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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함께할 것 같았던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한자어로 '천붕(天崩)'이라고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라는 뜻이다. 반대로 자식이 부모님보다 먼저 사망한 경우에 '참척(慘慽)'이라고 한다. 참담한 슬픔이라는 뜻의 한자어이다. 비교할 수 있는 슬픔이 없을 정도로 큰 슬픔이기에 비유적인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심정을 한자어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해마다 5월이 되면 필자는 이 참척의 슬픔을 안고 지내오신 후배의 부모님께 연락을 드린다. 35년 전 명동성당에서 '한반도 평화'를 외치면서 자신의 한 몸을 민족의 제단에 온전히 바친 조성만의 부모님이신 조찬배 아버님과 김복성 어머님이 그분들이다. 조성만 열사가 돌아가신 날이 5월 15일이고, 어버이날이 5월 8일이니 매년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추모행사 준비 안내 겸해서 안부 연락을 드리게 된다.

1988년 그날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투신하는 조성만.(사진/최순호)
▲ 조성만의 투신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투신하는 조성만.(사진/최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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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전인 1988년은 6.10 민주항쟁의 승리 이후 그간 한국 사회를 억눌러왔던 권위주의 체제로부터 민주화 이행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한 1987년의 이듬해이자 88서울올림픽이 개최되는 해였다. 6.10 민주항쟁으로 민주화의 공간이 확대되었던 1988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요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8년 초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에서부터 대학생들은 1960년 4.19 혁명 직후 대학생들이 통일운동에 나서면서 내걸었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를 똑같이 앞세우고 통일운동을 전개했다.

학생 사회에서는 국제정치의 냉전 구조가 그대로 관철되어 있는 한반도의 분단 구조를 평화 구조로 바꾸어 낼 때만이 한국 민주주의가 공고화의 길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다. 당시 대학생들은 1980년 5.18 민중 항쟁을 통해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을 지지해 온 미국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더 나아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미국이 꼭 찬성하는 것은 아니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반대할 수 있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이유로 남북의 문제는 남북 당사자들이 직접 결정하고 해결해 나가야 하며, 특히 정치적 이해관계보다 민족의 이해관계를 앞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남북의 대학생들이 '남북 학생회담'을 통해 '남북 공동 올림픽 개최' 등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방향과 과제를 설정하고 합의해 보자는 운동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생들의 운동에 대해 당시 노태우 정권은 탄압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명동성당청년단체연합회 활동을 하던 조성만(서울대 자연대 화학과 84학번)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 '남북 공동올림픽 쟁취', '양심수 석방'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할복, 투신했다.

조성만은
 
구로구청 사건을 겪은 뒤 변산으로 여행을 떠난 조성만. 죽음 직전 마지막 여행이었다.
▲ 조성만 열사의 마지막 여행 구로구청 사건을 겪은 뒤 변산으로 여행을 떠난 조성만. 죽음 직전 마지막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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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조성만은 전주의 해성고등학교에 입학하던 1980년, 광주에서의 시민항쟁과 군사정권의 무자비한 탄압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조성만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조성만은 이 시기 문정현 신부님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신앙인으로 거듭났다. 조성만은 대학 입학에는 바로 성공하지 못해 재수 생활을 했는데, 그때 스스로 명동성당청년단체연합회 소속의 '가톨릭민속연구회'를 찾아와 가톨릭 청년 활동과 연을 맺었다.

1984년 조성만은 재수 끝에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화학과에 입학했다. 입학 후 자연대 학생운동 동아리에 가입한 조성만은 김세진의 동아리 후배가 되는데, 그가 바로 2년 후인 1986년에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비판하며 분신, 사망하게 되는 김세진 열사였다.

1985년에 휴학하고 카투사(KATUSA)에 입대한 조성만은 미군과 일상을 함께하던 그곳에서 미국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더욱 강하게 자라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듣게 된 김세진 열사의 분신, 사망 소식은 조성만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1987년에 제대한 그는 6.10 민주항쟁에서 시민, 학생들과 함께 명동성당 농성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승리했다는 기쁨은 잠시였다. 그해 겨울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의 당선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는 구로구청에서 수상한 투표함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부정선거가 자행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곧바로 구로구청으로 달려가 시민들과 함께 투표함을 사수하는 구로구청 농성 투쟁에 합류한 그는 결국 경찰에 연행되었으며, 구류 열흘을 선고받았다.

새해가 밝아 1988년이 되었다. 이미 가톨릭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던 조성만은 서울올림픽이 열리는 해였던 그해에 신앙과 사회 그리고 인간에 대하여 더욱 깊게 고민하고 사색하게 되었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석 달 전부터 집중적으로 쓰기 시작했던 일기 내용을 살펴보면 "이 땅의 민중이 해방되고 이 땅의 허리가 이어지고 이 땅에 사람이 사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한 알량한 희망"이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시기 서울대를 졸업하고 삶의 여유를 누리는 중산층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포기한 그는 '뜻 없이 무릎 꿇는' 소시민의 삶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인간의 삶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고 싶다"는 말로 본인의 인생관을 설명했던 그는 죽음을 일주일쯤 앞둔 술자리에서 "이 땅에 피를 뿌려 세상을 정화하고 싶다"는 말을 한다. 돌이켜보면 그때쯤 이미 그는 민주주의의 제단에 희생양으로 자신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이를 토로했던 것 같다.

마침내 1988년 5월 15일 일요일 조성만은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이 땅에 남기는 자신의 마지막 말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공동올림픽 쟁취', '양심수 석방' 등의 내용을 유서로 뿌리고 할복, 투신하였으며 끝내 그날 저녁 사망했다.

그는 짧았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유서 마지막 부분에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오르는 아버님, 어머님 얼굴. 차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척박한 팔레스티나에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 인간이 고행 전에 느낀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라고 썼다. 어쩌면 조성만에게 죽음은 본인의 신앙고백이었는지도 모른다.

70년이면 충분하다

올해 조성만 35주기 추모 행사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지난 35년 동안 조성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많은 노력으로 매해 추모 미사가 있었지만, 이제까지 그의 기일에 그가 다녔던 명동성당 대성당에서는 한 번도 추모 미사를 드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35년 만인 2023년 5월 15일(월) 저녁 7시 명동성당 대성당에서 '조성만(요셉) 35주기 추모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미사'가 열리게 되었다. 미사 주례 신부는 1988년 당시 명동성당청년단체연합회 지도 신부였던 김민수(이냐시오) 신부가 맡아주시기로 했다.

올해 조성만 35주기 추모행사는 다양하게 준비되고 있다. 15일 저녁 7시 명동성당 대성당에서의 추모 미사에 이어 5월 20일(토) 그가 묻힌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참배하는 광주 순례 행사가 예정되어 있다. 이어서 6월 3일(토)에는 온라인 상에서 그의 추모곡인 '한 입의 아우성으로' 음원 발표회가 예정되어 있으며, 마지막 행사로 6월  10일(토) 오후 5시 명동성당 꼬스트홀(구 문화관)에서 노동가수 박준, 노래패 꽃다지, 한선희 등의 가수들과 35주기 추모행사를 위해 만들어진 '합창단 35+'등이 함께 하는 추모 공연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예정되어 있다.

특히 1988년 당시 장례 미사를 거부했던 가톨릭교회가 명동성당 대성당에서의 추모 미사를 허락한 것은 35년 만에 조성만을 가톨릭교회가 품어주는, 화해를 상징하는 의미다. 또 6월 10일 오후 5시의 추모 공연 장소는 1987년 6.10 민주항쟁 당시 시민들과 함께 조성만이 농성했던 문화관이다. 세월이 흘러 너무 낡았던 문화관은 리모델링 되어 꼬스트홀이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한 상태다.

올해 조성만의 35주기 추모 행사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가톨릭평화공동체, 서울대민주동문회,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전국동지회 외에도 천주교의정부교구정의평화위원회, 한국천주교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장산협의회, 정의평화환경전문위원회, 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 (사)저스피스, 천주교동북아평화연구소, 예수회인권센터, 천주교인권위원회,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가톨릭공동선연대, 전국가톨릭대학생협의회동우회, (사)우리신학연구소, 예수살이공동체, 팍스크리스티코리아,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 등 많은 가톨릭 단체들이 함께 준비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온전히 자신의 한 몸을 바친 조성만의 죽음 이후 올해까지 35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한국전쟁이 정전협정으로 포화가 멈춘 지 올해로 70년이 된다. 70년 전인 1953년에서 35년이라는 일제강점기만큼의 시간이 흐른 1988년 청년 조성만의 죽음이 있었다. 그때로부터 다시 35년이라는 일제강점기만큼의 시간이 흘러 2023년이 되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현실은 여전히 불안한 평화 상태에 놓여있다. 올해 맞이하는 조성만 35주기를 계기로 안정적인 한반도 평화를 만들어 가는 새로운 흐름이 시작되기를 소망한다. "70년이면 충분하다(Seventy Years is Enough!)"라는 한반도 평화운동의 슬로건처럼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대체되고, 한반도의 평화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다양한 운동이 다시 힘차게 시작되기를 소망한다.
 
왼쪽부터 아버지 조찬배, 다음이 문정현 신부다. 문 신부는 조성만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 조성만 왼쪽부터 아버지 조찬배, 다음이 문정현 신부다. 문 신부는 조성만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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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

35주기 추모행사를 준비하면서 가장 감사한 분은 바로 조찬배 아버님, 김복성 어머님 두 분이다. 자식의 죽음이라는 '참척'을 당하고도 35년의 세월을 꿋꿋이 버티시면서 자식을 대신해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그리고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살아오셨던 두 분께 이 자리를 빌려서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아울러 조성만의 이름을 기억하고 늘 함께 해온 많은 분들께도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린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볼 때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이라는 성서 구절이 떠오르게 된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시간이 행복한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모쪼록 올해 준비하고 있는 조성만 35주기 추모행사에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 이 추모 행사가 한반도 평화를 향한 우리들의 다짐이 되어 한반도 평화를 향한 새로운 시발점이 되기를 빌어본다.

* 필자 소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경주대학교 조교수(휴직 중), 가톨릭평화공동체 운영위원. 이원영은 조성만의 자연대 선배(수학과 81학번)이자 당시 명동성당청년단체연합회에서 활동했던 선배이다.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애국크리스챤청년연합'의 의장으로 조성만의 추모 사업을 진행해왔으며, 2001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에서 주최한 조성만 추모 연극을 기획했다. 이어 2004년 '가톨릭청년포럼'을 만들어 조성만 추모 행사를 계속 진행했다. 가톨릭청년포럼은 2007년 '성만사랑'으로 확대, 개편되어 2008년 조성만 20주기 추모행사를 주관했다. 이어 2012년 '가톨릭평화공동체'로 또 다시 확대, 개편되어 이원영은 초대 대표를 맡았으며 2014년부터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이후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 경주대학교 조교수를 거쳐 2020년 11월, 3년 임기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로 임명됨에 따라 경주대학교는 휴직 중에 있다.

태그:#조성만, #명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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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자이자 사회운동가. 현재 경주대학교 조교수(휴직 중)이면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와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소장을 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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