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02 11:56최종 업데이트 23.05.1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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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가 격변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인구 구성이 다양해지고 문화예술의 향기가 풍성해졌는가 하면, 땅과 바다가 환경파괴로 신음한다는 경고음도 들린다. 4·3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는 한편으로는 새 공항 건설을 두고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천혜의 땅 제주도를 살기 좋은 평화의 섬으로 만들기 위해 각자의 분야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제주 사름(람)을 찾아가 그들의 목소리를 전한다[기자말]
그는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로 불린다. 한라산 인문학이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를 만나 대화를 시작하기까지는 한라산에 이처럼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 줄은 몰랐다. 멧돼지와 들개 무리, 뱀과 진드기, 날카로운 가시덤불의 위험을 감수하며 한라산을 혼자 헤맨 사연부터 흥미진진했다.

목축 문화의 흔적인 잣담, 4·3시기 제주 민초들이 숨어들었던 궤와 토벌 작전의 최전선인 4·3군경주둔소와 피난터, 화전민터, 표고밭과 숯가마, 임도 등 한라산 곳곳에 서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내 기록하고 잘못 알려진 지명을 바로잡아나간 그간의 작업이 연구기관도 아니고, 전문연구자도 아닌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한 한 개인의 열정만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니.

병마와 싸우며 기록
 

한상봉 작가가 펴낸 책과 보고서 촌로들의 증언을 채록한 파일 800여 개를 보유한 그는 자신의 조사작업 결과를 단행본과 연구보고서, 학술지 논문 등으로 발표해오고 있다. ⓒ 한상봉

 
남원읍 위미리 출신 제주토박이인 그는 지금까지 제주의 역사, 그중에서도 한라산 구석구석에 숨은 사연을 발굴해오고 있는 인문학 탐험가이자, 촌로들을 찾아다니며 채록한 파일 800여 개를 보유한 역사 기록자이며, 자신의 작업 결과를 단행본과 연구보고서, 학술지 논문 등으로 발표해온 작가이기도 하다.
  
제주 국제대학교 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는 한상봉 작가가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가 한라산을 찾기 시작한 건 2001년부터로 여느 사람들처럼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한라산 정상을 수없이 오르면서 건강을 다졌지만 뜻밖에도 2008년 혈액암이 그를 찾아왔고, 몇 년 전엔 추위 속에 산을 오르다 한쪽 귀가 안 들리는 돌발성 난청까지 찾아왔다. 지금도 15년째 매일 아침 항암제를 복용하며 병마와 싸우고 있다.
  
힘겨운 투병생활을 시작해야 했지만 한라산 오르는 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오히려 더욱 열심히 산을 찾았다. 오름보다 숲길을 더 좋아했다. 숲길을 가다 보면 길이 여러 갈래 나타났다. 숲속에 이어진 돌담이 보이더니 끝없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 깊은 숲속의 돌담은 한남리, 위미리, 물영아리, 천아오름과 돌오름 인근 등 한라산 중산간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이게 뭐지? 여기서부터 의문이 생겼다.

2011년, 한상봉 작가는 무작정 걸을 게 아니라 계획을 세워서 이 숲속의 돌담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출근하지 않는 주말을 이용해 숲속 돌담을 탐험(?)하다 보니 한라산 중턱을 한 바퀴 돌게 되는 것이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잣담(잣성)이라고 했다. 잣담은 한라산에 말을 풀어 방목할 때 말이 한라산 정상부로 올라가거나 중산간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쌓은 돌담으로, 그 위치에 따라 하잣담, 중잣담, 상잣담으로 부른다는 것인데,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한라산 연구가의 길을 걷게 된다.

"한 3년 동안 상잣, 중잣, 하잣을 돌아보기로 작정했어요. 직장인이라 시간 제약도 있고, 또 제주에 비가 자주 오니까 휴무일이라도 산에 가기 힘든 날이 많고 해서 궁리 끝에 비오는 날엔 경로당을 찾아가 어르신을 만나 증언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구술 채록 작업이지요. 어르신들은 잣담만 얘기해주시는 게 아니에요. 상산방목길, 소들이 다닌 길의 지명, 그 길로 나무하러 다니고, 고사리 꺾으러 다니고, 숯 구우러 다닌 일, 먹고 살기 힘들어 산속 표고밭에서 일하게 된 사연 등등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오는 겁니다."
  

제주시 영평동 상잣담 한라산에 방목하던 말을 통제하기 위해 쌓은 돌담 가운데 가장 위에 위치한 게 상잣담이다. ⓒ 한상봉

 
2015년 첫 결과물이 나왔다. 〈제주의 잣성〉이란 책을 펴낸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 책을 펴내고 난 후부터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됐다.

"잣성이란 말이 상장성, 하장성 해서 일본인이 일제 강점기에 농촌 경제실태를 조사하며 쓰던 용어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된 것이지요. 어르신들에 의하면 4·3 때 토벌대가 주민들을 동원해 쌓은 돌담이 마을 성담인데, 사람 키보다 높아 이걸 잣성이라고 하고, 목장에 쌓은 건 그보다 낮아 잣담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나서 책 제목에 잣성이라고 한 게 크게 후회되더라고요. 이 책을 펴내면서 한라산에 관한 인문학적 내용을 다룬 책이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한라산의 식물, 지질을 다룬 저작물은 많지만 거기에 깃든 인문학적 연구서는 도서관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어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한라산 인문학
 

한라산 둘레길 5구간 수악길 풍경 최근 각광받고 있는 한라산 둘레길은 일제강점기 표고밭을 연결했던 임도와 군사용 '하찌마키' 도로를 기초로 조성했다. ⓒ 한상봉

 
잣담에 대해 현장 조사를 하고 채록 작업을 이어가면서 그는 잣담이 단순한 목장사를 넘어 행정사이자 인문학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옛날 남제주군과 북제주군을 가르는 잣담이 있었고, 제주시와 조천읍도 역시 잣담이 가르고 있습니다. 이 경계선의 잣담이 과거 제주 국영목장의 2소장과 3소장을 구분하던 잣담이었어요. 일제가 1914년부터 1916년까지 제주도 토지조사를 실시했는데, 잣담이 어디에서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를 중산간마을 어르신들에게 물어 행정구역을 나눴다고 합니다. 이런 행정사적인 이야기를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한 작가의 잣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목장의 변화 과정으로 이어지고, 목장 이야기는 화전민의 증가와 퇴조로 연결된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시절 제주도에 공동목장이 건설됐어요.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먹거리 특히 단백질이 부족해졌거든요. 전장의 군인들에게 단백질을 공급해야 하는데, 그 공급원으로서 제주도 목장이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마을 공동목장을 만들게 하고 말보다는 소를 입식하게 했습니다. 1894년 갑오경장 이전까지만 해도 말이 90% 이상 됐거든요. 목장에서 소를 많이 키우는 한편으로 한림 옹포리에 통조림 공장을 만들어 일본군에 납품을 한 겁니다.

한편 조선시대 말기 인구가 늘어나면서 목장이나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집니다. 이 화전민들이나 가난한 중산간마을 사람들 중 일부가 나무를 베어 만든 땔감이나 숯을 해안마을로 가서 팔게 됩니다. 제주어로 이들을 '낭장시', '숯장시'라고 하지요. 예를 들어 화전민이 숯을 구워 모슬포 장으로 팔러 나가면 가파도, 마라도 사람들이 가장 먼저 사갑니다. 가파도와 마라도에 나무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화전민들이 줄어들게 됩니다. 1912년 제주도 해안을 따라 처음으로 신작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길이 뚫리자 차가 다니게 되고 자연적으로 해안가 마을이 행정의 중심지로 바뀌게 됐습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나오는 소라나 전복을 일본인들이 사가면서 돈이 생기는 겁니다. 이 무렵 중산간 마을에 있던 행정관청들도 성읍리나 안성리에서 표선, 모슬포 쪽으로 내려오게 되고요.

그러자 화전민들이 산에서 밭을 일구거나 나무를 해서 돈을 버는 것보다 해안마을로 내려가는 게 유리하다고 보고 이주하기 시작합니다. 또, 바닷가로 가면 돈을 벌 기회를 찾아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다는 점도 화전민의 이동을 부추기는 요인이 됐습니다."


한 작가의 화전민 이야기는 제주사람들이 대거 일본으로 떠나게 되고, 이들이 일본에서 노동운동 사례를 보고 진보적인 의식을 갖게 되며, 나중에 제주 4·3의 동력이 된다는 데까지 이어진다. 그가 강조하는 한라산 인문학은 이처럼 잣담-목장-화전-도로 개설-일본행-4·3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처럼 제주사람들이 살아온 역사를 단편적으로 파악할 게 아니라 서로 연관지어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약자들이 고생하며 만든 군경주둔소
  

안덕면 상천리 쳇망어음주둔소의 성담 군경주둔소는 토벌대가 '산사람'들을 완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한라산 중산간지대에 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 4.3시기의 주요 유적지다. ⓒ 한상봉


한라산 잣담을 찾아다니던 한 작가의 관심사는 4·3 시기 군경주둔소로 옮겨 간다. 주둔소 역시 처음부터 목적 의식을 갖고 조사 작업을 한 것은 아니었다. <제주동부지역 잣성 유적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주둔소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된 게 계기가 됐다.

"남원읍 신흥리 지역이었는데, 이어져 있어야 할 잣담이 중간에서 사라져버린 겁니다. 1948년도 항공 사진을 보면 분명히 잣담이 보이거든요. 이상하다 여겨 신흥리 경로당에 가서 어르신들한테 물었더니 '잣담이 끊긴 자리에서 100미터 쯤 내려가면 소나무가 있는데 그곳을 살펴보면 주둔소 터가 있다. 4·3때 주둔소를 만드느라 그 잣담을 300미터 정도 허물어 그 돌을 가져다가 썼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런 증언은 이분들 아니면 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당시 상황을 모르니까요." 

군경주둔소는 1951년, 토벌대가 미처 진압하지 못한 '산사람'들을 완전히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한라산 중산간 지대에 돌로 쌓아 만든 것으로 4·3 시기의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제주도에는 남자들이 많이 희생된 데다 한국전쟁이 한창이어서 주둔소 축조 작업은 경찰의 지휘하에 여성이나 노인, 아동들이 동원됐다.

한 작가는 지난 2019년 제주4·3 평화재단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제주 4·3 시기 군경주둔소〉라는 책을 펴냈다. 주말을 이용해 3년 반을 조사해 연구한 끝에 나온 소중한 결실이었다.

"이렇게 제주도의 노약자들이 고생고생하며 만든 군경주둔소가 현재까지 확인된 곳만 46개 소에 달합니다. 이 주둔소들로 한라산에 포위망을 구축한 셈이지요. 제가 조사해 보니 4각형 혹은 3각형 형태로 만들었는데, 돌담의 높이가 평균 3미터 정도였습니다. 넓이가 200∼300평 정도로 가운데에는 집이 한 채 있고 화장실도 따로 갖췄습니다. 모퉁이에 망루가 있어서 2인 1조 혹은 1인이 보초를 섰다고 합니다. 20세 이상이 한국전쟁에 참여하다 보니 16∼20살 사이의 남자 청소년이 협조원이라는 이름으로 경찰관과 함께 근무했다고 어르신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4·3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지만 제대로 관리가 안 돼 허물어진 곳이 많은 실정입니다. 골프장 건설, 1100도로 건설, 밀감밭 조성 등으로 많이 사라졌고, 심지어 주둔소 자리에 산담(묘)을 조성해 사용해 버렸고요. 현재 그나마 주둔소가 원형에 가깝게 보존된 것은 수악주둔소, 시오름주둔소, 쳇망어음주둔소, 가친오름주둔소 정도입니다."


누군가를 배려하는 전통 '궤'
 

제주시 노형동의 영등창궤 4.3 시기 한라산으로 피신한 주민들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 피난처'가 궤였다. 영등창궤에 피신했던 주민들은 결국 잡히거나 죽는 비극을 겪었다. ⓒ 한상봉

 
한라산과 관련하여 눈여겨볼 것은 '궤'다. 궤란 바위그늘집을 말하는데, 바위 밑으로 들어가 사람이 머물 만한 공간을 말한다. 제주 중산간 마을에 대한 강경 진압이 시작되자 주민들은 한라산 숲으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고 '생존을 위한 마지막 피난처'인 궤로 숨어들었다.

"애월읍 중산간 숲속 지혈궤의 경우 바위 옆에 작은 구멍 하나가 보입니다. 어른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구멍 안으로 내려가 봤더니 안쪽으로 길이 10미터가 넘는 공간이 나옵니다. 깨인 그릇들이 보이는데, 증언에 따르면 부녀자 노인 어린이들이 30여 명이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지혈궤 앞쪽으로 '한대궤'를 비롯해 이름을 알 수 없는 궤들이 많이 있어요. 자연히 피난민들이 몰려들 수밖에요."

한상봉 작가에 의하면 이런 궤들이 얼마나 있고, 사람들이 실제 얼마나 들어갔는지 그 전모를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한 작가 자신도 비를 피하기 위해 궤로 들어가 하룻밤 묵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 궤 역시 실태 파악과 보존대책이 미흡하다 보니 후대 사람들에 의해 그릇 등 4·3 관련 유물들이 치워진 곳도 있다고 한다. 궤 이야기를 하면서 한 작가는 제주사람들의 배려의 문화를 언급하기도 했다.

"제가 궤 안으로 들어간 적이 있는데 나무토막을 쌓아 놓은 무더기를 봤어요. 그래서 어르신들한테 물어봤더니, 산에서 소나 말을 몰고 갔다가 비가 와서 궤로 피신하면 나무가 있어 불을 피우며 요긴하게 썼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도 떠날 때면 역시 주변에서 나무를 구해다가 궤 안에 쌓아 놓고 나왔다는 겁니다. 이걸 '울밑낭'이라고 하는데, 다음에 궤에 들어온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라고 해요.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위해서 배려하는 전통이 한라산 속에 스며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이야기 숨어있는 한라산 둘레길
  

눈 내리는 날의 '길 없는 길' 산행 한라산을 오르던 중 1000고지 부근에서 눈을 맞아야 했다. 뒤따라 오던 젊은이가 그의 뒷모습을 촬영해주었다. ⓒ 한상봉

 
한상봉 작가의 한라산 인문학은 최근 제주올레에 이어 걷기 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는 한라산 둘레길로 이어진다. 동백길, 돌오름길, 사려니숲길 등 9개 코스 70.8㎞가 현재 개통되었는데 이 길에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원래 한라산에는 우마를 몰고 정상부까지 오르내리던 '종'으로 된 길이 나 있었지요. 오늘날의 등산로가 바로 우마가 다니던 길입니다. 그런데 둘레길은 '횡'으로 난 길이에요. 1905년 일본인들이 제주도 남부지역에 표고밭 3개소를 만듭니다. '양쿤이' 표고밭이라든지 '밴도친밧' 표고밭 같은... 일본어 표현입니다만, 이런 표고밭을 운영하던 일본인들이 서로 왕래하고, 표고를 운반하기 위해 제주인을 고용해 '임도'를 낸 겁니다. 한라산의 임도는 처음엔 좁은 길이었는데, 표고재배가 활성화되면서 주변 나무를 베어내 점차 넓어졌어요.

표고는 조선시대에는 '향고'라고 해서 나라에 진상품으로 바쳤다고 합니다. 한때, 세계 3대 표고로 불릴 만큼 한라산의 표고는 명성이 높았어요. 700미터 고지에서 재배한 표고는 향기 자체가 다른 곳과는 달리 뛰어나다는 겁니다. 이 표고는 제주에서 목포, 부산을 거쳐 일본 오사카로 실어 날랐어요. <1918년 조선 오만분지일> 지도 제주지형도를 보면 표고밭이 수십 군데나 보입니다. 1905년에서 1918년 사이에 엄청 늘어났고, 따라서 임도도 늘어난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패전 위기에 몰리자 제주도를 최후의 결전지로 삼아 방어망을 구축하지 않습니까. '결7호 작전'이었지요. 이때 한라산 임도를 이어서 '하치마키' 길을 구축합니다. 8부 능선에 머리띠 모양으로 연결한 도로라는 뜻이지요. 이 하치마키는 4·3 때 토벌 작전에도 이용했습니다. 최근 각광받기 시작한 한라산 둘레길은 바로 이 임도와 하치마키 길을 기초로 만든 것입니다."

  

채록 작업 한상봉 작가는 한라산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온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구술 채록 작업을 해오고 있다. ⓒ 한상봉

 
한상봉 작가가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분야가 잘못 알려진 지명을 바로 잡는 일이었다. 이 작업 역시 한라산에서 삶을 일궈온 어르신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가 그동안 불려온 지명이 잘못됐다고 지적한 대표적인 사례가 선작지왓이다.

"1970년대 들어 곤로가 나오고 경운기 등의 농기계가 밭일을 쉽게 해주고 밀감이 주 수입원으로 등장하자 힘들게 한라산으로 방목하러 다니거나 나무하러 갈 일이 없어졌습니다. 대신 산에 나무가 많아지고 숲이 우거졌어요. 이런 변화로 인해 등산로가 아닌 대부분의 한라산 공간은 잊힌 장소가 됐고 목축을 했거나 숯을 굽고, 약초 캐러 다녔던 이들이 부르던 지명도 자연스레 사라질 지경에 이른 겁니다.

영실 탐방로를 통해 윗세오름 대피소에 이르는 도중에 구상나무 지역을 벗어나면 오름 앞으로 넓은 들판이 나타납니다. 요즘 제주사람이나 관광객 대부분은 이곳을 '선작지왓'으로 알고 있지만 이곳에서 소를 키웠던 분들은 이곳을 '세오름밧'이라고 합니다. 오름 3개가 있는 밭이라는 뜻이지요. 대신 방애오름 남서쪽 930미터 지점의 하얀 돌이 있는 자갈밭을 '산작지'라고 부릅니다."


한상봉 작가가 20여 년에 걸쳐 한라산을 다니며 확인하고, 지역민들을 만나 조사한 지명은 궤를 포함해 한라산국립공원 안에만 250여 개가 넘는다. 대부분은 지형이나 형태, 경험했던 일들을 반영해 지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런 지명들이 후대에 오면서 한자화 되거나, 위치가 잘못 표시된 채 지도에 올라가 변질된다는 것이다.

힘없고 빽 없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역사
 

한라산을 답사중인 한상봉 작가 그의 산행 장비는 김밥, 빵, 물, 수첩, 카메라가 든 배낭과 뱀의 공격과 진드기 가시 등에 대비한 등산용 스패츠가 전부다. ⓒ 한상봉

 
최근 한라산국립공원관리소의 지원을 받아 〈한라산의 지명〉이라는 책을 펴낸 한 작가는 "한라산 지명을 찾아 정리하는 것은 우리 선대 삶의 역사를 되찾는 시발점"이라고 역설한다.

영남대 국사학과 졸업논문을 쓰려고 4·3에 대해 자료조사를 해보려 했으나 어르신들이 말을 안 해줘 조사를 거의 못한 채 대충 논문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한상봉 작가. 그가 23년째 한라산 인문학이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있는 건 어쩌면 학창시절의 아쉬움을 풀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 작가는 자신이 특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한라산을 연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단지 호기심이 강한 편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잘 알려지지 않은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되살려내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제주나 한라산을 여행하는 사람들도 이런 이야기를 접하면서 제주의 문화를 이해하고, 생각의 폭을 넓혔으면 한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라산 인문학 연구라는 외길을 걷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한라산은 어떤 곳인가?

"한라산은 결국 힘없고 빽 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4·3 때 경찰이 청소년들을 토벌작전에 동원했는데, 이들은 학교도 못 다닌 아이들이었어요. 못 배우고 힘없는 청소년이 끌려나와야 했던 겁니다. 마찬가지로 돈 있고 힘 있는 사람은 굳이 한라산에 들어가 먹을 것을 구하고, 고생해가며 산에서 살 이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제주도의 가난한 민초들이 한라산의 역사를 만들어 오는 동안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고 살기 위해 일본으로 가기도 했죠. 한라산의 역사는 눈물의 역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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