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21 16:27최종 업데이트 23.05.21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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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육군 대장 시절의 정일권 ⓒ 전쟁기념관

 
박정희 정권 때 외무부 장관을 거쳐 6년간 총리를 지낸 데 이어 6년간 국회의장까지 역임한 정일권은 "순풍에 돛단 관운"(경향 1964.5.11)의 주인공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랬던 그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켰다고 평가되는 사건이 정인숙 스캔들이다.
 
1970년 3월 17일 밤중에 서울 마포구 절두산 근처인 한강 북쪽 강변3로(현 강변북로 일부) 도로에 승용차 1대가 정차됐고, 25세 요정 직원인 정인숙이 머리와 가슴에 총격을 받고 숨진 채 발견됐다. 수첩에서 박정희 대통령,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등과 더불어 정일권 총리의 이름이 나왔고, 세 살짜리 아들이 박정희 아니면 정일권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1993년 12월 17일 자 <동아일보> 기사 '횡설수설'은 "여의도 국회의장실에 들어서면 역대 의장들의 초상화에 압도당한다"며 "거의 실물 크기의 이들 초상화를 일별하다 보면, 우리 현대 정치사의 굴곡과 부침을 실감케 된다"고 한 뒤 "9대 정일권 의장은 천하가 부러워하는 관록을 누렸으나 근년 정인숙 여인과의 실자(實子) 문제로 송사에 시달렸다"라고 평했다.
 
정일권의 인생이 정인숙 스캔들 때문에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그보다 훨씬 더 큰 타격이 될 만한 것은 친일행위였다. 정일권의 친일은 영화나 드라마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극적인 요소가 많았다. 일제 패망 직후에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에 체포됐다가 극적으로 탈출하는 일까지 있었을 정도다.
 
그는 1985년 6월 10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회고록인 <비화 6·25> 제7화에서 "나에게 남 모를 절박한 기도의 순간이 세 번 있었다"고 한 뒤 "두 번째는 8·15 해방 직후였다"라고 말했다. "믿었던 동향 친구의 배신으로 소련 비밀경찰(KGB)에 붙잡히고 말았다"라며 유배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로 끌려가면서 겪은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이어 시베리아 유형(流刑) 열차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차 안에는 다발총을 옆구리에 낀 소련군 병사 한 명이 나를 감시했다. 탈출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그런 순간이었다. 나는 열차가 하얼삔역 근처의 오르막길에 접어들었을 때 탈출을 결심했다. 마음 속으로 하늘의 도움을 간절히 청했다. 이어 나는 소련군 감시병을 발로 걷어차고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자연과 인류를 극도로 착취하는 제국주의에 부역한 친일파의 기도를 하늘이 들어줄 리는 만무하지만, 그는 기도를 통해 확신과 용기를 다지며 탈출을 감행했다. 그가 친일을 하다가 이런 일까지 겪었지만. 친일청산이 억압된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친일 스캔들이 아닌 정인숙 스캔들만 크게 부각됐다.

7일 먼저 태어난 박정희와 비슷한 길
 
자기가 부역하던 나라의 멸망으로 고초를 겪은 정일권처럼, 그의 아버지인 정기영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정기영은 러시아제국(제정 러시아)을 위해 일하던 사람이었다. 정일권이 1917년 11월 21일 러시아 연해주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난 것은 그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정일권 편은 "1922년 러시아혁명의 여파가 극동 지역에 밀려와 극동혁명위원회가 창설되면서 제정러시아의 극동군 통역 장교인 부친이 면직되고 감시받게 되자 모친과 함께 경원으로 돌아왔다"고 설명한다.

아버지 정기영도 처벌을 피하고 함북 경원으로 돌아왔다. 혼란기에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극적으로 귀환하는 정기영의 모습이 1945년에 아들 정일권에게서도 나타났다. 두 부자가 겪은 일은 맥락은 다르지만 외형은 비슷했다.
 
정일권은 경원보통학교와 룽징(용정) 영산중학교 및 광명중학교를 거쳐 18세 때인 1935년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펑톈군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런 뒤 1937년에 졸업했다. 그 후 그는 자신보다 7일 먼저 태어난 박정희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만주국의 또 다른 사관학교인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신징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육사로 진학한 박정희처럼, 정일권도 일본에서 두 번째 사관생도 생활을 했다. 박정희처럼 교사 생활을 하다가 간 게 아니기 때문에 그의 졸업은 박정희보다 4년 빨랐다. 그래서 박정희보다 많은 시간을 친일에 바칠 수 있었다. <친일인명사전>은 "194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마치고 만주군 소위로 임관해 만주군 지린부대 교관에 보임되었다"라며 이렇게 설명한다.
 
"만주군 헌병 장교로 계인주·최남근 등과 함께 일본이 시베리아 철도를 폭파하려고 만든 특수부대 돌격대에서 3개월간 폭파 훈련을 받은 뒤 독립헌병대에 배치되어 랴오허 방면으로 출동했다. 1941년 신징에 있는 만주군 총사령부 고급부관실에서 근무하면서 3월에 헌병 중위로 진급했다. 1942년 모교인 광명중학교를 방문해 후배들에게 만주국 군관으로 입대할 것을 권유했다."
 
정일권이 일본 군대의 밥을 먹은 기간은 상당하다. 기초 군사훈련을 받으러 입소한 1937년 6월 1일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 8월 15일까지 8년간이나 먹고 자고 돈 받으며 부역했다. 그렇게 친일재산을 축적하다가 일제 패망 직후 KGB에 붙들려 러시아로 끌려갈 뻔했던 것이다.
 
극적으로 탈출해 평양을 거쳐 서울에 진입한 정일권은 가방끈을 좀더 늘리는 일에 착수했다. 늘어난 가방끈에는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그려졌다. 해방 4개월 뒤인 12월 15일, 그는 미군정청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뒤 대위로 임관한 그는 중대장·연대장·참모부장을 거쳐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이 됐다. 그 뒤 미국 참모대학에서 공부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벌어진 직후에 귀국해 33세 나이로 육군참모총장 겸 3군총사령관이 됐다. 이승만 정권의 국가범죄인 거창 민간인학살 사건 등으로 인해 사임했다가 육참총장에 재기용됐고, 합참의장을 거쳐 1956년 39세 나이로 대장 계급장을 달고 예편했다.

2023년 굴욕외교의 밑바탕 된 정일권의 친일
 

굴욕외교라는 거센 비판속에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회담 비준서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박 전 대통령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정일권 국무총리. ⓒ 자료사진


전역 뒤 그는 외교관으로 변신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튀르키예·프랑스·미국 대사를 거쳤다. "순풍에 돛단 관운"은 1960년 4·19 혁명으로 잠시 위기를 맞았지만, 이듬해 5·16 쿠데타로 태풍급 순풍을 다시 타게 됐다.

후배 박정희가 정변을 일으키자, 후배에게 충성하는 길을 신속히 선택했다. 박정희에 대한 미국 정치권의 지지를 끌어낸 인물이 바로 그였다. 그 뒤 유엔총회 한국 대표 등을 거쳐 1963년 12월 제3공화국 출범과 함께 외무부 장관이 됐다.
 
친일파 박정희 밑에서 외무부 장관이 된 그는 '옛날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일본의 영향력을 다시 끌어들이는 일에 주력했다.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통칭 한일협정) 체결 전년도인 1964년에 총리가 된 후로도 마찬가지였다.
 
한일협정에 대한 그의 집념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언론인 리영희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의 대담집인 <대화>에 소개돼 있다. 이에 따르면, 정일권은 총리 시절인 1964년에 합동통신 외신부장 겸 조선일보사 외신부장인 리영희가 한일협정과 관련해 정부에 불리한 기사를 발표하자 리영희를 정부청사인 중앙청의 비밀 공간으로 불러들였다.
 
정일권은 '그런 중대 기사를 내보내려면 총리 관저에 와서 조찬을 함께 들며 미리 알려달라'는 취지로 부탁했다. 리영희가 제기동에서 전차 타고 출근하는 데만 2시간이 걸려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하자, 정일권은 "승용차 없냐?"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럼 전화로 간단히 골자만 알려달라"고 당부했다.
 
집에 전화기가 없어서 청량리역까지 30분 걸어가야 전화할 수 있다는 답이 돌아오자, 정일권은 "전화도 없냐?"며 체신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전화 가설을 지시했다. 체신부 장관은 제기동은 미나리밭이라 전화 가설이 안 된다고 답했다.
 
정일권은 포기하지 않았다. 며칠 후 리영희의 집은 전화 가설 가능 지역이 됐다. 결국 헛수고였지만, 한일협정에 불리한 언론 기사를 막겠다는 집념을 느낄 수 있다. <친일인명사전>은 한일협정에 대한 정일권의 '공로'를 "1965년 2월 이른바 '불도저 내각', '돌격대 내각'이라 불리면서 일본을 방문해 사토 에이사쿠 수상과 회담을 마무리하고 6월 협정을 조인하는 데 앞장섰다"라는 말로 설명한다.
 
2023년 지금과 양상이 흡사한 1965년에 정일권은 '옛 주인'의 영향력을 다시 끌어들이는 데 앞장섰다.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과 맺은 연(緣)에 충실한 행보를 걸었던 것이다. 이때 정일권이 박정희와 함께 벌인 제2의 친일이 2023년 굴욕외교의 밑바탕이 됐으니, 정일권의 친일은 매우 지독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친일 스캔들이 그의 최대 흠집으로 기억되지 못하고 정인숙 스캔들만 기억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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