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10 11:46최종 업데이트 23.05.10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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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영호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10일 오전 국회 소통관에서 최고위원직 자진 사퇴 기자회견을 한 후 취재진의 질문을 받으며 이동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징계 절차가 진행 중인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8일 당 윤리위원회에 갖고 들어간 소명 자료가 9일 자 언론에 보도됐다. <남로당 제주도당 지령서 분석>과 <제주 4·3사건, 문과 답>이라는 서적 외에, 4·3 관련 세미나 등에서 제공되는 문건들이 제출됐다고 한다. 징계 사유에 포함된 '제주 4·3은 김일성 지시로 촉발됐다'는 발언을 입증하고자 그렇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태영호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10일 오전  최고위원직에서 자진 사퇴했다). 

위 두 책의 저자는 제주 출신인 김영중 전 서귀포경찰서장이다. 그가 강조하는 메시지는 4·3사건(4·3항쟁)은 자연발생적인 민중 궐기가 아니라 외부 개입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문답 형식인 <제주 4·3사건, 문과 답>에서는 이 사건을 이렇게 정의한다.
 
정리하면, 제주 4·3사건이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중앙당과 남로당 전남당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 제주도당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고 북한 김일성 정권의 노선에 따라 공산 통일을 위하여 일으킨 폭동·반란으로서 1957년 4월 2일 사건을 완전히 종결할 때까지 만 9년간 이를 진압하고 교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도민이 무고하게 희생된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두 사건의 인과관계

4·19 혁명이 1960년 4월 19일 시작된 게 아니고 6월항쟁이 1987년 6월 10일 시작된 게 아니듯이, 4·3 역시 1948년 그날 시작된 게 아니다. 1947년 3월 1일이 출발점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1947년 3·1절 기념식 때 미군정 기마경찰이 아이를 치고도 모른 척하고 지나갔다. 이에 항의하는 제주도민들을 상대로 경찰이 무차별 발포해 6명을 희생시킨 사건이 4·3의 출발점이다. 이로 인한 항의 투쟁이 도민들의 남북분단 반대 투쟁과 겹쳐 1948년 4월 3일의 관공서 공격으로 이어졌다.

김영중은 4·3이 1948년 4월 3일 개시됐다고 주장한다. 1947년 3·1절 발포와 분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3·1 발포 사건이 4·3의 시작이라고 말하는데 맞나요?"라는 88번 질문에 대해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 뒤 "3·1 발포 사건이 없었어도 5·10 선거 반대 투쟁인 4·3은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3월 1일 발포와 4월 3일 공격 사이의 인과관계를 부정한다. 그 이유를 "3·1 발포 사건은 경찰이 의도한 행위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남로당이 민심을 격발시킬 수 있도록 유도한 술책에 말려든, 불법 시위 중 어린이가 기마경찰에 의해 다치는 돌발적 사고에 기인하여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입니다"라고 설명한다.

3월 1일 발포(A)와 4월 3일 공격(B) 사이의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데는 크게 세 가지 접근법이 있다. 첫째는 A로 인한 인과관계가 B까지 가지 못하고 도중에 중단됐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경찰이 도민들의 요구를 수용해 문제를 해결했거나, 도민들이 스스로 요구를 포기했음을 증명할 경우에 이것이 가능하다. 둘째는 A로 인한 인과관계가 B가 아닌 제3의 사건으로 연결됐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셋째는 A가 아닌 제3의 사건이 B를 잉태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김영중은 유효한 접근법을 보여주지 못했다. A가 경찰이 의도하지 않은 우발적 사건이라는 이유로 B와의 인과관계를 부정했다. 이렇게 터무니없는 논법을 전개한 것은 둘 사이의 인과관계를 부정할 뾰족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인과관계를 억지로 끊어놓으려 하는 이유는 그가 주장하는 메시지에서 잘 드러난다. 4·3이 외부 개입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이것이 자연발생적인 민중 궐기에서 비롯됐음을 은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3·1절 발포와의 인과관계를 애써 부정했다고 볼 수 있다.

김영중은 또 다른 책인 <남로당 제주도당 지령서 분석>에서는 제주도에 대한 북한·소련 등의 개입을 입증하는 데 주력한다. 3·1절 발포로 인한 민중 궐기조차도 남로당 지시에 의한 것으로 해석한다. 심지어 민중 궐기의 우발성까지도 그 지시와 연결한다.

우발적 민중 궐기가 남로당 지시에 의한 것임을 입증하고자 그가 제시한 문건이 있다. 3·1절 발포 9일 전인 1947년 2월 20일 작성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서한이 그것이다. 이런 서한이 그의 책에는 지령서로 표기돼 있다.

이 서한은 남로당 기층 조직인 각 세포를 상대로 3·1절 기념식 매뉴얼을 전달한다. 서한에는 "만일에 행사 및 시위 행렬을 합법적으로 못하는 시에는 당 독자적으로 감행할 것이므로, 각 세포에서는 당 지도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게 하기 위하여 특별대표를 선정하여 저놈들의 주목을 끌지 않게 할지어다"라는 대목이 있다. 미군정의 방해로 3·1절 행사에 차질이 생길 경우에는 기층조직들이 독자적 판단을 내리라는 권유다.

김영중은 "남로당 지령서들을 추적해 보면 남로당 중앙당->북한 박헌영과 김일성->북조선 주둔 소련군정 레베데프->소련 연해주 군관구 스티코프->소련 스탈린으로 일사불란하게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한 뒤 기마경찰의 처사에 대한 도민들의 항의까지도 이 연결 라인에 넣는다.
 
만일 행사 및 시위 행렬을 합법적으로 못하는 시에는 당 독자적으로 감행할 것'이라는 방침에 따라 불법 집회와 시위를 강행하여 폭동 또는 변수를 유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어린이를 치고 그냥 지나간 경찰에 대한 도민들의 항의와 경찰의 발포 역시 남로당이 유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제주도민들을 박헌영·김일성·스탈린과 연결했다. 남로당원들이 상부 지시에 따라 3·1절 기념식을 준비한 것과 일반 민중이 3·1절 기념식에서 우연히 경찰과 충돌한 것은 전혀 별개 사안이다. 그런데도 둘을 억지로 연결했던 것이다.

김영중은 3·1절 발포와 4·3 공격의 인과관계는 억지로 끊어놓은 반면, 남로당의 3·1절 기념식 지시와 돌발적인 민중 항의 사이의 인과관계는 억지로 연결했다. 일관성 없고 터무니없는 이런 책에 태영호 의원이 심취해 그것을 윤리위원회 회의에까지 갖고 갔던 것이다.

당시 상황과 맞지 않은 '외부 개입설' 

남로당 제주도당과 박헌영·김일성을 연결하는 김영중의 논법은 당시의 정치 상황과도 맞지 않는다. 8·15 해방 이전에 가장 대표적인 한국 공산주의자는 박헌영이었다. 역사 저술가 안재성의 <박헌영 평전>은 "박헌영이란 존재는 1920년대 후반부터 소련에까지 알려져 있었다"라며 "그에게는 '조선의 레닌'이라는 별명까지 붙어 있었다"라고 한 뒤 "김일성 환영대회장에서는 '스탈린 만세!'와 함께 '박헌영 만세!'가 연호되기도 했다"라고 설명한다.

해방 직후의 김일성이 박헌영과 극렬히 대립한 이유 중 하나를 보여주는 설명이다. 그런 상황에 놓인 김일성이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을 제치고 남로당 제주도당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박헌영은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1946년 9월 29일 월북함으로써 남한 조직에 대한 영향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스스로 '지역구'를 방기한 이 선택은 김일성과의 경쟁에 패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그런 처지에 놓인 그가 제주도당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도 비현실적이었다.

당시의 한반도 정세를 놓고 볼 때도 4·3 사건과 외부의 관련성이 인정되기 어렵지만, 무엇보다 둘 사이를 연결할 물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남한 극우세력은 '헛소문'을 퍼트리고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난 기원을,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펴낸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의 근거는 박갑동의 글에서 비롯"됐다고 규명한다. 남로당 지하 총책을 지냈다는 박갑동이 1973년부터 <중앙일보>에 연재한 '남기고 싶은 글' 속에 "남로당 중앙당의 폭동 지령에 의해 4·3 사건이 발생했다"는 내용이 있다고 소개한다.

그런데 박갑동은 한국이 아닌 일본에 살고 있었다. 한국에서 자기 글이 나간 뒤 그는 자신은 그렇게 쓴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보고서는 서북청년단(서청)과 경찰의 횡포를 언급하면서 박갑동의 해명을 이렇게 전한다.
 
도쿄에 살고 있는 박갑동은 문제된 글에 대해 '내가 쓴 것이 아니고 내 글을 신문에 연재할 때 외부에서 다 고쳐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박갑동은 이어 '4·3이 5·10 선거 반대투쟁이라지만 왜 유별나게 제주에서만 그랬겠는가? 4·3은 서청과 경찰이 횡포를 부려 발생한 사건이다. 본격적인 무장투쟁이 아니며, 경찰과 서청에 대항하기 위해 제주도 안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태영호 의원이 4·3 북한 개입설을 입증하고자 당 윤리위에 제출한 서적은 북한 개입설을 입증하기보다는 그 허구성을 스스로 증명하는 책이다. 3·1절 사건과 4·3 투쟁 사이의 인과관계를 무리하게 부정하고, 3·1절 기념식에 대한 남로당 지시를 그날 우연히 일어난 민중 항의에 대한 남로당 지시로 둔갑시켰다. 또 아무 근거도 없이 박헌영·김일성·스탈린을 4·3과 연결했다.

태영호 의원은 북한 개입설의 허구성을 노출한 책을 두 권이나 들고 윤리위원회에 들어갔다. 그가 4·3에 대해 제대로 공부도 하지 않고 '헛소리'를 해왔다는 것은 이 장면 하나로도 명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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