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08 13:31최종 업데이트 23.05.08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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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3세(74) 영국 국왕이 6일(현지시간) 대관식이 거행된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영국 국교회 최고위 성직자인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로부터 왕관을 수여받고 있다. 이날 찰스 3세는 대관식에서 영국과 14개 영연방 왕국의 군주가 됐음을 공표했다. ⓒ 연합뉴스


지난주 영국에서 가장 흥미로운 날은 5일이었다. 4일 영국 지방선거 다음 날이었던 그날, 결과가 속속 올라오며 노동당의 승리가 내년 총선까지 이어질 것인가에 대한 분석이 쏟아졌다. 또한 6일로 예정된 찰스 3세의 대관식 전날이기도 했다. 미리 알아두면 좋을만 한 의례, 사용될 마차와 왕관, 참석자 리스트 등 각종 정보가 쏟아졌다.  
 
선거와 대관식. 각각 민주주의와 군주제의 산물로 이 둘은 유럽 역사에서 피 흘리며 경쟁했던 가치를 상징한다. 17세기 후반 타협으로 마무리 지은 영국의 입헌 군주제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두 행사가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면 모를까,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한 후 이틀 만에 "신이시여, 국왕을 보호하소서"가 나올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영국의 지인들에게 선거와 대관식이 머릿속에서 엉키지 않는지 물어보았다. 충돌까지는 아니지만 둘을 연결시켜 생각하던 이는 세간의 관심이 대관식으로 몰릴 게 분명하기 때문에 선거에 참패한 보수당의 리시 수낵 총리가 반사이익을 볼 것이라고 했다.

듣고 보니 그렇다는 반응도 있었다. 태어나 보니 제도가 그렇게 있었고 '국민 할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개개인의 일상을 자극하지 않았으며 70년 만에 이루어지는 대관식이라 깊이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았다.

군주제 폐지 여론 25%
 

영국 국립사회연구센터의 여론 조사 결과의 추이. "영국이 군주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 국립사회연구센터


"영국이 군주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대관식을 일 주일 정도 앞둔 4월 28일 국립사회연구센터의 왕실에 대한 흥미로운 여론 조사 결과가 나왔다. 국립사회연구센터는 장기적인 여론의 흐름을 보기 위해 1983년부터 40년째 같은 질문으로 추세를 분석하고 있다. 결과는 이렇다. ▲ 대단히 중요하다 29% ▲ 꽤 중요하다 26% ▲ 많이 중요하지 않다 20% ▲ 전혀 중요하지 않다/폐지되어야 한다 25%
 
찬반이 팽팽해 보이지만 이를 두고 언론의 해석은 갈렸다. "대단히 중요하다"가 역사상 최저라는 사실에 왕실의 위치가 흔들린다고 보는 쪽이 있는가 하면 '굳건하다'고 분석하는 쪽도 있다. 왕실이 폐지되려면 국민 투표를 거쳐야 하는데 설문 결과로 볼 때 폐지에 표를 던질 층은 25%에 불과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설득력이 있었다. 영국에서 군주/공화제은 단순한 정치 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 전통, 문화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모순되어 보이지만 국왕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관계에서 정당정치를 발달시키며 고유한 내각제를 만들어 냈다.

문서화된 헌법도 없고 언제나 시끄럽지만 안정적으로 민주주의를 운영해 온 국가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 때문에 군주/공화제에 대한 질문은 실질적으로 군주제가 정치 영역에서 부작용이 없는데 영국의 전통과 고유성을 포기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된다.    
 
지인들은 모두 "많이 중요하지 않다"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직전에 있었다. 다시 말해 아무도 군주제를 지지하지 않지만 공화제를 선명히 지지하지도 않았다. 왕실 폐지 쪽에 가장 근접한 의견을 보인 이는 "세금 낭비"라 했다. 왕실에 별 관심이 없다는 다른 친구는 "왕자와 공주를 인생에 한명 두는 것도 재미있다"고 했다. 
 
동화 속 세계에 머물며 모나지 않게 군다면 "별로 중요하지 않다"층이 폐지로 움직이지 않을 것 같다. 동화 속에 머물기는 설명해 주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옛날 옛적 전통을 지키는 것이고 모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적 변화를 따라야 함을 의미한다. "오래된 술병에 새 술 담기"다.

보석의 향연
 

6일(현지시간) 런던 웨스트민스트 사원에서 열린 찰스 3세의 대관식은 1953년 어머니 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 이후 70년 만에 열렸다. 사진에서 왼쪽은 이날 대관식에 참석한 찰스 3세, 오른쪽은 1953년 6월 2일 대관식에 참석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모습. ⓒ 연합뉴스


찰스 3세 대관식에서 선보인 "오래된 술병"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건 1953년 6월 2일 진행된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과의 비교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영국 국교회의 캔터베리 대주교가 진행하고 성유를 바르는 등 종교성 짙은 의식은 동일했으며 신, 정의, 사랑, 자비 등 큼직큼직한 개념들이 사용되었다.

1300년대 전설이 담긴 의자부터 시작해 1821년 조지 4세를 위해 제작된 예복, 장갑, 보주(orb), 홀(scepter), 보석의 향연으로 1661년에 만들어진 왕관까지 시각적으로 수백 년 전의 모습을 재현했다.
 
새롭게 담아야 하는 술은 국왕마다 다르다. 1953년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은 텔레비전 생중계 수용이었다. 당시 막 보편화되기 시작해 영국은 약 270만 세대가 흑백 TV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국영방송 BBC는 생중계를 제안했다. 지금 기준으로는 별것 아니지만 당시 TV를 저급 매체로 간주했던 이들은 대관식의 신성함이 떨어진다고 반대했고 여왕도 실수에 대한 부담과 자신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걸 꺼렸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여왕의 대관식은 성공적이었다.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된 대관식을 보기 위해 최신 매체인 TV 앞에 모여든 사람이 약 2700만 명으로 당시 성인의 56%에 해당한다.

사회적 상황도 좋았다. 2차 대전 이후 영국은 패전국 독일만큼 모든 제도를 뒤집지는 못했지만 국가 의료보험, 임대주택, 각종 사회보장 제도, 철도 항공 및 기간 산업의 국영화 등 전후 복지 국가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여왕은 전쟁의 피로감 속에 전후 질서에 대한 사회적 구심점으로 기능하면서 개혁이 가지고 오는 빠른 변화 속에 안정감을 주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받는다.

"나의 왕이 아니다"
 

6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중심부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부근에서 시위를 벌이던 반군주제 단체인 '리퍼블릭' 회원을 경찰이게 체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찰스 3세 대관식에 담은 새로움은 다양성에 대한 포용이었다. 짙은 종교성은 유지하되 대관식에 여성 목사가 등장했고 찬송가는 웨일스어와 스코틀랜드어로도 불렸다. 영국 국교회뿐 아니라 불교, 힌두교, 유대교, 이슬람교, 시크교 등 다른 종교 지도자들도 초대받았고 흑인 합창단이 공연했다. 비공개 성유 의식을 위해 사용한 가림막에는 영연방 국가 이름을 새겨 넣었고  21세기의 가치 "지속성"에 맞춰 장갑도 재활용했다.

대관식을 이틀 앞두고 윌리엄 왕세자 부부가 궁 밖에서 시민들과 함께 깜짝 대화 시간을 가졌고 기차역과 지하철역에는 찰스 3세 부부의 목소리로 "멋진 대관식 주말을 보내시길 바랍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대관식 기념우표가 발행되었고 대관식 때 먹는 치킨 샐러드와 생선 없는 대관식 생선 파이 등도 공개되었다. 비용에 관한 논란이 있었지만 동화속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모나지 않는 신중함이 보이는 기획이었다.

하지만 시민 사회를 거슬리게 만든 것은 대관식의 안전을 맡은 런던 경찰이었다. 대관식을 며칠 앞두고 대관식 질서 유지를 위해 수만 명의 얼굴을 스캔해 지명 수배된 범죄자나 테러리스트를 걸러내는 최신 안면 인식 기술을 사용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 기술은 조지 오웰이 지적한 미래 사회의 디스토피아, 즉 "대중 감시" 기술로 해석되어 사회적 논란이 된 바 있다.
 
여론의 뭇매를 맞았지만 결국 대관식 날 반군주제 단체인 '리퍼블릭'의 회원들을 체포했다. 이들은 "찰스 3세를 선출했는가?"라며 공화제로의 전환을 호소하면서 대관식 행진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고 합법적인 선상에서 시위하겠다고 밝혔었다. 찰스 3세 국왕 부부를 태운 마차가 지나가는 트래펄가 광장에서 "나의 왕이 아니다"라는 팻말을 가지고 시위를 준비하다 찰스 3세가 지나가기 전에 사전 체포되었다.    
 
누구의 결정이었을까. 왕실 측이라면 대관식에서 표방한 포용의 범위가 너무 빈약하다. 경찰 측이라면 그가 혹시 공화제 지지자는 아닐까. 모가 나서는 안 되는데 굳이 필요 없는 잡음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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