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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담당 편집기자로 일하며 더 좋은 제목이 없을까 매일 고민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더 돋보이게 하고, 글 쓰는 사람들이 편집기자의 도움 없이도 '죽이는 제목'을 뽑을 수 있도록 사심 담아 쓰는 본격 제목 에세이. [편집자말]
취재기자와 편집기자의 '동상이몽'이란 게 이런 것일까. 책 <기레기를 피하는 53가지 방법>에서 제목에 대한 에피소드를 보면서 한 생각이다. 

때는 지난 2021년. 코로나 기간 정부의 4차 재난지원금 소식을 전하는 기사를 쓰면서 기자는 고민에 빠진다. 경험상 정부 정책 기사는 독자들이 잘 관심을 갖지 않는 터라 평소보다 제목 선정에 더 신경이 쓰였던 것. 기자는 고심 끝에 <"19.5조 푸는데 왜 난 안줘" 지원금으로 번진 '벼락 거지' 분노>라고 제목을 달았다.

그 후 이어진 문장은 '정책 기사가 이례적으로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했다. 댓글에 졸지에 벼락 거지가 된 사람들의 분노가 줄줄이 적혔다'였다. 제목을 뽑는 사람으로서 그가 느꼈을 짜릿함이 나한테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 기자는 신조어를 잘 이용하면 이렇게 제목 장사를 잘할 수 있다고 평가했는데 글쎄... 안타깝게도 편집기자 입장에서는 아니다.

신조어를 쓸 때는 한번 의심하기
 
<놀라운 토요일>에서 신조어를 맞히는 게임
 <놀라운 토요일>에서 신조어를 맞히는 게임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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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거지(빌라에 사는 사람들을 속되게 이르는 말)', '벼락 거지(자신의 소득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음에도 부동산과 주식 등의 자산 가격이 급격히 올라 상대적으로 빈곤해진 사람을 가리키는 신조어)', 특정 분야에 미숙하고 서툰 사람들을 어린이에 빗대는 표현들인 '주린이'(주식 초보자), '골린이(골프 초보자)', '와린이'(와인 초보자) 등의 제목은 지양하는 추세기 때문이다. 왜냐고? 차별과 편견이 담긴 표현이라서다.

책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에서 나는 이렇게 쓴 바 있다.

"최근 몇 년 동안에는 편견이 담긴 표현은 아닌지, 미처 몰랐던 혐오의 표현은 아닌지, 성평등 가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 소수자나 약자에게 상처가 되는 제목은 아닌지 돌아보는 습관도 생겼다. 가령 언론에서 여과 없이 쓰는 신조어인 '빌거'('빌라 거지'의 줄임말), 휴거('휴먼시아에 사는 거지'의 줄임말) 같은 혐오와 차별의 말은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한다. 그럼에도 무심결에 주목을 끄는 단어를 써서 제목을 뽑고, 독자들이 다 읽은 다음에야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일을 하다 보면 '요즘 이 말이 유행이잖아, 이 정도는 써도 괜찮아' 하는 유혹을 받을 때가 있다. 중요한 건 글과 상황에 맞게 써야 한다는 것. 그래야 뒤탈이 없다. 아무 데나 신조어를 갖다 쓰면 안 된다. 그러나 그럴 때가 있지 않나?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사달이 나는 경우가 생길 때. 얼마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지난 5월 언론중재위원회(아래 언론중재위)로부터 회사로 제목 수정 권고 메일이 왔다. 이유는 제목에서 차별적인 표현을 썼다는 건데, 문제가 된 표현은 '결정장애'라는 신조어였다. 

언론중재위는 메일에서 "... 장애를 부정적 비유의 대상으로 삼은 표현을 제목에 사용하였다. 비록 유사한 경우에 해당 표현이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하더라도 대체 가능한 용어가 있으며 언론의 사회적 책임 내지 영향력을 고려할 때 장애에 관한 차별이나 편견, 부정적 인식을 조장할 우려가 있는 해당 표현의 사용을 삼가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은 각종 보도준칙이나 자율강령 등에서 지양할 것을 요구하는 사항이기도 하다..."라고 시정 권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걸 읽고 '아차' 혹은 '어머' 싶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를 비롯해서. 심지어 나는 그때 마침 검토하던 글의 제목을 고민하며 떠올렸던 단어이기도 해서 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때 단어를 떠올리기만 하고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어디선가 희미하게 '결정장애는 장애가 아닌데 써도 되나?' 싶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작은 의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의심하고 확인하는 습관이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표현을 걸러준다고 믿는다. 

어린이들을 낮춰 표현하는 '급식충', '잼민이'를 사용할 때, '진지충(어떤 주제든 심각하고 진지하게 반응하는 사람을 칭하는 말)'이라는 표현을 쓰게 될 때 그 외 계속 생겨나는 신조어를 듣고 그냥 웃어넘기지 않는 것,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찾아보는 것, 써도 되는 표현인지 한번 의심해 보는 것. 제목을 뽑는 일을 하거나 글 쓰는 사람이라면 꼭 챙겼으면 하는 습관이다.

이런 일은 소수의 사람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게 아니다. 누구나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약간의 귀찮음을 이기면 된다. 환경오염뿐만 아니라 말과 글의 오염이 심각해지고 있는 요즘 사회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혐오표현을 '혐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며 대항표현(혐오표현에 대해 되받아치는 말하기)을 알려야 한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물으면 나는 지극히 단순하게 답하고 싶다.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니까. 

독자에게 배운 제목의 한 수
 
제목을 뽑을 때 '존중의 마음'을 담아 문장을 쓴다면, 차별적인 내용이나 혐오적인 표현이 들어설 자리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지 않을까?
 제목을 뽑을 때 '존중의 마음'을 담아 문장을 쓴다면, 차별적인 내용이나 혐오적인 표현이 들어설 자리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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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이해를 잘 보고 있다'고 시작하는 짧은 응원의 글을 보낸 독자이자 시민기자가 있었다. 그는 말했다. 제목에도 '존중'이 들어 있으면 좋은 거 같다고. 존중이 빠진 제목과 존중이 담긴 제목을 비교하면 어감이나 무게감이 확실히 다르다면서 본인 글의 제목을 사례로 설명했다. 

가령, '공짜가 더 많은 가게, 엄마가 왜 이러냐면요' 이 제목은 '늙은' 엄마가 왜 이러냐는 식으로 조금 이상하게 비치지만, 검토 과정에서 바뀐 제목 '공짜가 더 많은 가게, 우리 엄마가 주인입니다'는 좀 더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제목으로 읽힌다고. 

아, 그럴 수 있겠구나. 몇 줄 안 되는 글이지만 제목을 지을 때 고려해야 할 생각 하나를 짚어주신 것 같았다. 그저 나무만 보고 살던 나에게 숲도 좀 보고 살라고, 더 큰 마음으로 일하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돌아보니 차별적이거나, 혐오적인 표현을 쓰지 않으려는 생각만 했다. 그 틀에서만 벗어나지 않으려고 돌다리도 두드려 가며 일하진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표현 하나에 쩔쩔맬 것이 아니라 그분 말대로 제목을 뽑을 때 '존중의 마음'을 담아 문장을 쓴다면, 차별적인 내용이나 혐오적인 표현이 들어설 자리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지 않을까? 독자에게 제목에 대해 한 수 배웠다. 

태그:#제목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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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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