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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초등학생 시절부터 50세에 가까운 이 나이까지 소위 '책벌레'로 살아온 나를 이렇게 뒤흔든 책이 있었을까? 4년 전, 일상에 지쳐 동네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20년간 워킹맘으로 살아오면서 각종 불안증, 번아웃 등의 초기정신질환에 시달리던 때라 이 책 제목에 확 이끌렸던 것이리라. 매일 조금씩 필사하다가 책을 모두 베껴야 할 지경까지 이르러서야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작가는 프롤로그부터 뼈를 때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나날을 보낸 덕분에 지금의 모습이 있다고, 무위의 나날인 것 같은 시절의 여유와 성찰이 없었다면 경비견에 엉덩이를 물릴까 두려워하며 쫓기듯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이른 아침의 숲에서 이슬 맺힌 거미줄을 보고 감탄했던 시간이 있었기에 세상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누리는 일을 은퇴 이후로 미루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타고난 승부욕과 굉장한 노력파인 나는 맹렬하게 달렸기만한 경주마였다. 작가의 표현대로, 나는 경비견에 엉덩이를 물릴까 봐 쫓기듯 살았고, 이슬 맺힌 거미줄을 보고 감탄할 시간조차 없었으며, 세상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일은 은퇴 이후로 미룬 뒤였다. 아이의 눈빛, 남편의 행동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볼 시간이 없었다. 엉뚱하게 살았다는 후회와 함께 나를 향한 애틋함이 올라오더니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란 사회가 강요하는 트렌드나 경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권리라고 한다. 나는 사회의 트렌드와 경향에서 자유롭기는커녕 쫓아가기 바빴던 사람이었다. 한가로운 것, 빈둥거리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선입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살았다. 물론, 사회가 강요하는 것으로부터 완벽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나 부모가 원하는 소위 '착한 사람' 노릇을 40년간 했으니 너무 긴 세월 아닌가. 피로에 젖도록 나를 몰아세우며 얼마나 오래 '되어야 할 나'를 쫓아왔던가. 사춘기나 결혼 후에 '진짜 나'를 찾아 방황하고 훼매이는 지인들을 이해하지 못했으니...

또, 작가는 어른이 되어서도 삶의 중심이 '나'에서 '타자'로 넘어가서는 곤란하며 타자지향의 삶이란 변화무쌍한 타인의 평가와 기분에 자아의 주체성을 고스란히 넘겨주는 것이라고 한다. 타인의 반응으로 자존감을 키워나가던 나에게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타인의 칭찬과 인정이 있어야만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기에. 그러나, 이제는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행복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을 줄 알게 되었다.

내 삶의 기준이 어떻게 바뀔 수 있었을까? 식상하겠지만, 좋은 책 읽기와 꾸준한 글쓰기가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작가가 소개한 아래의 팁 또한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 막 문을 연 카페에 들어가 그날의 첫 커피를 마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침도 있었다. 주머니엔 커피값만 챙겨 와서 시선을 고정할 책도, 스마트폰도, 노트북도 없다. 이를 아침의 카페는 조용하다. 나는 그곳에 그저 존재할 뿐이다. 호수 위에 떠 있는 배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보듯, 시공간을 멋대로 가로지르는 몽상에 모든 것을 맡기는 시간, 그런 멈춤의 시간을 보낼 때마다 나는 새로운 힘을 얻어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42쪽)

시간이 별로 없는 워킹맘에게 권하고 싶은 방법이다. 주말 오전에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나서야 한다. 집안일을 한두 개쯤 하다 보면, 나설 수가 없다. 눈 뜨자마자 100미터 경주를 하듯 뛰어나와야지만 나만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오전의 카페는 대부분 조용하다. 그곳에서 나는 주위를 맴도는 까치를 한 시간 동안 관찰한 적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새만 바라보는 것이 명상보다 더 큰 위로와 평안을 주었다. 또, 어떤 중년의 여인은 카페 천장만 한 시간 내내 쳐다보다가 가는 경우도 있었다. 자기에게 맞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일'을 찾아야 한다. 모든 해야 할 일들, 책임감, 의젓함을 잠깐 내려놓고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요히 있어야 한다. 너무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 별일 일어나지 않는다.

며칠전, 어느 영화 감독이 '무위도식'하는 삶을 꿈꾼다고 말했다. 또, 요즘 책들은 삶의 목적은 노는 것이라며 '호모루덴스'를 강조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는 아직 소수의 의견이며, 지금 현대 사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은 크나큰 도전이며, 누군가에게 민폐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 바쁘고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처럼 불안증, 번아웃에 시달리는 워킹맘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단,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불안할 때마다 이 책을 자주 들여다본다는 것, 그리고 20년 다니던 회사에서 퇴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로 나처럼.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도 올립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 피곤한 세상에서 벗어나 잠시 쉬어갈 용기

정희재 지음, 갤리온(2017)


태그:#정희재,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혼자만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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