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28 16:23최종 업데이트 23.05.11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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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선언과 정반대 의미를 갖는 워싱턴 선언이 지난 27일 나왔다. 세계 질서가 급격히 요동치는 상황에서, 한민족의 명운과 관련된 상반된 두 선언이 불과 5년 간격을 두고 등장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함께 천명한 이 선언이 잘된 것이든 아니든, 지금처럼 긴박한 상황에서 5년 전과 전혀 다른 노선이 이 선언에 의해 공식 천명됐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은 한동안 마이너스를 감수할 수밖에 없게 됐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요 열강들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노선을 취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에는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뀌기는 했지만, 한반도나 세계 문제에 관한 공식 노선은 바뀌지 않았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요 행위자 중에서 한국만 결정적 순간에 노선을 급거 변경했으니 결국 한국만 시간을 까먹은 셈이 된다.

판문점 선언에 배치되는 현상이 문재인 정권 후반부에도 나타나긴 했지만, 지금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전혀 다른 노선의 공식 표방으로 인한 혼란, 예컨대 대외 무역이나 외교 분야의 손실 등을 수습하는 일도 윤석열 정권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5년 단임제라는 시간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를 수습하다가 임기의 상당 부분을 허비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일상적인 전쟁 공포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이 2023년 4월 26일 워싱턴 DC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열린 국빈만찬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래를 부르고 있다. ⓒ UPI=연합뉴스

 
이번 워싱턴 선언은 '누구와 누가 체결했는가'에서도 판문점 선언과 다르지만, '어떻게 한반도 전쟁을 예방할 것인가, 어떻게 한국을 세계적 위기에서 보호할 것인가'에서도 5년 전 선언과 매우 판이했다.

윤 대통령은 조 바이든 대통령 앞에서 팝송을 열창하며 흥겨운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워싱턴 선언에서 배어나는 것은 그런 흥과 거리가 멀다. 이 선언은 미국의 핵전쟁 억제력을 한국에 확장하는 일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그래서 외형상으로는 전쟁 억제를 위한 선언이라는 인상을 풍길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확장억제 강화를 명분으로 한반도를 일상적인 전쟁 공포로 몰아넣고도 남을 만하다(관련기사: 워싱턴 선언, 한미동맹이 한반도를 위험에 빠뜨렸다 https://omn.kr/23pa0).

이 선언은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확장억제를 통해 핵을 포함한 미국 역량을 총동원하여 지원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라며 "나아가 미국은 향후 예정된 미국 전략핵잠수함의 한국 기항을 통해 증명되듯, 한국에 대한 미국 전략자산의 정례적 가시성을 한층 증진시킬 것이며, 양국 군 간의 공조를 확대 및 심화시켜 나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전략핵잠수함·핵추진항공모함·전략폭격기 등을 정례적으로 가시화시키겠다고 예고했다. 이런 것들이 한반도 주변에 자주 나타나면, 평화보다는 위기가 한반도를 더욱 감쌀 수밖에 없다. 이는 북한의 군사적 대응 수위를 한층 높이는 요인으로도 작용하게 된다.

지난 2월 20일 자 김여정 담화는 "최근 조선반도 지역에서의 미군의 전략적 타격 수단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라며 "상응한 대응에 나설 것"임을 경고했다. 그런 뒤 "태평양을 우리의 사격장으로 활용하는 빈도 수는 미군의 행동 성격에 달려 있다"고 덧붙였다.

김여정을 통한 김정은의 경고 메시지에서도 나타나듯이, 미국 전략자산이 한반도 주변에서 더욱 "정례적으로 가시화"되면 한반도 전쟁 위기는 그만큼 커지게 된다. 워싱턴 선언은 평화가 아닌 전쟁을 노래하는 선언이 될 수도 있다.

5년 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선포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은 전쟁보다는 평화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양 정상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었음을 8천만 우리 겨레와 전 세계에 엄숙히 천명하였다"라고 공표했다.
  

남-북 정상 '판문점 선언' 발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7일 오후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 앞에서 '판문점 선언' 합의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2018.4.27 ⓒ 한국공동사진기자단

 
그러면서 "양 정상은 냉전의 산물인 오랜 분단과 대결을 하루빨리 종식시키고 민족적 화해와 평화·번영의 새로운 시대를 과감하게 열어나가며 남북관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개선하고 발전시켜 나아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담아"라며 구체적인 약속들을 밝혔다.

워싱턴 선언은 핵전쟁 억제라는 명분하에 확장억제 강화를 천명했다. 북한이 과시하는 것 이상으로 미국의 전략자산을 과시함으로써 한반도 전쟁의 가능성을 제어하고 한반도를 격동하는 세계질서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것이 워싱턴 선언의 취지다.

반면, 판문점 선언은 남북 군사력의 과시를 상호 자제하는 방법으로 그런 효과를 얻고자 했다. 전쟁을 억제하고 세계질서에 대응하는 방법에서 두 선언은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워싱턴 선언은 실질적으로 한반도 위기를 더 고조시키고 북한을 한층 더 압박하는 노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판문점 선언과 명확히 대비된다.

외세 의존적 선언

남과 북은 서로 떨어져 있을 때는 으르렁대지만, 일단 만나기만 하면 판문점선언 같은 평화로운 결과물을 도출하곤 했다. 머리를 맞대는 그 순간부터는 '우리의 문제'에 집중하면서 평화와 통일의 길을 모색하는 양상이 자주 나타났다.

한·미나 한·일 혹은 한·미·일이 머리를 맞대면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이런 만남에서는 그 자리에 없는 제3자를 비판하거나 견제하는 말들이 주로 나온다. 북한이나 중국에 대한 견제가 이런 자리의 단골 메뉴가 된다.

윤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의 이번 만남에서도 그랬다. 북한뿐 아니라 중국에 대한 '뒷담화'도 많았다.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한·미 정상 공동성명(한·미공동성명)'은 "한·미동맹과 인도·태평양 지역의 번영하는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위협 대응에 있어서 유사 입장국들과 협력하기로 약속한다"라고 함으로써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전략의 대상국인 중국을 '위협'으로 규정하고 이에 관한 공조를 약속했다.

워싱턴 선언에서도 "한반도와 인도·태평양에서 변화하는 위협에 대응"이라는 표현을 통해 북한과 중국에 대한 견제 의식을 함께 표출했다. 남북이 만나면 '우리 뭉치자'는 말이 나오는 반면, 한·미·일이 만나면 '저쪽을 견제하자'는 말이 주로 나온다는 점도 판문점 선언과 워싱턴 선언의 차이를 보여준다.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악수하고 있다. 2023.4.26 ⓒ 연합뉴스

 
판문점 선언은 "남과 북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확인"했다고 천명했다. 민족 내부의 역량을 총결집해 위기를 극복할 것인가, 미·일의 힘을 빌려 극복할 것인가와 관련해서도 양 선언은 차이를 띤다.

두 선언은 한민족의 에너지를 어떻게 안배할 것인가와 관련해서도 명징하게 대조된다. 판문점 선언은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온 겨레의 한결같은 소망이며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의 절박한 요구"라고 천명함으로써 민족문제 해결에 최고의 비중을 배분했다.

이에 반해 워싱턴 선언에서는 한국의 역량을 글로벌하게 안배시키려는 미국의 의지가 노출됐다. 이 선언은 "한·미 양국은 인도·태평양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노력하며 우리가 함께 취하는 조치들은 이러한 근본적인 목표를 더욱 발전시킬 것"이라고 천명했다. 인도·태평양 문제가 근본적인 목표라고 말했다. 미국이 생각하는 한·미동맹의 근본 목표가 중국을 겨냥한 인도·태평양 전략의 수행임을 문서상으로 명시한 셈이다.

러브샷과 팝송 열창을 하는 사이에 윤 대통령은 바이든과 기시다의 페이스에 휘말리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한·미동맹의 근본 목표가 인도·태평양 전략과 관련된 것임이 명시적으로 선언됐다. 향후 한·미동맹이 미·일의 세계전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더욱 커진 것이다.

패권 경쟁에 한국 끌고 다니는 미국

한·미공동성명 문구 중에 "태평양 도서국과의 협력을 확대하기로 하였다", "5월에 최초의 한·태평양 도서국 정상회의를 개최키로 한 한국의 결정" 같은 표현이 있다. 이 역시 한국의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최근 남태평양에서 전개되는 미·일과 중국의 패권 경쟁에까지 한국이 휘말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남태평양에서 미·중이 얼마나 치열하게 경쟁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호주 동북쪽인 솔로몬이다. 작년 4월 1일 중국 정부는 솔로몬과 안보협정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아시아 차르'로 불리는 커트 캠벨 백악관 인도·태평양보좌관이 4월 22일 고위급 대표단을 이끌고 솔로몬을 방문해 우려를 표시했다. 5월 22일에는 호주에 주재하는 솔로몬 고등판무관이 ABC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공안은 솔로몬 경찰의 통제를 받을 것'이라며 미국 측을 안심시키는 일이 있었다. 이런 식의 공방전이 그 뒤 계속 이어졌다.

이번 한·미공동성명에 한국과 태평양 도서국의 협력이 언급된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다. 한국도 미·일에 가세해 남태평양에까지 가서 패권 경쟁에 휘말릴 위험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국의 에너지가 남태평양으로까지 확대 혹은 분산되게 된 것이다. 한국 내부 문제에 투입될 역량이 불필요한 '오지랖'으로 인해 분산될 가능성이 없지 않게 된 것이다.

이처럼 워싱턴 선언은 전쟁 억제를 명분으로 도리어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한국의 외세 의존을 더욱 강화했다. 거기다가 한국의 에너지를 사방으로 분산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판문점 선언과 명확히 대조된다.

남한뿐 아니라 민족 전체의 명운과 관계된 핵심 노선이 불과 5년 만에 전혀 다르게 천명됐다. 그것도, 긴박하고 결정적인 시점에 그런 노선 변경이 일어났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이 시기에, 대한민국이 윤석열 발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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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프리미엄 김종성의 '히, 스토리'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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