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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현 삼원보는 항일운동의 주역을 길러낸 신흥무관학교가 자리 잡은 곳이다. 이제 그 흔적이 많지 않지만 지금도 조선족 학교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신흥무관학교 등이 있는 유하현 삼원보의 남은 조선족 학교 유하현 삼원보는 항일운동의 주역을 길러낸 신흥무관학교가 자리 잡은 곳이다. 이제 그 흔적이 많지 않지만 지금도 조선족 학교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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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은 부민단을 이주 한일들의 자치·신흥기관으로, 종국적으로는 무장독립군 양성소로 만들고자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위안스카이의 도움으로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으나 지방정부에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또한 중국은 1911년 신해혁명을 계기로 권력분립 구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는 1913년 초 〈중화민국 국회에 제의하는 글〉을 중국 당국에 보냈다. 자신을 유하현의 한인을 대표하는 '국민회장'의 직함을 사용하여 현안을 해결해 달라고 4가지를 요청했다.

첫째, 정치적 권리로서 민적(民籍)을 허용해 양국 국민간의 경계심을 없애고, 자치권을 허용해 줄 것이며, 유능한 인재를 선발해 중국 측이 개최하는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줄 것.

둘째, 재산권을 보호해주고, 황무지를 개간할 수 있는 권리를 줄 것. 한국인들이 이주할 당시 만주는 사실 수많은 토지가 황무지였다. 특히 수로를 끼고 있는 습지는 거의 모든 땅이 황무지였다. 그것은 만주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이 개발한 논이다. 이를 인정해달라는 거다. 

셋째, 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인정해 줄 것. 

넷째, 군사훈련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상룡은 이 글에서 다섯 번째 이유로 "만주는 밖으로는 일본과 러시아가 엿보고 있고 안으로는 도적떼들이 횡행하다보니, 위태로운 마음을 거의 조석을 보장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우리가 만약 위무하여 품어주고 함께 방어한다면 한 배에서 바람을 만난 형제라서 반드시 사력을 다하여 노고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라 협력의 의지를 제시했다.
 
경학사 창립대회가 열렸던 유하현 삼원포 대고산
▲ 경학사 창립대회가 열렸던 유하현 삼원포 대고산 경학사 창립대회가 열렸던 유하현 삼원포 대고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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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중국이 한인 이주민들에게 거주허용과 재산의 보호 등 방안을 들었다. 

 1. 그 의관(衣冠)을 금지하여 그 형모(形貌)를 식별할 수 없게 만든다.
 2. 민적(民籍)에 드는 것을 허락하여 그 국계(國界)및 족계(族界)를 없앤다.
 3. 그 재산을 보호하여 대국이 은혜에 감동하게 한다.
 4. 황무지의 개간을 허락하여 토지를 개간한 이익을 거둔다.
 5. 그 학교를 관리하여 교육의 정신을 격려한다.
 6. 그 자치를 허락하여 교민의 협잡(挾雜)을 방지한다.
 7. 그 중 재지(才智)가 있는 자를 선발하여 국회에 참여할 권리를 동등하게 누리게 한다.
 8. 그 중 충용이 있는 자를 장려하여 훗날 방어할 때의 수요에 대비한다. (주석 6)

이상룡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유하현 지사에게 민적에 편입시켜 주기를 청산하는 정문〉을 세 차례 보냈다. 세 차례나 정문을 보낸 것은 주지사가 자주 바뀌었기 때문이다. 망명자나 이주민들에게 민적(국적)은 심각한 현안이었다. 민적이 없으면 토지나 주택을 구입할 수 없었다. 또한 악질 관리나 부랑배들로부터 갖은 협박과 갈취를 당하기도 하였다. '정문'의 몇 대목이다.
 
중국 동삼성의 벼논들. 이 벼논들을 개간한 사람은 우리 동포들이었다(2005년 5월, 제3차 할일유적답사 때 유하현 삼원포에서 촬영).
 중국 동삼성의 벼논들. 이 벼논들을 개간한 사람은 우리 동포들이었다(2005년 5월, 제3차 할일유적답사 때 유하현 삼원포에서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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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번의 유족으로서 국난을 만났으나, 용기는 안중근이 적을 쏜 것에 미치지 못하고, 지혜는 민영환이 할복한 것에 미치지 못한지라, 구차하게 목숨을 영위하면서 중화와 조선이 강역은 비록 다르지만 저 기성(箕聖)이 동쪾으로 건너온 뒤로부터 관계가 자별하기 때문입니다.

표류하는 배와 같은 신세라 머물러 정박할 곳이 없이 수년 동안 회인과 통화 사이를 방황하였습니다. 선통(宣統) 3년(1910)에 이르러 비로소 합방 소식을 듣게 되니.

천지가 캄캄하여 돌아갈 희망이 영원히 단절되었습니다. 저희들은 마침내 눈물을 뿌리면서 서로 고하기를 우리들의 조국은 비록 망했지만 모국이 상존하고 있으니, 와신상담할 곳은 이곳이 그곳이다.

그리하여 본 현(縣)이 경내에 가옥을 임차하고, 머리를 깎고 복장을 바꾸면서 먼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끊고, 이어서 민적에 들지를 청하였는데, 현조(縣照, 현에서 발급하는 공문서)를 받기에 이른 자는 약간인이었습니다. 그때 미처 현조를 방지못한 자들이 다시 지난봄에 일제히 명단을 제출하고 겸하여 상부에 회보하기를 청하면서 거두어 주는 은혜를 입기를 바랍니다. (주석 7)


주석
6> <중화민국 국회에 제의하는 글>, <석주유고(상)>, 549쪽.
7> 앞의 책, 549~55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이상룡, #석주이상룡평전, #이상룡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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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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