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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 홍성촌(紅星村), 옛 추가가 신흥강습소가 있었던 곳에 지어진 건물. 기와공장으로 쓰이고 있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 홍성촌(紅星村), 옛 추가가 신흥강습소가 있었던 곳에 지어진 건물. 기와공장으로 쓰이고 있다.
ⓒ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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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과 민족지도자들은 경학사의 운영이 어려운 중에도 경학사 부설로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동포자녀들의 군사교육을 서둘렀다. 경학사가 민단적인 성격을 띤 자치기관이었다면 신흥강습소는 독립군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기관이었다. 신흥강습소는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전단계로 설립되었다. 

지방 토착민들이 한인과 이주민들을 일본의 앞잡이로 보면서 교사(校舍)를 구입하기 어려웠으나 한 주민의 옥수수 창고를 임시로 빌려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경학사 안에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그 이름을 신흥학교라 하였으며 본과와 특과의 두 과정을 두었다. 본과는 보통 중학 과정이었는데, 교사로 장도순, 윤기섭, 이규봉과 중국인 모씨 등이 정해졌고, 특과는 군사학을 전수하는 과정으로서 교두(敎頭)에 이관직, 대장에 이장녕 두 사람이 각각 임명되었으며, 학교장에는 이철영이 추대되었다. (주석 8)

신흥강습소의 교사는 토착민들의 오해가 풀리면서 합니하 강북쪽 언덕 위에 신축하였다. 각 학년별로 널찍한 강당과 교무실이 마련되고 병영사(兵營舍)도 마련하였다. 내무반에는 사무실, 편집실, 숙직실, 나팔실, 식당, 취사장, 비품실이 구별되어 있었고, 생도들의 성명이 부착된 총가(銃架)가 별도로 설치되어 있었다.

신흥강습소는 1911년 5월 교사 낙성식을 갖고 학교명칭도 신흥중학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4년제 본과와 6개월 또는 3개월 과정의 속성과를 병설하여 국내외에서 찾아오는 젊은 인재들을 교육 훈련시켰다.

신흥강습소에서는 교가를 제정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제1절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의 영절의 
여러만만 헌헌자손 업어기르고
동해 섬 중 어린것들 품에도 품어 젖-먹여 준-이가 뉘뇨.

후렴

우리우리 배달 나라의 
우리우리 조상들이라
그대 가슴 끓는 피가 우리 핏줄에
좔 - 좔좔 걸치며 돈 - 다.

제2절
장백산 밑 비단 같은 만리 낙원은 
반만년래 피로지킨 옛집이어늘
남의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고
좀 서름 받-느니 뉘-뇨.

후렴

우리우리 배달 나라의 
우리우리 자손들아
가슴치고 눈물뿌려 통곡하여라
지-옥의 쇳-문이 온다. (주석 9)(3절 생략)
추가가 신흥강습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있는 건물의 내부. 현재 기와공장으로 쓰이고 있다.
 추가가 신흥강습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있는 건물의 내부. 현재 기와공장으로 쓰이고 있다.
ⓒ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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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강습소는 운영기금의 어려움 등 난관 속에서도 1911년 12월 제1회 특기생으로 김연·변영태·성준식 등 졸업생 40여 명을 배출하였다.

강습소의 운영은 당초 양기탁 등의 국내 모금과 이석영에 의하여 운영될 계획이었으나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국내 모금이 중단되고 말았기 때문에 전적으로 이석영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석영의 재산도 곧 고갈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신흥강습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재만 동포들의 기부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1911년에 서간도 지역에는 풍토병이 만연하고 가뭄과 서리 등 천재까지 겹쳐 동포들의 농사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으며, 신흥강습소 유지가 어려운 상황에 이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창환, 윤기섭 등은 학교를 유지하기 위하여 구걸을 해야 하는 역경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12년부터 풍년이 들기 시작하자 여준, 이탁 등을 중심으로 하여 신흥학교 유지회를 조직하였으며, 이 단체를 중심으로 각 지방에 재정을 갹출하여 신흥강습소의 경비를 충당하고자 노력하였다. (주석 10)


주석
8> 이관직, <우당 이회영실기>, 156쪽, 을유문화사, 1985.
9> 박환, <신흥강습소>, <한국독립운동사사전(5)>, 354쪽, 독립기념과, 2004.
10>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이상룡, #석주이상룡평전, #이상룡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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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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