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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100만 원. 누구에게도 권하지 못할 임금이다. 권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아예 불법이다. 하지만 뻔뻔스럽게도 이 임금으로 노동자를 부리겠다는 목적의 법안이 발의되었다. 시대전환 조정훈 의원이 발의한 가사근로자법 개정안이 그것이다. '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의 적용을 받는 가사 노동자는 최저임금법의 적용을 받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주 노동자에 한해 이 조항 적용을 예외로 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한 것이다. 네티즌들은 "노동 착취국 오명 쓰고 싶나", "일본의 강제징용과 다를 게 뭐가 있냐"고 비판했다.

가사근로자법은 현장의 가사 노동자들이 10년 넘게 노력하여 제정한 법으로 작년부터 시행되었다. 한국여성노동자회가 부설 전국가정관리사협회를 만든 것이 2004년이었다. 근로기준법은 가사사용인 적용제외를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은 근로기준법이 제정된 1953년부터 존재했다. 가사 노동자들은 이 조항 탓에 노동자로 일해 왔지만 69년간 노동자로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채 일해 왔던 것이다.

한국여성노동자회는 그 지점에 주목하고 전국가정관리사협회를 만들어 가사 노동자를 조직했다. 처음에는 근로기준법의 가사사용인 적용제외 조항을 삭제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개별 가정이 사용자로서 책임을 지지 못 한다는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래서 제공기관을 사용자로 하는 법안으로 하되 노동권을 보장하고자 만든 법이 가사근로자법이다.

이 법을 만들기 위해 한국여성노동자회를 비롯한 많은 여성단체와 현장의 가사 노동자들이 10년 넘는 시간 동안 고군분투했다. 10년이 지나면서 이미 70이 넘은 분들도 많았다. "나는 이 법의 적용을 못 받더라도 우리 후배들은 받게 해야 한다"며 노구를 이끌고 영하의 날씨에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셨던 기억이 선하다.

애초에 법의 목적 자체가 '가사서비스와 관련하여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가사근로자의 고용안정과 근로조건 향상을 도모하는것'이다. 이런 법을 최저임금을 주지 않기 위해 이용하겠다는 말을 들은 우리의 심정이 어땠을까. 분노를 넘어 마음이 아팠다. 이 법은 이역만리로 노동하러 온 여성 노동자들을 수탈하자는 목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이 법안은 다른 법들과 부딪히는 문제뿐 아니라 목적과 배경 판단에 있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다른 여러 법과 부딪힌다. 먼저 차별을 금지하고 평등을 명시한 헌법 정신을 위반한다. 또한, 이미 한국이 비준한 ILO(국제노동기구) 111호 '고용 및 직업상의 차별에 관한 협약'에 위배된다.

111호는 인종과 국적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비준된 ILO 협약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 또한, 2004년 이주 노동 정책이 고용허가제도로 바뀌면서 최저임금, 사회보험 가입 등 노동관계법 적용이 실현된 상황이다. 이주 가사 노동자에게만 월 100만 원의 임금을 주겠다? 어림도 없는 소리다.

깨끗한 공간에서 쉬고, 따뜻한 밥을 먹고, 청결한 옷을 입고, 아이를 키우는 일. 여성들이 지금껏 무급으로 해왔지만 가사 노동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필수 노동이다. 가사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최저임금 적용을 제외하겠다는 것은 가사 노동에 대한 가치절하이자 차별이다. 이 뒤에 깔려 있는 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여성 노동의 저평가이다. 여성이 주로 하는 노동을 가벼이 여기고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이라도 괜찮다는 사회적 편견이 이런 결과를 만든 것이다.

더군다나 이 법의 발의 목적이 맞벌이 부부의 돌봄 부담을 덜어 저출생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라 한다. 맞벌이 부부의 돌봄 부담 해소는 부부가 함께 돌봄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만 가능하다. 주 69시간 노동을 정책으로 만드는 한 절대 해결할 수 없다. 이는 노동시간 단축과 직결된 문제이다.

또한, 근본적으로 저출생 문제를 돌봄 부담만의 문제로 보는 시각 자체가 몹시 협소하고 안일하다. 여성에게 돌봄 노동을 전담시킨 채 성차별적인 노동 현장에서 살아남으라고 하는 현실이다. 임금은 제자리인데 물가와 집값, 교육비는 천정부지로 솟고 있다. 청년들은 비정규직으로 내돌려지며 과도한 노동에 소진되고 있다.

90년대생 여성 노동자들은 10년 후 나 혼자 혹은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그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저출생의 해법으로 타국의 여성 노동자 수탈을 내놓는 현실이 암담하기 그지없다. 국가가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고 이주 여성 노동자 수탈의 공범이 되어 해결하자는 말이다.

문제는 이 법안을 환영하는 이들이다. 현재 가사 노동은 H2 비자로 들어오는 중국 동포에게만 허용되어 있다. 이를 다른 국적의 이주 노동자도 일할 수 있게끔 허용하고 이들에게 낮은 임금을 주는 정책을 주장하는 이가 바로 오세훈 서울시장이다. 오 시장은 저임금으로 이주 가사 노동자를 쓸 수 있는 정책을 정부에 요구해 왔다. 조정훈 의원의 법 발의에 환영을 표하기도 했다. 싱가포르나 홍콩과 같이 저임금의 이주 가사 노동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제가 없는 싱가포르 이주 가사 노동자의 저임금과 홍콩의 이주 가사 노동자 착취는 이미 국제 사회의 질타를 받은 지 오래다. 이런 싱가포르나 홍콩을 모델로 하자는 것은 한국도 이주 가사 노동자 착취국의 대열에 서자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정부가 중국 동포뿐 아니라 다른 국적의 이주 가사 노동자를 허용하려면 그 전에 먼저 검토해야 할 것이 있다. 가사 일자리를 양질의 일자리로 전환하기 위해 국가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이다. 가사 노동이 낮은 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여서 혹은 너무 낮은 사회적 인식 탓에 노동자가 줄어들 수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가사 노동이 양질의 일자리가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가사 노동을 질 나쁜 일자리로 유지한 채 이주 노동자를 빈자리에 채워 해결하겠다는 것은 헌법에 평등을 명시한 국가로서, 국제 사회 일원으로서 몹시도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ILO 189호 협약(가사 노동자를 위한 양질의 일자리 협약)을 비준하는 일이다. 그간 국내법 미비로 비준할 수 없다고 핑계를 대었지만 가사근로자법이 시행되고 있는 지금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다.

인종, 국적, 여성, 가사 노동에 대한 중층적 차별로 점철된 이번 사건을 바라보며 착취와 수탈을 기획하기 전에 평등과 존중을 먼저 생각할 것을 주문해 본다. 그것이 올바른 국가의 책무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가 쓴 글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5,6월호 '女性여성女聲' 꼭지에도 실렸다.


태그:#가사노동, #이주여성, #이주노동, #여성, #가사근로자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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