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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군 문화관광과에서 다운받은 사진으로 이순신순국공원일대의 그림이 선명하게 나와있다. 바다 가운데 길게 뻗어나온 반도의 숲속에 '이락사'와 '첨망대'가 있고 그 뒷편 바다가 관음포다
 남해군 문화관광과에서 다운받은 사진으로 이순신순국공원일대의 그림이 선명하게 나와있다. 바다 가운데 길게 뻗어나온 반도의 숲속에 '이락사'와 '첨망대'가 있고 그 뒷편 바다가 관음포다
ⓒ 남해군 문화관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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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23일), 남해 고현면에 있는 이순신순국공원을 방문했다. 공원에는 그동안 코로나로 방안에 움츠려 있다가 밖으로 나온 관광객들이 타고 온 관광버스와 승용차로 붐볐다.

이순신순국공원은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순국한 성지이자 역사의 현장을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공원은 순국 영웅들의 얼이 담긴 호국 광장과 테마별 체험이 가능한 관음포 광장, 노량해전에 대한 3D 영상물을 시청할 수 있는 이순신 영상관과 전통 한옥으로 우리의 멋을 재현한 리더십 체험관 등의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이락사 올라가는 오른쪽 석비에는 이순신 장군의 유언이 적혀있다.
 이락사 올라가는 오른쪽 석비에는 이순신 장군의 유언이 적혀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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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락사를 지나 첨망대로 가는 산책로 모습
 이락사를 지나 첨망대로 가는 산책로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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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영상관 왼쪽 숲속에는 조선 순조 32년(1832)에 이순신 장군의 8세손 이항권이 왕명에 따라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공적을 기록한 유허비가 있다. 해방 후 1950년 남해 군민 7000여명이 헌금하여 정원과 참배로를 조성하고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이락사'와 '대성운해'라는 헌액을 내렸다.

'이락사' 오른쪽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500m 쯤 올라가니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관음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첨망대가 나왔다. 첨망대 아래에는 관광객 한 무리가 점심 먹고 있어 눈살이 찌뿌려졌다.
       
남해를 방문하는 관광객이 늘자 40년된 남해대교를 대체할 목적으로 2018년 9월에 개통된 노량대교가 보인다. 뒤에 보이는 다리가 남해대교다.
 남해를 방문하는 관광객이 늘자 40년된 남해대교를 대체할 목적으로 2018년 9월에 개통된 노량대교가 보인다. 뒤에 보이는 다리가 남해대교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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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망대를 내려와 임진·정유 두 왜란의 마지막 전투 현장을 음미해보고 싶어 노량대교와 남해대교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닷가에는 '이순신 호국길'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조명연합군과 왜수군 3만명이 함성을 지르며 최후의 일전을 벌였던 현장에는 왜가리들이 호시탐탐 먹잇감을 노리고 있었다.

남해대교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버스를 타고 이순신순국공원으로 돌아와 인근에 있는 테마별 체험이 가능한 관음포 광장을 돌아보았지만 관광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관광객들의 시선이 오직 이순신 장군에게만 쏠렸기 때문이다.
 
관음포가 주는 역사적 의미


관음포는 고려시대 팔만대장경 판각 현장이자 정지장군이 왜구를 대파한 관음포대첩의 현장이다. 또한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구국의 현장이기도 하다.

팔만대장경은 몽골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자 1236년(고려 고종 23)에서 1251년(고종 38년)에 걸쳐 조성되었으며 관음포를 포함한 고현 일대에 '분사남해대장도감(출판단지)'이 설치되었다.
  
관음포 인근 관음포 광장에 세워진 팔만대장경 기념물로 팔만대장경 판각 과정이  새겨져 있다. 팔만대장경판은 지리산 일대에서 자란 산벚나무, 후박나무, 돌배나무를 벌채한 후 뗏목을 이용해 섬진강을 따라 관음포 앞바다에 염장했다가 판각했다.
 관음포 인근 관음포 광장에 세워진 팔만대장경 기념물로 팔만대장경 판각 과정이 새겨져 있다. 팔만대장경판은 지리산 일대에서 자란 산벚나무, 후박나무, 돌배나무를 벌채한 후 뗏목을 이용해 섬진강을 따라 관음포 앞바다에 염장했다가 판각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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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음포광장에 새겨진 그림 속에 팔만대장경을 판각하기 전에 목재를 바다에 담그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송화가루가 날려 보이지 않자 동행했던 남해군문화관광해설사 정영숙씨가 빗자루로 쓸고 걸레로 닦아줬다. 고마운 분이다
  관음포광장에 새겨진 그림 속에 팔만대장경을 판각하기 전에 목재를 바다에 담그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송화가루가 날려 보이지 않자 동행했던 남해군문화관광해설사 정영숙씨가 빗자루로 쓸고 걸레로 닦아줬다. 고마운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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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 판각 과정이 그려져 있다.
 팔만대장경 판각 과정이 그려져 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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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 판각 작업을 주도한 정안은 수선사(지금의 송광사) 주지인 진각국사와 힘을 합쳐 목재 수급과 염장에 유리한 지리적 요건을 갖춘 관음포를 대장경 판각의 최적지로 선정했다.

남해 고현면에 화방사를 중창하기도 한 진각국사는 지리산 일대에 있는 목재를 뗏목을 이용해 섬진강 줄기를 따라 관음포까지 운반했다. 필자가 다음 지도를 이용해 섬진강 종점 태인도에서 관음포까지의 거리를 실측해보니 10㎞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관음포 일대를 안내한 남해군 문화관광해설사 정영숙씨의 설명에 의하면 "섬진강에 홍수가 나면 관음포 해변까지 목재와 쓰레기가 떠내려오기도 한다"고 했다.

대장경 판각의 16년 동안 남해에는 승려, 학자, 벌목, 염장, 제재, 서각, 제지, 서예, 직조, 염색, 옻칠, 금속공예 등의 수많은 전문가들이 파견되었고 이들을 뒷바라지해야 하는 민초들은 수많은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관음포 앞바다에 세워진 정지장군 승전 기념물
 관음포 앞바다에 세워진 정지장군 승전 기념물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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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을 판각한 지 132년이 지난 1383년(고려 우왕 9) 5월 '해도원수' 정지장군이 왜선 120척이 온다는 연락을 받고 나주와 목포의 전선 47척을 이끌고 남해 관음포로 달려와 화포로 적의 선봉 17척을 완파하였다.
 
최후의 일전을 벌인 노량과 관음포


임진왜란 3대 해전을 들라면 한산도대첩과 명량해전, 노량해전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왜군과의 마지막 결전장을 왜 노량 앞바다로 정했을까?

1598년 8월까지 순천 왜교성에 주둔했던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급사했다는 전갈을 듣고 철군을 서둘렀다.

이에 묘도 '선장개'에 진지를 마련한 이순신 휘하 조선 수군은 여수쪽 바다를, 진린 도독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은 광양쪽 바다를 틀어막고 퇴로를 열어주지 않았다. 탈출을 시도하는 왜군과 막으려는 조·명 연합군간에 벌어진 3개월 동안의 전투는 치열했고 조·명 연합군의 피해도 컸다.

운명의 순간이 왔다. 1598년, 11월 19일 첨병으로부터 사천과 부산 남해 등지에서 소서행장을 구출하기 위해 집결한 왜수군 500척(1만 2000명)이 접근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왔다. 두 장수는 병목지점인 노량을 전장으로 선택했다. 조·명 연합군이 주둔한 묘도에서 노량까지는 11㎞떨어져 있다.
묘도에서 고니시유키나가가 주둔했던 순천왜교성과의 거리는 12km이고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노량과 관음포까지는 11km 떨어진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노량해전이 벌어지기 직전 묘도를 중심으로 왼쪽은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오른쪽은 진린도독의 명나라수군이 고니시유키나가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
 묘도에서 고니시유키나가가 주둔했던 순천왜교성과의 거리는 12km이고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노량과 관음포까지는 11km 떨어진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노량해전이 벌어지기 직전 묘도를 중심으로 왼쪽은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오른쪽은 진린도독의 명나라수군이 고니시유키나가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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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관음포 앞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첨망대 모습. 관광객들이 점심을 먹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관음포 앞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첨망대 모습. 관광객들이 점심을 먹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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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합군은 백전노장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 80척, 진린이 지휘하는 명나라 수군 300척, 도합 수군 2만 1000명이 참전했다. 3만 명의 수군이 모여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이 노량해전이다.

'기로(岐路)'의 사전적 의미는 길 방향이 서로 다르거나 나누어 지는 지점을 일컫는다. 한반도가 기로에 처했을 때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관음포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집으로 돌아왔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관음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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