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09 11:45최종 업데이트 23.05.09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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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방송에서 아나운서가 건설노동자를 지칭하며 "힘든 노동일을 하시는"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갸우뚱한 적이 있다. '자기가 지금 방송을 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라고 중얼거리면서.

아마 그 아나운서는 흔히 말하는 '노가다'를 순화해 표현한 것이겠다. 건설노동자를 노가다라고 칭하며 멸시하고 괄시하는 우리 사회의 편견을 속상해 하는 선량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선한 마음에서 오히려 더 큰 편견을 발견한 듯 느낀 것은 다만 내 비뚤어진 마음 때문일까.


과거 학교에서 써오라던 '가정환경조사서' (돌이켜보니 정말 야만과 차별의 시대였다. 가정환경조사서엔 부모의 학력이나 직업, 소득수준을 낱낱이 적게 했다)에 부모의 직업을 '노가다'라고 차마 적지 못해 고민하는 어린이가 그 시절을 표현하는 드라마에 숱하게 나온다. '건설노동'이란 우리 사회에서 그런 의미(였)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남자', 거칠고 무식해 몸을 쓰는 것밖에는 돈을 벌 방법이 없는 사람, 늘 술에 취해 있거나 담배만 뻑뻑 피우는 아저씨.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    

여전히 인터넷에선 "정 힘들면 노가다라도 뛰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본다. 주로 삶의 고단함을 토로하며 사회의 불공정을 개탄하는 사람들에게 이죽거리는 말이다. "정 힘들면 공무원이나 하라"든가 "정 힘들면 삼성전자나 들어가든가"라고는 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그보다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는 건설노동을 누구나 할 수 있고, 잠시 하는 일이고, 별것 아닌 일이며, 나는 하지 않을 일이고, 뜨내기의 일이라고 취급하고 있다.

앞서 아나운서가 노가다를 '힘든 노동일'이라고 표현했지만 정작 우리 사회는 건설노동을 꾸준히 일하면서 삶의 계획을 세울 수 있고, 자부심을 갖고 일하며, 힘들게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 있는 '노동'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노가다'를 천시하고 괄시한다. 건설노동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그런 의미다.

그저 노동자라고 말하고 있을 뿐
  

노조 탄압에 항의해 분신 사망한 민주노총 건설노조 고 양회동 강원지부 지대장의 빈소가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가운데 4일 오후 건설노조원들이 조문하고 있다. ⓒ 권우성

지난 5월 1일, 노동절 아침에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 앞에서 한 중년의 '노가다'가 몸에 불을 붙였다. 그는 강요와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상태였고 노동절은 그의 영장실질심사가 진행되는 날이었다. "자랑스러운 민주노총 건설노조 조합원"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던 그는 그 치졸하기 그지없는 혐의가 수치스러웠다. 그는 자신을 "자랑스러운 민주노총 강원건설지부 제3지대장"이라고 소개하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그는 도대체 건설노조의 무엇이 그렇게 자랑스러웠을까. 대통령과 장관이 나서서 건설노조는 조폭이라고 다 잡아 가두겠다고 연일 떠들어대는데, 그 말을 고스란히 받아적은 기사의 댓글 창엔 '민노총 빨갱이 건폭들이 건설 현장의 암덩어리'라는 댓글이 달리는데, 그런 기사와 댓글을 보고난 사람들은 건설노조가 현장을 협박해서 채용을 강요하고, 노조 간부는 돈을 빼돌리고, 툭하면 집회하고 시위하며 동네 분위기를 흐리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는데, 그는 치졸한 혐의의 수치를 견디지 못할 만큼 건설노조가 자부심 있고 자랑스러웠을까.

유구한 '노가다'의 역사에도 민주노총 전국건설노동조합은 이제 설립 16주년에 불과하다. 한국이 급격히 경제 성장을 이루며 개발붐이 불던 1980년대 후반부터 건설노동자가 급격히 늘었지만 말했듯 건설노동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는 '못 배운 뜨내기들의 일'이었다.

현장에서 돈을 떼어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공기를 단축하기 위해 무리한 작업지시가 이어졌다. 건물의 안전도, 건물을 짓는 노동자의 안전도 무시됐다. 빨리빨리 대충하라는 '오야'의 지시를 거부한 '노가다'들은 다음날부터 현장에 출근하지 못했다. 위험한 일을 거부한 '노가다'도 마찬가지였다. 퇴직금이나 실업급여 같은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일용직 노가다에게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지금 정부나 언론이 말하는 것처럼 건설현장은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지대였다.

그것은 민주노총 건설노조가 만든 것이 아니라, 그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지대가 민주노총 건설노조를 만들었다. 그들은 '노가다가 아니라 건설노동자'라는 단 한마디를 위해 투쟁했다. 사실 '투쟁'이나 '요구안'같은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법이 금지하는 불법하도급 관행을 없애자고 했을 뿐이었다. 건설현장에서 안전하게 일하며 튼튼한 건물을 지을 수 있기를 원했을 뿐이고, 다단계 하청구조에서 줄줄 새는 임금을 제대로 받고자 했을 뿐이다. 그들은 그저 '노동자'로서 '노조'를 하는 당연함을 원했을 뿐이다.

실제로 건설노조가 설립된 이후 현장의 처우는 많이 개선됐다. 건설노동자들도 다른 노동자들처럼 퇴직금이 생겼고,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 됐다. 노조와 사용자가 단체협상을 체결하며 불법 하도급 관행도 어느 정도 개선됐다. 노동조건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안전 문제도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적어도 이제 '뜨내기 일용직 노가다'가 아니라 7만 명이 넘는 조합원이 있는 노동조합에 속한 '건설 노동자'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응어리진 건설노동자들에 대한 멸시와 괄시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건설노조는 그 어떤 노조도 해내지 못한 것, 법과 제도를 넘어 '노동에 대한 인식'을 바꿔나가는 곳이었다. 그가 "자랑스러운 민주노총 건설노조의 조합원"이라고 말할 법한 조직.

오해와 빈틈에 심어놓은 '혐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8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열린 건설 현장 불법행위 관련 현장 방문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3.2.8 ⓒ 연합뉴스

 
건설노조는 우리 사회가 '애초부터 상정하지 않았던 노동'을 노동의 권리로 만들어 왔다. 그러다 보니 균열과 오해가 발생한다. 애초부터 '노가다'를 위한 '노동관계법' 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오해와 빈틈에 '그들'은 '혐오'를 심기 시작했다. 일부러 심은 오해.

정부와 일부 언론은 타워크레인 기사들이 '월례비'라는 것을 요구하며 건설업체들을 협박한다고 했다. 그러나 월례비의 의미를 들여다보면 사실과 다르다. 월례비라는 이름으로 퉁쳐지지만 그 안에는 3가지 성격이 있다.

하나는 타워크레인 임대사(타워크레인은 자재를 옮겨 현장에 부리는 설비로 건설현장 업무를 시작하는 장비다.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장비로 인식된다. 건설사는 대부분 타워크레인을 소유하지 않고 있으며 타워크레인 임대사에서 장비를 임대해 사용한다. 타워크레인 기사는 이 임대사에 고용되지만 실질 사용자는 건설사 원청이다)가 기사에게 지불하는 연장수당의 성격이다.

건설사는 타워크레인 기사와 근로계약을 맺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장비 임대료 외에 연장근로에 대한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현장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타워크레인의 연장근로에 대한 수당을 월례비란 이름으로 임대사가 지급하는 것이다.

다음은 일종의 '급행료' 성격이다. 한 현장에도 작업 과정에 따라 수많은 하도급 회사가 들어온다. 말했듯 타워크레인은 '공정의 시작'이기 때문에 타워크레인의 작업 순서는 그대로 각 업체 공정의 업무 순서가 된다. 업체들 간엔 신경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고, 자연히 '우리 자재를 먼저 옮겨줘'라며 일종의 급행료가 타워크레인의 뒷주머니로 들어간다. 이 급행료 성격의 월례비는 타워크레인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과거엔 타워크레인 기사의 임금을 이 급행료로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할 만큼.

건설노조는 이 월례비를 받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직접 고용과 정당한 임금 지급을 요구하는 건설노조로선 이 월례비 수취 관행이 오히려 노조 활동에 장해가 되기 때문이다. 건설노조는 월례비를 지급하는 단체들인 건설업체들과 대한건설협회, 대한전문건설협회 등에 "조합원 중에 이 원칙을 지키지 않고 월례비를 요구하거나 받으면 고발할 것"을 지속해 요청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 업체들 중 월례비 지급을 고발한 업체는 없다. 즉, 월례비는 (불법) 하도급이 만연하는 현재의 현장에선 '주는 쪽'이 더 유지하고 싶은 관행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론 규정에 위배되는 공정을 요구하며 기사에게 지급되는 '뒷돈'의 성격이다. 공기를 단축하기 위해 건설사들은 종종 안전 규정을 위반하는데 이때 협조를 요구하며 타워크레인 기사들에게 월례비를 지급한다. 민주노총 건설노조는 마찬가지로 이 같은 월례비 수취를 금지하고 있다. 애초에 건설노조의 탄생 이유가 위험하고 안전하지 않은 업무에 대한 지시를 거부하는 것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민주노총 건설노조의 방침은 현장에서 민주노총 건설노조를 고용하지 않으려 하는 주요한 이유다. "쟤들은 뭔데 저렇게 말이 많아".

결국 월례비라는 명목으로 건설노조가 뒷돈을 요구한다는 '소문'은 사실과는 완전히 반대에 있다. 오히려 월례비라는 불법 관행은 안전을 도외시하고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일부 건설사의 옹호를 받는 악습이다. 이는 결국 원청의 관리책임 회피, 직접고용 회피가 만들어 낸 괴물 같은 관행에 가깝다. 이 구조가 계속되는 한 월례비는 이름만 바꿔 존재할 것이다.

건설노조 조합원만 고용하라고 강요한다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다. 건설업은 고용이 상시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않고 현장마다 하청업체를 통해 인력을 고용하는 일시적 간접 고용으로 이뤄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노동력 공급에 대한 계약이 아닌 공정 전체를 떠넘기는 도급계약이다. 이는 건설산업기본법이 금지하는 불법 도급이지만 여전히 건설현장의 관행으로 남아있다.

건설노조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건설사와 조합원으로 이뤄진 시공팀 단위의 직접고용구조를 만들어 왔다. 다시 말해, 지금 정부와 일부 언론이 주장하는 채용 강요는 일용직 노동조합이 사용자를 상대로 고용을 요구하는 일상적인 과정이다. 이를 '강요'라고 주장하는 것은 현행 노동관계법의 한계다. 노동관계법은 이미 고용된 노동자, 상시적으로 일관된 사업장에 고용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건설 노동자들의 고용안정 요구를 법적인 언어로 구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건설업종에서의 노동조합 활동, 건설노동자의 노동환경에 대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정교하게 마련하는 것이어야 한다. 법과 제도가 외면해 와서 발생한 빈틈으로 '의도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건설노조가 받고 있는 많은 오해들 중 단 두 가지를 설명하는데도 이렇게 많은 말이 필요했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도, 이 글을 읽는 것만으로 건설노조에 대한 오해가 풀릴 수 있으리라 기대하진 않는다. 건설노조를 향한 공격은 전방위적으로 꾸준히 이뤄져 왔고, 법과 제도에 의한 것이든, 사회적 인식에 기인한 것이든 그 오해는 한 두 줄짜리 문장으로 풀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졸고를 읽는 독자들에게 거듭거듭 부탁하고 싶은 것은 오직 하나다. 건설노동자는 '노가다'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그토록 갖고 싶어 하는 '건물', 우리가 지금 이 글을 읽는다고 앉아 있는 그 건물, 눈만 돌리면 보이는 세상의 모든 건축물을 직접 짓는 엄연한 '노동자'라는 것을 기억하는 일. 그리고 노동자라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노동조합, 건설노동자들이 만든 민주노총 건설노조는 오랫동안 '노가다'로 불리던 건설 노동자들의 삶을 그래서 우리 사회가 노동이라고 부르는 것의 의미를 더욱 확장시켜 온 곳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일.

생각해 볼 일이다. 건설노조에 대한 의도된 오해에 속아 넘어간 우리는, 정말 '노가다가 무슨 노조야'라고 생각한 적이 없을까. 은연중에 노동의 가치를 폄훼하거나 차별한 적은 없을까. 그 차별과 편견과 오해를 버무려 건설노동자에게, 건설노조에 대한 혐오로 뒤집어씌운 적은 없을까. 만약 그렇다면 건설노조에 대한 의도적인 오해는, 그리하여 노조를 향한 이 치졸한 공격에 박수를 보내는 사회의 천박함은 우리가 만든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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