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04 20:36최종 업데이트 23.05.0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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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왼쪽)와 율곡(오른쪽). ⓒ 자료사진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 두 명을 꼽으라면 누가 뽑힐까. 아마도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이 아닐까 싶다. 이들 둘을 흔히 '퇴율(退栗)'이라고 묶어서 칭하기도 한다.

퇴계 이황(1501~1570)과 율곡 이이(1536~1584)는 이발(理發)이니 기발(氣發)이니 사단(四端)이니 칠정(七情)이니 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도 어려운 개념을 풀이하고, 그를 통해 우주의 이치를 논하는 성리학이라는 무척이나 어려운 철학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을 늘 가까이 두고 있다.


요즘이야 현금을 지니고 다니는 이들이 많지 않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누구나 지폐 한두 장쯤은 갖고 있게 마련이다. 집집마다 있는 그 지폐 도안에 퇴계와 율곡이 새겨져 있다. 천 원짜리에는 퇴계가, 오천 원짜리에는 율곡이 각각 그려져 있다. 여기에 만 원권과 오만 원권을 더해 우리나라에서 쓰는 지폐가 네 가지인데 모두 역사적으로 뛰어난 인물을 도안에 넣었다. 

만 원권은 세종대왕(1397~1450), 오만 원권은 신사임당(1504~1551)이다. 지폐에 얼굴이 실린 넷 중에 둘이 사상가이다. 전 세계에서 사상가를 지폐의 인물로 삼은 나라는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마하트마 간디를 사상가로 친다면 인도 정도가 있을 뿐이다.

퇴계도, 율곡도 대장간과 관련이 깊다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율곡 유적지 정문으로 관람객이 들어가고 있다. 2023년 4월 14일. ⓒ 정진오

 

소수서원 경렴정(景濂亭). 앞면 해서체가 퇴계의 글씨이다. 경렴(景濂)은 북송시대 철학자 주돈이(1017~1073)를 마음을 다해 사모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경렴정은 소수서원 입구 오른쪽, 풍광 좋기로 소문난 죽계(竹溪)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2023년 4월 6일. ⓒ 정진오


'퇴율'은 이토록 우리 국민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퇴계도, 율곡도 대장간과 관련이 깊다. 우리나라 사상계의 거목 퇴계와 율곡이 무슨 대장간과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싶을 테지만 퇴계는 대장장이를 제자로 맞아들여 키웠고, 율곡은 대장간을 운영해 살림을 꾸렸다. 둘 다 엄청난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소수서원과 부석사 같은 세계문화유산을 둘이나 품고 있는 경북 영주에는 배점(裵店)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 '배순(裵純)'이라는 대장장이가 살던 동네이다. 배순의 대장간(가게)이 있었다 하여 배점이라고 했다고 한다. 대장장이 배순이 퇴계의 제자였다는 내용이 퇴계와 그의 학맥을 잇는 문인들의 기록인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있다.

배순이 대장장이였는데 그의 집이 소수서원 부근이어서 퇴계 선생이 서원에 와서 강학할 때마다 참석하여 뜰 아래에서 절하고 꿇어앉아 강의를 들었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심상(心喪, 상복을 입지는 않아도 상제와 같은 마음으로 근신함)을 행하였으며, 나라의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얘기다.

<퇴계선생연보보유(退溪先生年譜補遺)>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렸다. 배순이란 사람이 대장장이였다. 선생이 풍기군수일 때 백운동서원(소수서원)에 여러 번 오갔는데 배순은 그때마다 뜰 아래에서 뵈었다. 존앙하는 마음이 얼굴에 가득하니 선생이 칭찬해주고 인도해주셨다. 선생이 군수를 그만두고 귀향하자 철상(鐵像)을 만들어 모셨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삼 년 상을 입고 제사 지냈다는 얘기다.

배순의 인간적 면모와 그가 행한 퇴계 사후 3년상, 선조 임금 승하 때 3년상 이야기 등은 소수박물관이 23번째 학술총서로 국역한 『단곡선생문집(丹谷先生文集)』을 통해서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여기에 배순의 전기인 <배순전(裵純傳)>이 실렸다. 단곡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싸운 곽진(1568~1633)의 아호이다.

대장장이 배순, 퇴계와 깊은 인연
 

배순 정려각에는 대장간을 하던 배순의 정려비가 있다. 광해군 7년(1615)에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인조 27년(1649)에 비를 세웠다. 정려비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9호로 지정되어 있다. 2023년 4월 6일. ⓒ 정진오

 

배점마을 산자락에 있는 배순의 묘소. 2011년에 경주 배씨 영주종친회에서 비를 크게 세우는 등 묘소를 새롭게 단장했다. 2023년 4월 6일. ⓒ 정진오


퇴계가 실제로 대장장이를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였는가에 대해서는 일부 이론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퇴계의 연보나 제자들의 기록에 나와 있는 것처럼 배순이 퇴계와 깊은 관계였음은 사실로 보인다. 시골의 대장장이가 퇴계로부터 직접 학문을 배우지 않고서 선생의 철상을 만들어 모신다든지, 임금이 승하했을 때 3년상을 지낸다든지 하는 일이 가능했겠는가 싶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 배점리. 배점마을 주민들은 아직도 해마다 배순을 위해 마을 제사를 지낸다. 동네 사람들은 배순을 '배충신'이라고 부른다. 배점마을에는 '충신 백성(忠臣 百姓)' 배순의 정려비가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9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내문에는 '스승인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철상(鐵像)을 만들어 스승을 기리며 3년상을 치르는 등 제자의 예를 다하였다. 선조의 국상 때에는 70세가 넘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3년상을 치렀다고 한다'고 쓰여 있다.

지난 4월 6일 찾아간 배순의 정려각에는 새끼줄이 빙 둘러서 묶여 있었다. 앞면 양쪽 붉은 기둥에는 작은 소나무가 세워져 있었다. 지난 음력 정월에 동네 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때 설치했던 것이라고 했다. 부정을 막기 위해 금줄을 치고 소나무를 세우는 것은 마을에서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방식이라고 주민들은 설명했다.

배순을 위한 마을의 공동 제사 책임을 맡은 김희석(78) 할아버지는 "아주 옛날부터 동네에서 공동으로 지내오던 제사인데, 5~6년 전부터는 배씨 집안 종친회와 함께 지내고 있다"고 했다. 김희석 할아버지는 얘기 도중에 걱정거리 한 가지를 털어놓았다. 동네 젊은이들의 인식이 부정적이라는 거다. '제 부모 제사도 안 지내는 판인데, 남의 제사를 언제까지 지내줘야 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걱정했다.

배순 정려비는 원래 배점초등학교 쪽에 있다가 마을 아래 저수지 쪽으로 옮겼다가 다시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고 한다. 마을 위쪽 산자락에 있는 배순의 묘소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어려운 살림에 대장간을 운영했던 율곡
 

율곡 가족 묘역에는 율곡과 그의 부인 묘소가 맨 위쪽에 있다. 부부묘역에서도 부인이 위쪽을 차지했다. 부인 아래에 율곡의 뫼를 썼다. 2023년 4월 14일. ⓒ 정진오

 

율곡 부부 묘비. 총탄 흔적이 선명하다. 깊게 팬 탄흔이 다섯 군데나 나 있다. 2023년 4월 14일. ⓒ 정진오


퇴계가 대장장이 제자를 키웠다면, 율곡은 아예 대장간을 차려 놓고 호미 같은 농기구를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 율곡 이이의 삶과 학문 세계를 다룬 평전들은 대부분 백사(白沙) 이항복(1556~1618)의 <백사집>을 인용해 율곡이 대장간을 경영했던 일화를 빼놓지 않고 있다.

'율곡은 해주(海州)에 살 때 대장간을 차리고 호미를 만들어 팔아서 생활을 하였다.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면 대인(大人)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실행하였다'는 내용이다. 율곡이 은퇴하여 처가인 해주에 머물 때 대장간을 했다는 얘기인데, 당시 율곡은 100여 명의 가족과 함께 살았으므로 생계 압박이 매우 컸다. 어려운 살림을 헤쳐나가기 위해 농기구를 만들어 파는 수공업에 손을 댈 정도로 율곡은 서민적인 삶을 살았다고 평가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청렴하고 검소함은 율곡의 몸에 밴 철학이었다. 그가 세상을 떴을 때 집안에 재산이라고는 남아 있는 게 없어 장례 비용조차 마련하지 못해 친구들이 조달했으며, 가족들이 셋방살이를 하게 되자 율곡의 제자들과 옛 친구들이 조그만 집을 마련해 줄 정도였다고 한다.

율곡의 대장간 이야기는 후세의 양식 있는 선비들에게 커다란 본보기로 전해졌다. <흠영(欽英)>이라는 일기로 유명한 유만주(兪晩柱, 1755~1788)는 1783년 11월 18일자 일기에서 '율곡 이이는 석담(石潭, 황해도 해주)에 거처하며 대장장이 일을 생계 밑천으로 삼았고,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은 향촌에 거처할 적에 벼를 수확하는 일을 살피며 이삭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옛날 현인들은 이런 일을 당연히 여기면서, 그런 일을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겼음에 틀림없다. 그런 일을 하찮고 비루한 것이라 여기며 부끄럽고 천박한 것으로 받아들여 못하겠다고 하지 않은 것'이라고 썼다. 이 내용은 돌베개에서 펴낸 『일기를 쓰다 2 – 흠영 선집』을 통해 한글로 읽을 수 있다.

유만주는 율곡이 대장간을 했다는 이야기를 이항복의 글을 통해 접했거나 전해오는 내용을 들어서 알았을 테다. 그는 일기 속에서, 양반일지라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는 막일이라도 비루하게 여기지 말고 당당하게 해야 한다는 점을 율곡의 예를 표본으로 삼아 스스로 다짐하고 있다.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대장간 이야기가
 

율곡 유적지에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초입의 왼쪽 산자락 아래에 율곡 신도비가 서 있다. 안내판에는 율곡 사후 47년이 지난 1631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혀 놓았다. 백사 이항복이 글을 지었다고 한다. 이 신도비에도 총탄의 흔적이 여기저기 깊다. 2023년 4월 14일. ⓒ 정진오


율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자운서원(紫雲書院)이 경기도 파주에 있다. 지난 4월 14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파주 이이 유적지'에는 인근 율곡중학교 학생들이 현장학습을 나와 있었다. 학생들은 율곡기념관이며 자운서원이며, 율곡이 잠들어 있는 묘역이며 율곡 관련 유적지 곳곳을 둘러보았다. 18세기 선비 유만주가 일기 속에 쓰면서까지 그토록 본받고자 했던 율곡 정신을 21세기 중학생들도 배우고 있었다.

파주의 이이 유적지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눈에 띄었다. 율곡 묘소 앞의 커다란 비와 유적지 입구에서 가운 곳에 세워져 있는 신도비에 깊게 팬 총탄 흔적이 유난히 많은 거였다. 이곳이 한국(6·25)전쟁 때 격전장이었다고 하는데, 전쟁은 가치가 큰 유적이라고 해서 피해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발걸음이 무거웠다.

중국에서는 대장간과 대장장이를 우주만물의 변화 원리에 비유한 인물도 있었다. 김근 노원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은 중국의 옛 명문장 52편을 뽑아 『중국을 만든 문장들』이란 책을 2022년에 펴냈다. 여기에 가의(賈誼, B.C. 200~B.C. 168)의 <복조부(鵩鳥賦>란 작품이 실렸다. <복조부>는 올빼미와의 대화 형식을 빌려 자신의 심정을 묘사한 작품인데, 문학성이 무척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복조부>에서는 대장간의 화로를 천지(天地)에, 대장장이를 자연(自然)에, 숯을 음양(陰陽)에, 구리를 만물(萬物)에 비유했다. '저 하늘과 땅은 대장간의 화로요, 자연은 대장장이이고, 음양은 숯이요 만물은 구리입니다. 기가 모이고 흩어져서 생장하고 소멸하는 일에 어찌 변치 않는 법칙이 있겠소이까?'라는 내용이다. 번역한 김근 이사장은 원문에 '조화(造化)'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자연으로 해석했다. 조화에는 자연이라는 뜻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복조부>의 이 구절은 주역에서 말하는 '역(易)'의 개념을 구리나 쇠를 불에 달구어 새로운 연장으로 변화시키는 대장간 모습에 견주어 설명했다. 이는 '변화(變化)'라고 하는 말에 담긴 속뜻과도 맥이 닿는 부분이다. 대장간과 관련한 역대 비유 중 가장 철학적인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 대장간 이야기가 있다. 동양철학의 최고봉으로 불리는 <주역>에 나오는 '야용(冶容)'을 풀이한 구절을 빌려서, 여성들이 얼굴을 단장하는 것을 대장간의 '야(冶)'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 일부를 보면, '노는 여자가 꾸미기를 좋아하여 분 바르고 연지 찍고 입술에 붉은 칠을 하고 눈썹을 그리기도 해서 얼굴을 곱게 단장하고 몸매를 날씬하게 한 다음, 웃음을 예쁘게 웃고 말도 애교 있게 하면 능히 모모(嫫母)를 변해 서시(西施)로 만들 수도 있고 못난 모습을 바꿔서 잘생긴 것처럼 만들 수도 있는 까닭에 야(冶)라는 것으로 일컫게 되었다'라고 썼다.

여기, 모모는 못생긴 여자의 대명사이고 서시는 예쁜 여자의 별칭이다. 얼굴은 물론이고 체형까지 바꾸는 성형수술이 흔한 요즘 세상에서는 적절한 비유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변화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 대장간이 중요 기재로 쓰인 점은 분명하다.

대장간은 아주 귀한 철학적 공간
 

보물 제1403호인 소수서원 강학당의 내부 모습이다.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던 곳이다. 이곳에서 대장장이 배순도 퇴계한테서 배웠을 것만 같다. 2023년 4월 6일. ⓒ 정진오


대장장이를 일컫는 야(冶)라는 말은 여러 역사적 인물의 아호(雅號)에도 담겨 그 주인공의 철학적 지향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우리가 잘 아는 인물로는 고려말 삼은(三隱) 중의 한 명인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와 항일 독립군 장군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이 있다.

중국에는 야(冶)라는 글자가 들어간 성씨도 있다. 대표적인 게 공야(公冶) 씨다. 공야 씨 중에 유명한 철학자가 있으니 공야장(公冶長)이다. 춘추시대 제나라 사람인 공야장은 공자(孔子, B.C. 551~B.C. 479)의 제자이면서 사위다. 공야장은 새들의 지저귐을 듣고 그 내용을 알아들었다는 신비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공자의 철학이 잘 녹아 있는 『논어』에는 모두 20개 편이 있는데, 그중 5번 째가 공야장 편이다.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숨어 지낸 은자(隱者)들이 먹고살기 위해 한 일 중에는 대장장이 일도 있었다. 이는 조선 말기에 활동한 중인 출신의 문인 이경민(1814~1883)이 펴낸 <희조일사(熙朝軼事)>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에는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었던 기층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을 번역하고 주석을 단 『희조일사, 조선의 역사를 빛낸 범상한 사람들의 비범한 이야기』란 책이 서해문집에서 이태 전에 나왔다.

여기 수록된 85명 중 첫 번째가 시은(市隱) 한순계(韓舜繼)인데, 그가 바로 숨어 살면서 대장장이 일을 했다. 한순계는 선조 임금 때 사람이다. 지극한 효자였는데, 개성에 살면서 어머니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화로와 풀무, 거푸집 등을 갖추고 동기(銅器)를 만들어 팔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장비들을 모두 내다 버린 뒤 시장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동기를 만들어 판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함이었던 거다. 그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이나 율곡 이이 등과도 교유했다고 한다.

그의 죽음에 얽힌 일화가 재미있다. 그는 59세에 세상을 떴는데, 눈을 감기 전에 집안사람들에게 날짜를 알리고는 목욕을 한 뒤 바르게 앉아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붉은 기운이 방 안에 가득했는데 3일 후에나 사라졌다고 한다.

중국의 은자 중에서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이 가장 유명한데, 그 일곱 명의 은자 중 혜강(嵇康, 223~262)이 숨어 사는 대장장이였다고 전해 온다. 죽림칠현의 영수로 불리는 그는 삼국시대의 영웅인 조조(曹操, 155~220)의 손녀와 결혼하였으나,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쇠를 두드리는 대장간 일을 했다고 한다.

화로에 달군 쇠를 불려 새로운 연장을 만드는 대장간 일은 온도 변화에 대단히 민감하다. 달궈진 쇠를 물에 식히는 야끼(やき) 작업도 온도와 강도 변화를 위한 핵심 과정이다. 불(火)과 물(水)이 갖는 오묘한 철학적 가치가 대장간에서 구현된다. 이러한 대장간 일을 유심히 살펴본 사상가들은 대장간이 아주 귀한 철학적 공간임을 알고 있었다.

한자 연구자들에 따르면 '야(冶)'라는 글자는 음식이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대장간에서 바람을 불어넣는 풀무를 일컫기도 하고, 쇠를 불리는 과정을 말하기도 하고, 단련한다는 의미도 있다. 아기 탄생의 모습이라고 해석하는 전문가도 있다. 대장간은 글자부터가 동양철학의 중요 개념 중 하나인 변화(易)를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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