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07 10:23최종 업데이트 23.05.07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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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당시 최장수 대법원장을 역임한 민복기(왼쪽) ⓒ 자료사진


'유신 독재'하면 단연 박정희이지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1968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대법원장을 지낸 민복기가 바로 그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서울 삼청동 안가에서 당·정 연석회의를 열고 3선 개헌 각본을 설계한 때가 1968년 12월이고, 3선 개헌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한 날이 1969년 10월 17일이다. 이에 힘입어 1963년·1967년에 이어 1971년 대선에까지 출마한 박정희가 종신집권으로 가는 유신체제를 완성한 것이 1972년 하반기다. 이 체제가 종말을 맞은 게 1979년 10월이다.


민복기가 10년 2개월간 대법원장을 지낸 기간은 3선 개헌 및 유신체제 시절과 거의 일치한다. 국민적 저항을 무시하고 굴욕적인 1965년 한일협정을 강행한 박정희가 독재자로 변신하던 시기부터 민복기가 그 옆에 있었던 것이다.

민복기가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박 정권은 사법부를 시종이나 시녀처럼 다뤘다. 1971년에는 시국사건 피고인에게 무죄판결을 내린 재판부에 대해 검찰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는 무죄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로 해석됐고, 전국 판사 153명이 사표를 제출했다(사법파동). 당황한 박정희는 뇌물수수 사건에 대한 수사 중지를 지시했다.

1975년에 민복기는 대표적 공안조작 사건인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의 상고심 재판장을 맡았다. 민복기는 사형을 선고했고, 불과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됐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그런 암흑의 시대에, 행정부에는 박정희가 있었고 사법부에는 민복기가 있었다. 박 정권이 아무리 막강하다 해도, 아무렇게나 사람을 가두고 죽이면 민심이 당장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정권이 잡아들인 무고한 국민들에게 유죄를 선고해주는 사법부가 있었기에 그런 폭발이 어느 정도 제어됐다. 민복기의 역할은 박정희의 민주주의 탄압을 합법적인 일로 포장해주는 것이었다.

민복기는 10년간의 대법원장 재직 외에도 특기할 만한 기록을 세웠다. 이승만 정권 때인 1955년 9월부터 10개월간 검찰총장이었고, 박정희 때인 1963년 4월부터 3년 5개월간 법무부 장관이었다. 대법원·법무부·검찰청 수장을 두루 역임한 대표적 법조인이 박정희 독재와 깊이 연루됐던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을 사법적으로 탄압

독재정권에 가세해 운동권을 탄압하는 민복기의 모습은 이미 일제강점기 때부터 훈련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국권침탈 3년 뒤인 1913년 12월 22일 친일파 민병석의 아들로 태어나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24세 때인 1937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그는 독립운동가들을 사법적으로 탄압하는 일에 가세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민복기 편은 "1939년 12월 경성지방법원 예비판사(고등관 7등)에 임명되어 항일독립운동과 관련한 각종 재판에 참여했다"라며 "같은 해 12월 19일,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된 이초생의 재판에, 같은 달 28일에는 강원도 춘천에서 비밀결사 상록회를 조직하고 독서회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된 남궁태·이찬우·문세현 등의 재판에 판사로 참여했다"고 설명한다.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5권은 이초생으로도 불린 독립투사 이재상(1909~1982)에 관해 "1930년 상해로 건너갔으며, 1935년 12월에 문일민의 권유를 받고 혁명적인 방법에 의해 조선 독립을 쟁취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라고 서술한다.

그러면서 "1938년에는 중국 한구(漢口)에서 일본군에 밀려 중경으로 후퇴하는 도중, 사천성에서 조선민족혁명당원 60여 명과 함께 3·1절 기념사를 거행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안창호의 유지를 계승하여 분투를 역설하는 등 독립정신 계몽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고 평가한다.

1938년 10월 난징(남경)에서 체포돼 이듬해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은 이재상은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의 핵심 죄목은 난징에 침투해 공작 활동을 벌인 것과 더불어 1938년 제19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한 것 등이었다. 판결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후 한구로부터 다시 사천성 중경으로 돌아오는 도중, 소화 13년 3월 1일 사천성 석보새에서 혁명당 주최하에 거행된 조선독립만세 소요 20주년(19주년의 오기) 3·1기념식에 참가하여 당원 60여 명과 함께 대한국 애국가(우리 조선국 만세 운운)을 합창하였고 조선독립만세를 제창하였으며, 기타 민족의식 앙양을 위한 행위를 하고"

춘천 상록회 사건
 

춘천 상록회 판결문에 기입된 '조선총독부 판사' 민복기(경성지방법원 판사)의 서명. ⓒ 국가기록원


민복기가 담당한 또 다른 사안인 춘천 상록회 사건은 중학교급인 춘천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 학습을 하다가 적발된 공안사건이었다. 중앙 조직뿐 아니라 학년별 조직까지 갖추고 1년 반이나 활동하던 비밀 결사를 찾아낸 대형 사건이었다.

핵심 조직원 중에는 일제 순사 아들도 있었다.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 "피고인 문세현은 강원도 순사 문재운의 장남으로 출생하여"라는 대목이 있다. 독립운동권 아들을 둔 일제 순사 문재운이 얼마나 당혹해했을지 짐작된다.

상록회 회원들은 '문제 서적'들을 탐독했다. <하얼빈역 앞의 총성> <단종애사> 등이 그런 책들이다. 단종 임금에 관한 서적이 문제가 된 이유 중 하나는 사육신의 충성심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 학생들이 사육신 정신으로 무장할 가능성을 일제 당국이 우려했던 듯하다. 이런 대목이 판결문에 있다.

"<단종애사>의 독후감으로 단종의 육충신의 용기와 열의는 우리들 회원이 배워야 하며 한번 결정한 목적은 어떤 곤란에 부닥치더라도 단호히 이것을 실행해야 한다는 취지를 강조하고"

상록회 회원들은 여기저기서 모임을 가졌다. 냇가에서도 갖고, 산 정상에서도 가졌다. 판결문에는 이들이 봉의산과 우두산 등에서 회합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들은 그런 장소에 모여 민족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상록회의 제5회 월례회 광경이 판결문에 이렇게 묘사돼 있다.

"피고인 남궁태는 '눈물'이란 제목으로 '조선의 현 상황은 일본의 압제하에 자멸에 빠져 있다. 이에 이러한 압제자와 항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고, 피고인 용환각은 '죽음'이란 제목으로 '회원은 죽어서 후세에 그 이름이 남도록 조선독립운동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몸은 죽더라도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름만큼은 후세에 남기자고 역설했다. 가슴 짠한 이 웅변을 문서에 기록해 이들의 이름을 후세에 남겨준 것이 '조선총독부 판사' 민복기를 비롯한 경성지방법원 재판부였다.

재판부는 남궁태·이찬우·문세현·용환각·백흥기·조규석·배근석·조흥환·이연호·신기철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하고, 전홍기·차주환에게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1943년에 체포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된 윤동주보다 많은 형량이 상록회 주역들에게 선고됐다.

민복기가 누워 있는 국립대전현충원

사법적 방법으로 독립운동권을 탄압하고 히로히토 정권을 옹호한 친일파 민복기는 1938년부터 7년간 일본의 밥을 먹고 살았다. 경성지방법원 사법관시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지방검찰청) 사법관시보 및 검사대리, 경성지방법원 예비판사 및 판사로 근무하면서 히로히토 일왕(천황)의 녹봉을 받았다. 일본의 군국주의 침략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에 일본을 도와주고 친일재산을 축적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주인의 패망'은 큰 기회가 됐다. 일본인 상관들이 쫓겨난 덕에 그와 그의 한국인 동료들은 사실상 무주공산이 된 법원과 검찰에서 승승장구하게 됐다.

미 군정하에서 경성지방재판소 부장판사가 된 그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군정청 법률심의국장이 되고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11월 법무부 검찰국장으로 옮겨갔다. 1950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관이 되고, 한국전쟁 중인 1951년 법무부 차관이 되고, 1955년 42세 나이로 검찰총장에 올랐다.

이승만이 쫓겨난 1960년에 그는 47세였다. 그 뒤 그는 박정희의 신임을 받아 법무부 장관과 대법원장까지 역임했다. 박정희가 피살된 1979년에 그의 나이는 66세였다. 그 후 그는 전두환 정권하에서 국정자문위원을 역임했고, 2007년 7월 13일 94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 민복기는 피고인들과 함께 누워 있다. 그가 누워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에는 독립운동가 이재상·이찬우 등도 모셔져 있다. 민복기는 이재상·이찬우 등을 유죄로 선고했다. 이재상·이찬우 역시 친일파들을 그렇게 규정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은 양쪽 다 국립묘지에 안장해 놓았다. 어느 한쪽을 파묘하지 않으면 이 모순이 해소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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