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11 13:50최종 업데이트 23.05.11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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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8일 국가보훈처가 104주년 3·1절을 맞이해 독립운동가 15인 흑백사진을 인공지능(AI) 기술로 복원한 컬러사진을 공개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색채사진 복원 전과 후 모습. ⓒ 국가보훈처


1949년 6월 26일 백범(白凡)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했다. 그가 거처하던 사저이자 피격 현장인 경교장(京橋莊)에 빈소가 마련되었다. 온 국민이 슬픔에 잠겼다. 당시 신문 기사에 그 애도 열기가 고스란히 담겼다.

경교장을 찾은 조문객이 열흘 동안 124만 명이었다고 <자유신문> 1949년 7월 6일자는 보도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140만 명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인파가 백범이 누워 있는 현장으로 찾아왔는지 가늠이 된다. 


부산 완월동의 공생보육원에서는 원아 100여 명이 아침 조회시간과 저녁 취침시간마다 '선생님의 숭고한 길을 따르겠다'고 맹세하는 애도의 시간을 갖는다고 <자유민보> 1949년 7월 1일자는 전했다. 유명 음식점이나 요정들도 자진 휴업했다. 인천 부평에서는 단식하는 사람도 있었다. 전국 각지에 분향소가 마련되었다.

5일 동안이나 걸어서 빈소까지 찾아와 조문한 젊은이도 있었다. <경향신문> 1949년 7월 4일자를 보면, 충남 서천군 기산면에 사는 한 청년이 비보를 듣고 닷새를 걸어서 7월 1일 오후 경교장에 도착했다. 그는 영전에서 통곡하고 경교장을 네 번 돌고 다시 통곡한 뒤 가져온 돈 100원을 영전에 바쳤다. 그는 솔잎을 먹어가면서 왔다고 했다. 경교장 측에서는 이 젊은이의 행동에 감격해 여비로 1000원을 주어 돌려보냈다고 한다.

국민들은 너나없이 백범의 타계를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분단된 영토와 갈가리 찢긴 여론을 하나로 모아 잘사는 나라로 만들어 줄 구국의 영웅으로 백범을 점찍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점이 그의 목숨을 앗아간 이유이기도 하다.

고심 끝에 인천감리서 탈출을 결심한 백범
 

『인천부사』에 실린 1907년쯤의 인천 감리서 정문 모습. 원 안의 얼굴은 인천부윤 김윤정(1869~1949)인데 백범이 수감되었을 때 경무관이었다고 『백범일지』에 적혀 있다. 김윤정은 일제강점기에 초고속 승진해 고위 관료를 두루 지냈다. ⓒ 정진오


백범을 백범일 수 있도록 한 가장 중요한 계기는 무엇일까? 온갖 고초를 겪어 가면서도 끝내 굽히지 않고 임시정부의 숨통을 지켜낸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을 빼놓을 수 없겠지만, 그보다도 더 근본적인 순간은 인천 감옥에서의 탈옥이라고 할 수 있다.

백범은 1896년 3월 스물한 살 나이에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죽였다. 일본인들이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앙갚음 차원이었다. 이 때문에 백범은 외국인 관련 사건을 담당하던 인천감리서 감옥에서 옥살이했다. 백범은 인천감리서 모습을 자서전에서 자세히 묘사했다.

'감옥은 내리(內里)에 있었는데, 내리 마루에 감리서가 있고, 왼편에는 경무청이 있고, 오른편에 순검청이 있었다. 감옥은 순검청 앞에 있고, 그 앞에는 노상을 통제하는 2층 문루가 있었다. 감옥 주위에는 담장을 높이 쌓아 올렸고 담 안에는 평옥(平屋) 몇 칸이 있는데, 그 방들을 반으로 나누어서 한편에는 미결수와 강도·절도·살인 등 죄인을 수용하고, 나머지 반쪽에는 민사소송범과 경범위반(違警犯) 등 이른바 잡범(雜囚)을 수용하고 있었다.' _『백범일지』 중에서 (도진순 주해, 돌베개)

한여름의 감옥은 무척 덥고 극히 불결했다. 백범은 장티푸스에 걸려 고생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동료 죄수들의 도움으로 살아난 백범은 재판 과정에서 법정에 나와 있던 일본인 와타나베(渡邊)를 통렬히 꾸짖는 발언 등으로 감리서 내부뿐만 아니라 인천 전역의 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나 사형수 신분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옥중에서 백범은 자신도 신서적을 읽으며 세계 역사와 지리 등을 공부했고, 죄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사형집행일에 백범의 교수형이 전격 연기되었다. 이 틈에 구명운동이 일었다. 특히 강화도에 사는 김주경이라는 이는 자신의 온 재산을 써가면서 백범의 석방을 위해 애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옥문을 걸어서 나가기 어렵겠다고 판단한 김주경은 백범에게 편지를 보냈다.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로운 물고기가 아니며, 충은 효에서 비롯되니 부모를 생각해서라도 탈옥하라는 취지였다. 백범은 고심 끝에 파옥(破獄)을 결심했다.

백범 "대장장이에게 '삼릉창' 만들어 달라" 부탁
 

최고령 대장장이 송종화 장인이 제작한 '한 자 길이 삼릉창'. 세모 형으로 반짝이는 창날 부분이 한 자 길이(약 30cm)이고, 검고 뾰족한 슴베는 창 자루에 박히는 부분이다. 백범의 탈옥 도구 삼릉창 복원 차원에서 만든 것인데 백범이 사용한 그것과 같은 모양인지는 알 길이 없다(가운데). 『조선의 무기와 갑옷』(민승기 지음, 가람기획)에 실린 삼릉창 그림. 조선시대 무기와 관련한 서적 『융원필비』에 소개된 그림이라고 한다(왼쪽과 오른쪽). ⓒ 정진오


탈옥을 위해 백범이 준비한 결정적 도구가 있었다. 창과 방패라고 할 때의 그 창(槍)이었다. 백범은 면회 온 부친에게 '대장장이에게 한 자 길이 삼릉창(三稜槍)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새 옷 속에 숨겨 들여달라'고 부탁했다. 

이 삼릉창으로 감옥 마루 밑으로 들어가 땅에 깔아 놓은 벽돌을 들추어내고 흙을 파내서 밖으로 나갈 공간을 확보했다. '누구든지 내 갈 길을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결단을 내버릴 마음으로 쇠 창을 손에 들었다'는 백범의 얘기처럼 삼릉창은 중요한 탈출 도구였다.

1898년 3월, 기적적으로 탈옥에 성공한 백범은 충남, 전북, 전남 등지를 다니면서 그 지역의 풍물과 민심을 살폈다. 백범은 그 뒤로 교육운동에 투신했다가 '105인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인천 감옥에서 또 옥살이했다. 백범은 자신이 두 차례나 감옥 생활을 했던 인천을 일컬어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고 했다.

백범이 인천감리서에서 첫 번째 재판을 받을 때 인천에 살던 일본인들은 인천 감리서 내부의 인력 상황까지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인천부(仁川府)가 중심이 되어 『인천부사(仁川府史)』를 펴냈다. 

이 『인천부사』에 백범이 감옥을 탈출하던 바로 그해인 1898년에 일본인들이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감리서 내에 '한국경찰서 및 감옥'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경무관(警務官) 1명, 총순(總巡) 2명, 순검(巡檢) 60명으로 조직되어 있다고 기록했다.

백범이 교육운동에 뛰어들고, 독립운동에 매진함으로써 민족 지도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데에는 인천 감옥 탈출이라는 요인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인천 감옥에서 교수형 신세를 면할 수 없었을 테다. 백범이 탈출 도구로 쓴 삼릉창을 어느 대장장이가 만들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인천감리서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대장간에서 만든 것만은 분명하다.

인천감리서 부근에서 살았던 의학박사 신태범(1912~2001)은 『인천 한 세기』에서 1920년대 인천의 대장간 풍경을 간략히 언급했다. 이 글이나마 있어 개항기 인천의 대장간 상황을 떠올릴 수 있다.

'당시 쇠붙이를 다루는 곳은 대장간뿐이었다. 해방 후까지 애관(愛舘) 아래 최씨 대장간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의 눈에 띄었을 뿐 아니라 도끼, 칼, 호미, 낫 등 솜씨로도 유명했다. 변두리에도 몇 집이 있었는데 대장간 앞에 황소를 묶어 놓고 편자를 박던 광경은 어린이들의 한 구경거리이기도 했다.'

백범의 삼릉창, '최씨 대장간'일 가능성 크다
 

몇 해 전 인천 중구 신포시장 로터리에 세워진 백범 동상. 시민들이 친근감 있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제작했다. 2023년 4월 21일. ⓒ 정진오

 

옛 인천감리서 터에서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세워진 백범 모자상(母子像). 지나던 한 여성이 백범 동상을 끌어안고 있다. 2023년 4월 21일. ⓒ 정진오


신태범 박사의 회고가 백범이 탈옥할 때로부터 불과 20여 년 뒤의 상황이다. 그러니 애관 아래 최씨 대장간에서 백범의 삼릉창을 만들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변두리 대장간 몇 곳 중에서 제작했을 수도 있다. 

신태범 박사는 또 어린 시절을 보낸 감리서 주변의 풍경을 설명하면서 감리서 감옥은 1909년 한성감옥(漢城監獄) 인천분감(仁川分監)으로, 1912년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 인천분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20년대 초에 폐쇄되었다고 했다.

1930년대 인천의 대장간 현황을 알 수 있는 자료도 있다. 양준호 인천대 교수가 당시 인천상공인명록(仁川商工人名錄) 등을 토대로 펴낸 『식민지기 인천의 기업 및 기업가 : 데이터베이스의 구축』이란 책에 따르면, 인천에서 세금을 내는 대장간들이 총 9곳 있었다. 이때는 인천이라고 해 봐야 지금의 인천 중구와 동구 지역이다. 

경영주는 일본인이 5명, 한국인이 4명이었다. 영업세액 기준으로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곳은 인천 외리(外里) 238번지의 최경운(崔景雲) 씨가 운영하는 대장간이었다. 주소만 놓고 보면, 신태범 박사가 언급한 애관 아래 최씨 대장간일 가능성이 크다. 두 번째도 한국인이었다. 그다음 3~5번째는 일본인들이 차지했다.

백범의 탈옥을 가능케 한 삼릉창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나라 각종 유물을 다루는 육군박물관에 문의하고, 관람하려 했으나 삼릉창의 실물이 없다고 했다. 이름대로 한다면, 모서리가 셋인 창이다. 1813년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간행한 군사기술에 관해 책 『융원필비(戎垣必備)』에 삼릉창의 모습이 보이기는 한다. 

『조선의 무기와 갑옷』(민승기 지음, 가람기획)이라는 책에 삼릉창을 비롯한 여덟 가지 창의 생김새를 보여주는 『융원필비』의 그림이 실려 있다. 이를 통해 삼릉창의 겉모습을 대강 짐작할 수는 있다.

창이란 무기가 단순한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창을 구분하는 이름부터가 여럿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모순(矛盾)이라는 말의 모(矛)는 세모진 창을 얘기한다. 극(戟)은 끝이 가라진 창을 일컫는다. 여기에 갈고리 모양의 과(戈)도 있고, 우리가 보통 쓰는 창(槍)이란 말도 있다. 

구(厹)라는 글자 역시 모(矛)처럼 세모 창을 가리킨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소설 <호질(虎叱)>에서 범이 북곽 선생을 꾸짖을 때 거명한 것처럼 쥘 창, 날 없는 창, 한 길 여덟 자 창, 뾰족 창 등 창을 나타내는 말은 참으로 많다.

백범의 '삼릉창'을 재현한 송종화 장인
 

1969년에 세워진 남산의 백범 동상은 조각가 김경승이 제작했다. 작품성 여부를 떠나, 대표적 항일투사를 기리는 동상을 대표적 친일 작가가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2023년 4월 21일. ⓒ 정진오

 

현장체험학습을 나온 아이들이 남산 백범광장에서 뛰어놀고 있다. 2023년 4월 21일. ⓒ 정진오


조선 초기 정도전(1342~1398)은 태조에게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어 바쳤는데, 정도전은 이 책 <병기(兵器)> 항목에서 '우리나라에서는 군기감(軍器監)을 설치하여 활, 칼, 갈래 진 창, 세모진 창, 갑옷, 투구, 화약 등을 만들고, 깃발, 북, 징 따위도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고 했다. 여기 나오는 갈래 진 창은 과(戈), 세모진 창은 모(矛)라고 썼다.

세모 창을 일컫는 구와 모를 하나로 묶어서 쓰기도 했는데 그 표현이 동양의 최고(最古) 시집 『시경(詩經)』에 나온다. 『시경』 <소융(小戎)> 편에 '구모옥대(厹矛鋈鐓)'란 구절이 있다. 고전 연구자 신동준은 이를 '세모 창은 흰 쇠 물미를 대네'로 해석했다. 

구와 모를 한 단어로 본 거다. 『시경』에 실린 걸 보면, 그 옛날 중국에서는 군인들이 손에 쥐고 어깨에 받혀 세우고 행진하는 세모난 창을 일반적으로 구모(厹矛)라 칭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무비지(武備志)』에 실린 무기들을 그대로 소개한 『융원필비』에 구모란 명칭이 따로 없는 것을 보면 삼릉창은 오래 전부터 군인들이 쓰던 구모창과 그 모양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백범의 부친에게서 삼릉창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받고 그 창을 만든 인천의 대장장이가 무엇을 표본으로 해서 만들었는지도 궁금하다. 백범의 말만 듣고서 부친과 대장장이가 그 생김새를 대번에 알 수 있었다면 당시까지만 해도 삼릉창이란 말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얘기다. 백범이 주문했던 '한 자 길이 삼릉창'을 요즘 대장간에서는 만들 수 없는 걸까. 

인천 중구 도원동 인일철공소 최고령 대장장이 송종화 장인에게 『융원필비』 속의 삼릉창 그림을 보이면서 제작을 부탁했다. 송종화 장인은 삼릉창이란 말을 처음 듣는다고 했다. 백범이 삼릉창을 사용했던 방식처럼 벽돌을 들추고, 땅을 파낼 수 있어야 하며, 세모진 창이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며칠 뒤 송종화 장인은 길쭉하면서도 세모난 창을 만들어 보여주었다.

올해 2023년은 백범이 인천 감옥을 탈옥한 지 125년, 총격 테러로 세상을 뜬 지 74년이 된다. 여전히 그는 국민적 영웅임에 틀림이 없다. 서울이나 인천에도 백범을 기리는 장소가 여러 곳이다. 서울 남산에 그의 동상이 있는 백범광장이 있다. 

'의미심장한 역사지대' 인천에는 백범과 모친 곽낙원(1859~1939) 여사의 동상이 남동구 인천대공원과 중구 옛 감리서 부근에 각각 세워져 있다. 지난 4월 21일, 백범 동상을 찾아서 서울 남산과 인천대공원, 옛 인천감리서 일대를 둘러보았다.

이날 오후 2시가 지나자 조용하던 남산 백범광장 잔디밭은 어린 학생들의 차지가 되었다. 나들이 나온 어른들은 햇빛을 피해 나무 밑으로 웅크렸지만, 아이들은 햇빛을 개의치 않고 잔디밭을 뛰어다녔다. 서울 상천초교 4학년 학생들이 백범광장으로 현장체험학습을 나온 거였다. 아이들은 백범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고 그저 친구들과 노는 데에만 열중했다.

남산의 백범 동상은 1969년에 세웠다. 그런데 작가가 대표적 친일 조각가로 꼽히는 김경승(1915~1992)이다. 백범이 서거했을 때 신문 기사에 따르면, 백범은 평소 상사(喪事) 시에도 영전에 바치는 화환이 왜색(倭色)이라 싫어했던 까닭에 그의 빈소에는 화환이 아니라 생화 화분만 받았다고 한다. 그런 그의 동상 제작을 친일 조각가가 맡았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우리 현대사는 이처럼 굴곡지고 배배 꼬여 있다.

인천에 세워진 백범과 어머니의 동상
 

인천대공원 백범광장에 나란히 선 백범과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동상. 한 등산객이 하산 중에 백범 동상에 참배한 뒤 모친의 동상에도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있다. 2023년 4월 21일. ⓒ 정진오

 

곽낙원 여사의 동상은 짚신 신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백범과 함께 갇혀 있던 수감자들이 짚신을 삼아 끼니를 해결했다고 한다. 저 앞쪽으로 아들 백범의 동상이 보인다. 기단 오른쪽 아래에 '1949. 8'이라는 제작 연월을 나타내는 숫자와 한자로 '朴'이라 쓰고 동그라미를 그린 박승구(朴勝龜) 조각가의 사인이 표시돼 있다. 2023년 4월 21일. ⓒ 정진오


인천대공원의 백범광장은 무척 특별한 공간이다. 백범의 모친 곽낙원 여사의 동상이 아들 동상과 나란히 서 있기 때문이다. 곽낙원 여사 동상은 백범 타계 직후인 1949년 8월에 완성되었다. 백범이 숨을 거두었을 때 데스마스크를 뜬 조각가 박승구(1919~1995)의 작품이다. 

백범은 피격 직전까지도 어머니 동상 제작 과정을 세밀히 감독해 왔다. 얼굴이며, 체형이며, 복장이며, 심지어 신고 있는 짚신의 모양새까지 백범이 이야기한 대로였다. 백범은 어머니 동상이 자신을 옥바라지할 때의 그 모습과 똑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범은 그토록 바라던 어머니 동상의 완성된 모습을 미처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조선일보>는 1949년 7월 5일에 거행된 백범 장례식 하루 뒤인 6일의 경교장 안팎의 애절한 모습까지도 보도했다. 그 기사에 백범 모친 동상 얘기도 있다.

'혼란과 비통 속에서 아무의 시선도 끌지 못했던 미완성 석고상(石膏像)이 쓸쓸한 방안에서 전에 없이 눈에 뜨이고 있으니, 이것은 선생의 자당의 입상(立像)으로 효성이 지극한 선생은 이것의 완성을 하루 같이 기대하셨다는데, 앞으로 일주일 이내면 완성하리라는 것을 보시지도 못한 채 흰 보에 쌓여 형언하기 어려운 비수에 쌓인 어머니의 상을 남겨두고 돌아가신 것이라고 한다.'

기자가 보았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인천대공원에 선 곽낙원 여사 동상은 짚신을 신고 있다. 짚신 신은 아주 특별한 어머니 동상은 『백범일지』와 연결해 바라보아야 한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백범이 인천 감옥에 갇혀 있을 당시에는 수감자들에게 감옥 측에서 식사를 때에 맞추어 제공하는 게 아니었다. 

수감자들이 감옥 안에서 짚신을 삼으면 간수들이 인솔하고 길거리에 나가서 짚신을 팔아다가 죽을 쑤어 먹든지 하는 식이었다고 백범은 밝혔다. 수감자들이 짚신을 삼아 자신의 먹거리를 스스로 해결하는 구조였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감방마다 짚신 삼는 도구들을 갖춰 놓고 있었다. 백범의 교수형이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감방 동료들이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신골방망이로 차꼬 등을 두들기며 온갖 노래를 다 불렀다'고 백범은 회상했다. 이 신골방망이는 짚신을 만들 때 모양을 잡기 위해 두드리는 도구이다.

곽낙원 여사는 아들이 갇힌 감옥 가까이에서 식모살이를 하면서 옥바라지를 했다. 그러니 곽낙원 여사가 신은 짚신은 그 감옥의 수감자들이 삼은 것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어머니는 백범이나 그 동료들이 만든 짚신을 사서 신으며 아들을 또 생각했을 게 뻔하다.

백범이 옥살이했던, 수감자들이 짚신을 팔았던 감리서 부근에도 몇 년 전 인천 중구청이 나서서 백범과 모친의 조각상을 세웠다. 신포시장 입구 로터리에 백범 동상이, 감옥 터에서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백범과 어머니 조각상이 각각 서 있다. 이 동상들은 높다란 기단 위에 세운 게 아니라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친근감 있게 제작했다는 특징이 있다.
 

2023년 2월 27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외벽에 컬러로 복원된 김구 선생의 사진이 테스트 송출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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