깐 마취에서 깨어나던 그때였을 것이다. 항상 웃는 얼굴에 유쾌하고 사람 좋은 린다가 삶의 끝자락에서 무슨 얘기를 했을까 귀가 쫑긋해졌다. 

"린다는 진지하게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먼저 하객들에게 다들 핸드폰을 꺼달라고 해주세요. 그리고 나는 원래 뚱뚱하지 않았다고 얘기해 주세요. 젊었을 땐 아주 날씬하고 핫했다고요."

조금 전까지 눈물을 훔치던 조문객들이 일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선가 일부러한 것이 분명한 '띠리링' 소리가 울리자 또 한 번 웃음이 터진다. 린다가 직접 섭외했다는 4인조 로컬밴드는 장례 미사 내내 그가 좋아하던 재즈와 올드팝을 연주했다.

장례식을 마친 우린 입장 때와는 다른 편안한 얼굴로 성당 지하 식당에 내려가 식사를 했다. 린다가 미리 세팅해 놓은 메뉴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우리를 거둬 먹였다. 린다네 집 거실에 있던 커다란 원목 탁자는 벌써 성당 식당 한가운데 자리 잡고 손님을 맞고 있었다. 그날 난 린다 친구들과 좋은 기억을 나누며 맛있게 내 몫의 그릇을 비웠다. 

1인 가구 노인을 지켜준 것

평생 결혼하지 않은 1인 가구로 노년을 맞은 린다를 지켜준 건, 친구와 봉사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 후 40여 년간 일하며 낸 세금으로 받게 된 노령연금이었다. 콘도 렌트비를 충당하고도 백화점에 가 옷을 사고 가끔 여행도 가고 친구들에게 멋진 선물을 해 줄 비용으론 모자라지 않은 금액이었다.

매달 정해진 날짜에 한 번도 어김없이 통장에 입금되는 연금은 웬만한 효자보다 낫다고들 말한다. 젊은 날 열심히 일한 뒤 나라에서 받는 노후의 연금은 린다의 우아한 노년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부분이었다. 

린다가 병원에서 보낸 1년여를 보장해 준 정부 의료보험도 위태로울 수 있는 노년의 삶을 보호했다. 10년 이상 일한 65세 이상 노인에게 미국 정부는 메디케어(Medicare) 혜택을 준다. 의료비의 약 80%를 지불해 주는 제도인데 자신의 사정에 따라 20% 공백을 메우는 메디캡 보험을 추가하거나 개인 보험을 가입하기도 한다. 

저소득자의 경우 메디케어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용을 지원해 주는 메디케이드(Medicaid) 대상이 된다. 여기엔 장기요양 서비스나 치과, 안경 보험 등도 포함된다. 혜택이 좋기에 오남용 방지를 위해 가입이 까다롭다. 신청 직전 5년 동안의 재산 상태를 확인하고 문제가 발견되면 사후에도 비용이 징수된다. 

린다는 선택하지 않았지만 노인 아파트도 조건이 되면 순서를 기다려 입주 가능하다. 카운티나 타운, 비영리 주택회사가 운영하는 노인아파트는 중간 소득 80% 이하의 무주택 노인들이 주 대상이다. 대부분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시니어 아파트는 현 수입의 30% 정도만 임대료로 지불하면 된다.  

식료품도 예외는 아닌데 미국 마트에 가면 기존 신용카드와는 다른 색깔의 카드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볼 수 있다. SNAP라는 연방정부에서 지원하는 식료품 바우처다. 미국산 농수축산물 소비를 촉진하기 위한 목적도 포함된 이 카드에는 2023년 현재 1인당 매달 최대 $281(약 37만 원)가 지원된다. 60세 이상 저소득층 노인 외에도 가족 중 장애인이 있는 가정도 지원받을 수 있어 미국 전체 인구의 1/8이 혜택을 받는다고 한다. 

"1인당 $941(약 124만 원) 정도는 보장됩니다. 뉴욕시에 살면서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 비용이죠. 노동력이 없어도 의식주는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뉴욕봉사센터에서 노인 돌봄 일을 하는 소야씨는 자신이 지켜본 미국 노인 시스템의 목적을 '인간다운 삶 유지'라고 정의했다. 선진국이라 하는 미국 복지 시스템의 타협할 수 없는 마지노선인 것이다. 

지난 2월 7일 바이든 대통령은 미 의회 국정연설 중 야유하는 공화당 의원들을 보며 말했다. 

"제 축구 코치가 늘 말했듯이 '여러분 노년에 행운이 있기를 빕니다'."

대통령 연설에 노골적인 야유를 보내며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던 극우 공화당 의원들에게 바이든은 가볍게 응수했다. 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폐지하겠다는 공화당 의원들의 위협에 대한 대응이었다.  

기자들은 젊은 시절 풋볼 코치를 한 바이든이 '초짜들에게는 노련한 베테랑들의 로프 묶는 법을 배울 시간이 부족하다'는 의미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나이든 사람에게는 경륜이 있다는 뜻이었으리라. 이 말을 한 바이든의 나이는 80세다.
 

19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메릴랜드주 애코킥에서 자신의 경제 구상에 대해 연설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인간은 누구나 늙는다 

"난 죽음은 두렵지 않아. 하지만 난 내 삶을 너무 사랑하기에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사실이 매우 슬퍼."

수척해진 얼굴의 린다가 안부를 묻는 나에게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나는 재밌는 얘기를 했고 그는 옛날처럼 깔깔 웃었다. 그리고 우린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나는 그가 아끼던 물건 몇 개를 선물 받았고 동부로 이사 온 지금도 잘 쓰고 있다. 
 

"나의 팬들에게. 난 웨스트파고의 3층 집으로 이사했어. 해바라기에 필요한 내 짐들을 모두 들고 말이야. 지금 암과 투병중인 나의 린다는 내가 친척들의 응석받이가 된 걸 다행이라 생각하고 만족해 하고 있지. 이 말 아니? 사람은 개를 소유할 수 있지만 고양이는 사람을 갖는다." 린다가 키우던 고양이가 편지를 남겼다. ⓒ 최현정

 
우리는 누구나 늙는다. 늙은이는 연악한 존재다. 그래서 내가 속한 사회와 국가가 나를 보호해 주길 바란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의 나라를 원한다. 전쟁터가 되지 않길, 약육강식 동물의 왕국이 아니길 빌어본다.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빨리 달리지도 못하는 인간이란 동물이 멸종하지 않기를 빌어본다. 린다는 남아있는 이들에게 우아하게 늙는 법을 가르쳐주고 아름답게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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