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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단 한 번도 공을 만져본 일 없던 여성이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축구하면서 접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함께하면 이렇게 따뜻하고 재밌다고, 당신도 같이 하자고요. [편집자말]
혈액형이나 사주, MBTI 등 이른바 성격을 가늠하는 테스트를 잘 믿지 않는다. 사람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나, 심지어 1시간 전의 나와 1시간 뒤의 나도 기분에 따라 내향적이 되었다가 외향적으로 변하고, 또 이성적이었다가 감성적으로 돌아서기도 하니까.

테스트를 신뢰하지 않아도 선호하는 성향은 있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검사하고 또 검사한다. 언젠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MBTI 검사를 했더니 ESTJ가 나왔다. 내가 선망하는 연예인인 개그우먼 송은이와 똑같은 MBTI다. 보자마자 생각했다. "오, 앞으로 나는 계속 ESTJ 해야지." 이 글을 쓰기 전에 다시 한번 해본 MBTI 검사에서 ESFJ가 떴다. 하지만 나는 ESTJ가 마음에 들기 때문에 바꾸지 않겠어.

보고 싶은 것만 볼래요
 
훈련용 공.
 훈련용 공.
ⓒ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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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도 마찬가지다. 나로서는 닥치지도 않은 일들을 내 생년월일만 보고 알아낼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내 나이와 생년월일, 시간대에 대한민국 서울에서만 수천 명은 태어났을 텐데, 모두 같은 운명을 타고났다는 건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사주에서도 보고 싶은 것만 보기로 했다. 내 사주에 따르면 나는 일도 오래하고 47세부터 인생이 풀려서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한다. 주변에 귀인도 많고 어딜 가도 천대는 안 받는단다. 앞으로의 10년만 잘 닦아놓으면 이후로는 탄탄대로라고 한다.

이거 엄청 좋은 사주잖아? 그러고 보니 백만장자 중에 ESTJ가 많다던데, 사주까지 이래버리니 아무래도 나 잘될 운명인가 보다. 이 사주는 믿어야겠다.

다만 사주에 따르면, 불만 세 개나 타고나서 발산하는 에너지가 많다. 그래서인지 오지랖이 넓어 많이 나서고 발화도 많단다. 사주를 봐주 분은 말했다.

"자기는 말조심해야 해요. 가만히 있잖아? 그러면 왕이 될 상이야. 누구든 자기를 도와주지. 화나는 일이 생기면 속으로 3초만 세봐요. 하나, 둘, 셋. 그다음에 말해요."

내가 왕이 된다고? 영화 〈관상〉 수양대군역의 이정재도 아니고,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외쳐야 할 판이다. 현실감 없게 느껴지지만 좋은 사주를 믿으려면 주의할 점도 받아들여야겠지. 기다리자. 3초가 긴 시간도 아니지 않나. 이후로는 사람들에게 "나 조만간 왕이 될 거거든요? 그러니 나한테 잘 보여요"라고 말하고 다녔다(입조심하랬건만...).
 
경기 중인 친구들.
 경기 중인 친구들.
ⓒ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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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에 나온 주의할 점을 새기다 보니 나는 꽤 많이 변했다. 누군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건네면 '발끈' 해서 스프링처럼 튀어나가며 반격하던 내가 두 손을 꼭 쥐고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센다.

얼마 전에는 한 독자가 전화를 걸었다. "책 인쇄 상태 때문에 전화했는데요"라고 운을 떼는 그는 목소리부터 화를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구매 서점에서 교환하시면 돼요"라는 내 말에 "내가 책을 엄청 많이 사는데 이렇게 형편없는 인쇄는 처음 본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속으로 조용히 하나, 둘, 셋을 센 다음에 대답했다. "네. 서점에서 환불하세요." 그는 혼자 열을 내더니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 그가 주는 화를 3초 뒤에 돌려주었으니 그는 그 화를 스스로 받았을 것이다.

축구와, 사주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

기다릴 줄 안다는 건 결국 내 자리를 지켜서 이겨내는 게 아닐까. 얼마 전에는 생초보 시절에 처음으로 팀에서 경기하던 영상을 다시 찾아보았다. 그 영상 안에는 기다릴 줄 모르고 자꾸만 상대 다리 밑으로 발을 뻗어대는 내가 있었다.

상대는 내가 발을 뻗는 순간을 노리고 순식간에 제쳐 골대쪽으로 뛰어 들어가 나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렸다. 왜 저렇게 덤볐을까.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자괴감만 쌓이게.
 
야간 훈련 후 공과 함께.
 야간 훈련 후 공과 함께.
ⓒ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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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릴 줄 모르고 자꾸 덤비는 건 내 사주 탓이 아니라 초보들의 습성이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빨리 무언가 이루어내고 싶어 하는 마음. 언젠가 축구 친구 '별로'에게서 드리블 후 아웃사이드로 수비를 제치는 공격법을 배우던 때였다. 수비를 서주던 별로의 박자를 나도 모르게 따라가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던 별로가 말했다.

"축구는 타이밍 싸움, 박자 싸움이에요. 상대 박자를 따라가면 어떻게 해. 남 박자 따라가지 말고 자기 박자와 타이밍을 지켜야지."

그러게. 유튜버 박막례 할머니도 인생의 비밀이라며 "남의 박자에 맞추지 말고 네 박자에 맞춰. 니 박자가 맞는 박자야"라고 했는데, 이게 축구에도 적용되는구나. 남의 박자에 춤추지 말고 내 타이밍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노련한 공격수는 수비가 발을 뻗을 때를 노린다. 훌륭한 수비수는 공격자를 구석으로 몰아넣어 결국 못 견디고 드리블을 칠 때, 공이 공격수 몸에서 떨어지자마자 등을 져 공을 빼앗는다.

축구도, 사주도, 내 인생마저도 모두 기다림을 말한다. 마음만 앞선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결법은 시간만이 알고 있다. 다행인 점은 3초만 참으면 내 마음도 상황도 바뀐다는 것이다. 자신의 박자와 타이밍이 올 때까지 참으면 반전이 일어나고 이내 나는 내 삶의 왕이 될 것이다.

태그:#풋살, #축구, #여자축구, #생활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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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노동자. 두 권의 책을 낸 작가. 여성 아마추어 풋살선수. 나이 든 고양이 웅이와 함께 살고 있으며, 풋살 신동이 되고 싶습니다. <편집자의 마음>, <들어 봐, 우릴 위해 만든 노래야> 두 권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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