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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자전거 여행자의 선택

새벽 4시, 눈을 뜬다. 대만 중부 자이시(嘉義市) 8인실 도미토리는 주말을 앞두고 사람이 모두 찼다. 누군가 잠이 깰세라 어둠 속에서 배낭을 챙긴다. 여권, 카드, 휴대폰, 지갑, 배낭. 이부자리와 침대 밑에 떨어진 건 없는지 플래시를 비춰 살피고, 며칠째 정든 방을 나선다. 

이번엔 숙소 한켠에 놓아둔 자전거 차례. 타이어, 핸들, 체인, 브레이크, 헬멧.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접혀 있던 자전거를 활짝 편다. 짐받이와 안장 사이에 8킬로그램 배낭을 끈으로 고정시킨다. 

대만에 와서 5일 간 캠핑 후 자이시의 최저가 숙소에서(평일 1박 280위안=1만 2000원) 휴식을 취했다. 그동안 촬영한 영상과 사진을 온라인 공간에 저장하고 유튜브 영상 두 개를 만들었다. 여행 중에 실시간으로, 노트북이 아닌 스마트폰으로 편집하는 건 처음이라 더디고 서툴다. 보는 사람도 적어서 수익과는 거리가 멀다. 

대만에 온 지 13일째. 어제는 종일 폭우가 내려 숙소에 더 머물러야 하나 고민했는데, 비가 그친 틈을 타 타이완의 영산(靈山)으로 불리는 2200미터 고지대 아리산으로 향한다. 
 
자이역 앞 정류장에 자전거를 접어 놓고 새벽 6시 아리산행 첫 버스를 기다린다.
 자이역 앞 정류장에 자전거를 접어 놓고 새벽 6시 아리산행 첫 버스를 기다린다.
ⓒ 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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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여행은 처음이다. 구입을 알아보니 로드, MTB, 미니벨로, 종류는 다양하고 가격은 비쌌다. 당근마켓에 올라온, 20년쯤 묵은 듯한 5만 원짜리 자전거를 수리해서 타면 안 될까, 대만이 자전거 선진국이라는데 가서 중고로 사면 어떨까, 한참을 고민했다. 

15킬로그램 위탁수하물을 무료로 실을 수 있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소형 접이식으로, 그중 가장 저렴한 17만 8천 원짜리 자전거를 골랐다. 천 가방에 자전거를 넣고 뽁뽁이와 페트병으로 체인과 연결 부위를 감쌌다. 

두둥. 자전거는 무사히 화물칸을 빠져 나왔다. 접이식 소형 자전거는 비행기나 기차에 싣기 유리한 반면 바퀴가 16인치라 보통의 26인치 자전거에 비해 느리다. 종일 페달을 밟고 수많은 언덕을 넘으면 금세 무릎과 엉덩이가 아파 온다. 

자전거 여행자가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일까. 도가니가 나가고 엉덩이가 짓무르기 전에, 고산지대로 이동할 때는 종종 기차와 버스를 타기로 한다. 
 
자이시에서 아리산으로 가는 길
 자이시에서 아리산으로 가는 길
ⓒ 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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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산의 삼림열차
 아리산의 삼림열차
ⓒ 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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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거인의 고향, 아리산 

새벽 6시, 해발 69미터 자이역에서 출발해 2216미터 아리산 입구까지 두 시간을 달리는 7322번 완행버스 요금은 211위안(9100원). 아리산 입장료는 300위안인데 공공버스를 타고 온 사람은 티켓을 보여주면 50% 할인해 준다. 비상식량으로 삼각김밥, 비스킷, 밀크티를 사고 아리산으로 들어선다. 올까 말까 얼마나 고민했던 곳인지. 빗방울이 떨어지지만 괜찮아. 이건 비가 아니라 성스러운 구름일 거야. 

아리산역 한켠에 자전거를 잠가 놓고 배낭을 챙긴다. 아리산은 하나의 산이 아니라 이 지역 산맥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크게 삼림열차가 다니는 아리산역, 자오핑역, 주산역으로 나뉘는데, 아리산역과 자오핑역 주변은 거대한 나무들로 유명하고, 주산역은 대만 최고봉인 옥산(3952m)이 한눈에 보이는 일출 명소다. 

자오핑역 주변 벤치에 배낭을 놓고, 500년부터 1500년까지 이 숲에 살아 온 40여 그루의 거대한 편백나무(Taiwan red cypress)들을 만났다. 이 나무들의 키는 보통 40미터, 내 인생에서 본 가장 큰 나무들. 마치 거인의 발밑을 산책하는 기분이다. 
 
식민지 시대의 벌목에서 살아남은 아리산의 나무. 옆에 있는 사람을 보면 나무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식민지 시대의 벌목에서 살아남은 아리산의 나무. 옆에 있는 사람을 보면 나무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 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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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산 국유림의 2200미터에서 2700미터 구간은 항상 구름이 머물러 습한 '구름지대'로 불린다. 일제 식민지 수탈자들은 편백나무 벌목을 위해 험난한 골짜기에 삼림철도를 건설했고 그들이 떠난 자리는 민둥산이 되었다. 그때 베어 간 나무들 중에는 3000년이 더 된 나무들도 많았고, 일말의 양심에 거리꼈던지 그들은 나무 위령비를 세워 놓았다. 지금 서 있는 나무들은 상품성이 떨어져서 살아남은 것이라 한다. 

산사태로 무너진 터널에서의 하룻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녹색 거인들의 숲을 헤매고 왔는데 배낭은 그대로 있다. 대만은 배낭여행자에게 참 안전하다고 감탄한다. 관광객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시간. 내일 아침 일출을 맞기 위해 관광지인 주산역쪽으로 갈지, 등산객들이가는 대탑산(大塔山Tashan, 2663m)으로 갈지 고민하다 인적 드문 길을 택했다. 
 
대탑산 산길을 내려오는 등산객들
 대탑산 산길을 내려오는 등산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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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쯤 걸으니 해가 지고 비가 내리는데 절벽으로 이어지던 터널과 철길이 산사태로 인해 처참하게 무너져 있다. 무너진 길을 건너 가라고 군데 군데 밧줄이 설치돼 있었지만 대자연의 위엄 앞에 오금이 저려 나아갈 수 없었다. 일단 비를 피할 겸 터널 안에 텐트를 쳤다. 

쉬이 잠 들 수 없을 때, 밤은 길다. 저녁 여덟 시, 밤 열한 시, 새벽 두 시, 네 시, 해야 솓아라. 부스럭부스럭 새소리, 쉭쉭박쥐소리. 끼익 킁킁 원숭이 소리. 무엇보다 새롭고 결정적인 공포는 쾅 쾅 우르륵, 산이 무너지는 소리다. 

재난영화와 조난영화들이 떠올랐다. 가뜩이나 대만 산악지대 곳곳의 철도는 산사태로 끊어지고 보수 중이었지. 지금 무너지는 바위가이 터널 쪽이라면, 텐트와 나는 먼지처럼 사라질 거야. 며칠 전 자이에서 만난 대학생 웨이웨이와 메이메이의 말이 떠올랐다.

"모든 것은 운명이다." 
"산과 어둠은 무서운 게 아니야. 무서운 건 네 생각일 뿐이지. 대부분의 동물들은 네가 무서워서 먼저 너를 피할 거야." 

 
대탑산 가는 길, 산사태로 무너진 터널 현장
 대탑산 가는 길, 산사태로 무너진 터널 현장
ⓒ 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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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것도 운명일 거야. 아리산의 품 안에 잠들어 보자. 바로 어제, 편안한 도미토리 숙소에서나는 다시 모험을 원하지 않았던가. 어제는 34도 무더위에 땀 흘렸는데 오늘은 14도 추위에 떨고 있다. 있는 옷을 다 껴입고 침낭을 정수리까지 올린다. 
 
2,340미터 절벽 터널에서 보낸 공포의 하룻밤
 2,340미터 절벽 터널에서 보낸 공포의 하룻밤
ⓒ 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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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0미터 내리막길 

구름나라에 비가 멎었다. 무너진 터널을 건너가는 건 포기하고 주산에 올라 눈앞에 펼쳐진 대만 최고봉 옥산(玉山)을 바라본다. 무사히 대만 한 바퀴, 오늘도 이 길을 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이제 아리산을 내려갈 시간. 내리막길은 오르막길 보다 부담 없지만, 2200미터를 단번에 내려가는 건 왠지 무섭다. 빗길에 미끄러지거나, 브레이크가 닳거나, 과열된 타이어가 터지지 않도록 조심 조심 떨면서 산맥을 달린다.  
 
멀리 구름 너머 3,952미터 대만 최고봉 옥산이 보인다. 무탈한 여행과 세계 평화를 기원한다.
 멀리 구름 너머 3,952미터 대만 최고봉 옥산이 보인다. 무탈한 여행과 세계 평화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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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미터 구름지대를 지나자 1000미터 녹차지대가 펼쳐진다. 골짜기 마을마다 녹차밭과 녹차공장, 찻집이 가득하다. 그 아래로는 울창한 바나나밭이 이어지기 시작한다. 

17만 원짜리 보급형 자전거의 가녀린 브레이크는 세 시간 만에 절반은 닳아 없어졌지만, 무사히 살아서 아리산을 내려왔음에 감사하다. 50%의 공포감, 40%의 추위, 10%의 즐거운 스릴감. 삐끗하면 죽을 수도 있는 즐거움을 찾기보다는 안전한 평지를 달리는 게 낫겠다. 
 
아리산 녹차밭 전경
 아리산 녹차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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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난으로 달리다 지쳐, 밤에는 영업을 하지 않는 편의점 뒤편 주차장에 텐트를 쳤다. 한낮에 데워진 시멘트 열기가 뜨겁다. 어제는 2340미터 절벽에서 추위에 떨었는데 오늘은 주차장 시멘트 바닥에서 찜질 중. '육체를 태워 영혼을 남긴다'는 문장이 떠오른다. 오늘, 초췌하고 두려운 내 영혼이, 길 위에 있다. 내일, 88킬로미터를 달려 숙소에 도착하면 찌든 땀을 씻을 수 있으리. 
 
비안토우 Biantou 마을 편의점 뒤편 바나나밭 옆에서의 하룻밤
 비안토우 Biantou 마을 편의점 뒤편 바나나밭 옆에서의 하룻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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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연재한 아메리카, 아라비아, 아프리카 여행기는 책 <지구별 방랑자>(2022, 인간사랑)로 출판되었습니다. 70여 군데 출판사를 돌고 돌아 마침내 출판된 책을 많은 분들이 읽고 공감해주시길 바랍니다.


태그:#대만여행, #아리산, #자전거여행, #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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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바다 미륵섬에서 유년기를, 지리산 골짜기 대안학교에서 청소년기를, 서울의 지옥고에서 청년기를 살았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827일 동안 지구 한 바퀴를 여행했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생활놀이장터 늘장,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 섬마을영화제에서 일했다. 영화 <늘샘천축국뎐>, <지구별 방랑자>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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