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25 11:49최종 업데이트 23.04.28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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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월 '간토학살을 연구하는 모임'의 답사에 참여해 4박 5일 일정으로 일본에 갔었다. 4일째 되는 날은 가나가와현의 요코하마시를 둘러보는 일정이었는데 이때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학살 사실을 알고 추모하는 가나가와현 실행위원회'의 대표 야마모토 스미코(山本すみ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안내를 직접 하겠다고 이마모토 요코(今本陽子) 사무국장과 함께 나와주었다.

야마모토 스미코는 1939년생이니 팔순이 훌쩍 넘은 나이다. 가는 귀를 먹고 허리가 아파 일상생활이 불편한데도 '조선인 대학살'에 관해서라면 한 시간짜리 강연도 선 채로 해낸다. 또 답사반을 이끌고 가나가와현 어디든지 돌며 현장 해설을 한다. 2010년에는 칠순이 넘은 나이에 <요코하마에서 관동대지진 시 조선인 학살>이라는 논문까지 썼으니 그 힘이 과연 어디서 솟아나는지 궁금하다.


그의 안내를 따라 요코하마시에서 벌어진 만행 현장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가나가와현의 계엄사령부가 있었던 다카시마다이(高島) 공원과 탄마치(反町) 공원 그리고 옛 아사노(浅野) 조선소와 호쇼지(宝生寺) 순이었다.

다카시마다이 산에서 시작된 답사 일정
  

다케시마야산(高島山)에서 요코하마 학살지 답사의 첫번째 일정이 시작되었다. 가운데가 야마모토 스미코, 왼쪽이 홍보담당 야마다 야스코, 오른쪽이 이마모토 요코 사무국장이다. ⓒ 민병래


다카시마 언덕에 있는 자그마한 공원에서 야마모토 스미코의 해설이 시작되었다. 이곳은 도쿄만과 요코하마항을 굽어볼 수 있고 눈 밑으로 요코하마역을 지나는 많은 선로가 보여 도시의 전모를 파악하기엔 안성맞춤이다. 인근 아오키(靑木) 산에 재향군인회본부가 있고 헌병대본부까지 가까이 있었다니 사령부 위치로 나무랄 데 없어 보였다.

"요코하마와 가나가와현의 학살은 철저히 은폐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간 조선인은 지금도 지하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나라 잃은 사람들은 어디에도 호소할 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1965년 한일조약을 맺을 때 조선인 대학살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었습니다. 이 비인도적인 범죄를 정면으로 마주 보지 않았습니다."

여든네 살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차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시작한 선생의 이야기는 설명이라기보다는 연설에 가까웠다. 요코하마에서 죽어간 조선인에 대한 연민이 가득했고 일본 정부로부터 아무런 사죄도 받아내지 못한 한국 정부를 꾸짖는 내용이었다.

관동대학살 당시 가나가와현의 조선인 피해는 매우 컸다. 지진의 피해를 직접 받은 지역이면서 군대, 경찰, 자경단이 삼위일체로 학살에 나섰기 때문이다. '재일본 관동지방 이재조선동포위문반'(이하 위문반)의 조사에 따르면 가나가와(神奈川) 철교에서 500명, 고야스(子安町)와 가나가와 정거장 사이에서 150명, 가나가와 경찰서가 있는 고텐초(御殿町) 부근에서 40명 등 3999명이 학살당했다.

하지만 일본 사법성은 다지마초(田島町)와 쓰루미마치(鶴見町)에서 각 1명씩 2명만 살해당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 수에 대해 3999명과 2명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 이런 점이 진실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하지만 이는 일본 정부에 전적인 책임이 있다. 시신을 불태우거나 바다에 떠내려 보내 증거를 없애고 유해 수습조차 막으며 학살 사실을 감췄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 있던 유학생, 기독청년회, 천도교청년회가 주축이 되어 만든 위문반의 조사 활동은 일본 경찰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았다. 당시 사이타마현을 조사했던 이철이 남긴 회고다.
 
사이타마현 혼조에 도착했을 때, 도쿄로부터 미행해온 경시청 내선과 형사 두 명, 혼조경찰서 두 명이 따라왔다. 그 동네의 여관에 머무르고 있을 때는 형사들이 화장실 가는 것조차 따라오는 식이어서 일체 외부와의 접촉은 단절되었다.

이런 악조건을 뚫고 위문반은 1923년 11월 1차 조사를 마치고 도쿄와 요코하마 등 관동 지방에서 학살된 조선인이 6661명이라고 발표했다. 가나가와현이 3999명이니 가장 많이 학살된 지역인 셈이다.

그러나 일본 당국이 공식적으로는 2명뿐이라고 발표했으니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 감췄을 것이다. 야마모토 스미코는 이런 은폐를 성토하면서 해설을 시작한 것이다.

소학교 교사 시절, 조선인 인권에 눈을 뜨다
  

84살의 나이에도 그는 열띤 목소리로 요코하마의 학살 상황을 설명했다. 통역 오은정 선생과 3월에 요코하마의 한 회의실에서 만났을 때다. ⓒ 민병래

 
야마모토 스미코는 요코하마국립대학 학예부 시절 친구들과 주변 농촌 마을을 찾아다녔다. 하루에 한 번만 버스가 다니고 생활 형편이 매우 어려운 곳에 친구들과 먹을거리를 싸들고 자주 오갔다. 여름방학 때는 친구들과 농촌 어린이들을 위해 인형극을 준비했다. 사전에 그 마을에 대한 조사를 하고 알맞은 주제를 골랐다. 그가 농촌 문제, 빈곤 문제에 눈을 뜨게 된 계기였다.

야마모토 스미코는 대학을 마치고 스물다섯 나이에 처음 부임한 우시오다(潮田)
초등학교에서 충격을 받는다. 교단에 서보니 조선인 아동 중 불과 20% 정도만 자기 본명을 쓰고 나머지는 일본식 통명을 썼다. 자신이 조선인임을 모르다가 외국인 등록증 신청을 할 때 알게 되어 "왜 조선인으로 낳았느냐"라며 원망하는 아이도 있었다.

조선인임을 드러낸 아이는 물론이고 일본식 통명을 쓴 아이도 이지메(괴롭힘)를 당했다. 교실에는 비아냥과 괴롭힘이 넘쳐났다.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너 조선인이지"하며 공격했고, 이 말을 들은 조선 아이들은 얼어붙고 말았다.

문제는 차별 의식, 제국주의 의식이 세대를 이어 내려온다는 점이다. 야마모토 스미코는 언젠가 학교에서 본 1910년대 포스터에 "조선에선 야만스럽고 불결한 생활을 하니 일본인이 이주를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라는 문구가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대놓고 조선과 조선인을 업신여기는 의식, 제국주의 의식이 부모로부터 아이에게 대물림 되니 일본인 아이는 학교에서나 거리에서 조선인 아이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 없이 이지메를 행했다.

야마모토 스미코는 이 문제를 동료 교사나 학교 당국과 상의했다. 돌아온 대답은 "일본 아이도 따돌림을 당한다. 어린 시절에 있을 수 있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였다. 분명히 민족 차별인데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현실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조선인 아이는 자기 이름을 쓰면 안 되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질 받아야 하나? 나는 이 아이들과 어떻게 만나야 하지? 

야마모토는 대안을 고민했다. 혼자서 방학 중에 조선인 학생을 모아 여름학교를 열었다. 조선인 학생에게 자기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당당하게 밝히라고 가르쳤다. 그는 한국의 민속 문화와 전통 놀이를 가르치며 뿌리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치마저고리, 바지저고리도 입히고 '삼년 고개' 같은 한국의 민요도 함께 불렀다. 창을 하던 조선인 이창섭에게 배워 아이들에게 직접 장구를 가르쳤다. 조선학교와 교류하며 일본의 아이들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학교 내에서 이지메를 없애려면 일본 아이들이 지닌 편견을 없애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노력은 나중에 학교 차원의 프로그램이 되었다. 야마모토 스미코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에도 요구했다. 조선인 차별을 학교에서 몰아내는 프로그램을 시행하라고! 그의 노력이 통해서인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를 거치면서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는 '한국·조선인의 교육방침'을 수립한다. 요즘 우리식으로 말하면 다문화 교육과 프로그램이 교육청 차원에서 시행된 셈이다.

1973년 조선인 대학살 50주년을 알게 되고
  

야마모토 스미코는 요코하마 지도에 지진 피해 지역과 학살지 및 피해자 수를 표기해 설명했다. ⓒ 민병래

 
다카시마 언덕에서 1시간 남짓 얘기를 나눴을 때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다. 고맙게도 그는 백년이나 되었다는 가게에서 우리 답사팀 인원 수만큼 도시락을 준비해왔다. 2월이지만 따뜻한 햇빛이 어깨에 내려앉았고 요코하마 항에서 불어온 소금기 머금은 바람도 포근했다. 공원 벤치에서 몇 젓가락을 떴을 때 다가오는 비둘기를 밀어내며 야마모토는 말을 이어갔다.

"강덕상은 일본 역사의 모퉁이에 조선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확한 말이에요. 나는 일본이 잘못을 저지르게 된 뿌리를 생각합니다. 식민지 지배 자체가 문제입니다. 일본은 조선에서 동학농민혁명, 의병투쟁, 3·1 독립운동을 탄압했습니다. 이것이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대학살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역사를 보는 눈을 기르기 위해서는 계속 배우고 날카로워져야 합니다."

야마모토 스미코 선생이 관동 조선인 대학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73년이었다. 관동대지진 50주년을 맞아 여러 특집 기사가 쏟아져나왔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관동대지진 때 조선 사람이 나쁜 짓을 많이 했다"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지진을 기억하는 일본 사람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특집기사와 잡지에서 접한 증언은 놀라웠다. 
 
어쨌든 천하에 내놓고 떳떳하게 하는 살인이었죠. 우리 집은 요코하마에 있었는데 가장 조선인 소동이 심했던 나가무라 초(中村町)에 살고 있었어요. 그 살인 방법은 지금 생각해도 참 소름이 끼칩니다만 전봇대에 가시 달린 철사로 동여매고는 때리고 차고 토비구치(トビ口)로 머리에 구멍을 내고 죽창으로 찌르고 어쨌든 닥치는 대로 해댔죠. 몇 명이나 죽였는지 공공연히 사람들이 떠들며 자랑하고 해서 저 같은 사람은 면목이 없어 주눅든 채 걸어가곤 했죠.
- <시오(潮)> 1971년 9월 100쪽
 
야마모토는 이런 목소리를 접하며 조선인 차별의 뿌리를 찾은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에게 들은 얘기, 막연했던 관동대지진의 이미지와 다른 증언이었다. 그는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잡지에 회상기를 남긴 사람에게 연락했다. 당시엔 기고자의 전화번호와 주소가 원고 밑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만나면 그들은 "조선인이 불쌍하다"는 말을 되뇌곤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왜, 무엇 때문에 조선인이 학살당했고 은폐되었는지에 대해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가나가와현립도서관, 요코하마시립도서관 등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찾았다. 그때 시립 고도부키(寿) 소학교와 이소고(磯子) 소학교 어린이들이 남긴 <지진에 관한 아동의 감상(震災に関する児童の感想)>이라는 문집도 발견했다. 
 

야마모토 스미코는 다양하게 표현한 자료로 설명했다. 한국인을 위한 한글 표기가 인상적이다. ⓒ 민병래

 
야마모토 선생은 이런 자료들을 모아 그가 속해있던 '요코하마 스터디' 그룹에 '관동대지진 시 조선인 학살'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하자고 제안했다. 학살이라고 말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여서 주제의 이름을 '조선인 문제'라고 조금 바꾸었다. 이때 야마모토 스미코는 일본인의 차별 의식, 역사 인식의 문제점을 다시금 깨달았고 이에 맞서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학살 자료를 모으고 증언을 수집하면서 요코하마 교육위원회에 '조선인 학살'을 교과서에 수록하고 아동과 청소년에게 교육하라고 요구했다.

1980년대는 관동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사회의 인식이 변하는 시기였다. 학문적으로도 '수난'이나 '박해'가 아니라 '학살'이란 용어를 채택했고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시각이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여기에는 강덕상이나 박경식, 야마다쇼지 같은 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큰 몫을 했다.

또 도쿄나 치바, 사이타마현 등 여러 지역의 시민단체가 관동대지진 50주년을 전후해 부정할 수 없는 학살 관련 자료와 증언을 많이 모았다. 시미즈(清水) 서원 같은 일부 교과서가 이를 반영, 학살의 주체가 '군경'이고 그 원인은 일본의 '배외주의' 때문이라고 쓰기 시작했다. 일본의 미래 세대가 관동대학살 당시 일본의 국가 범죄를 교육받게 된 것이고 야마모토 스미코도 여기에 작은 디딤돌을 놓은 것이다.

- 2편 일본은 왜? 이 세상 일이라고 여길 수 없을 처참한 장면(https://omn.kr/23mzb)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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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1) 야마모토 스미코를 2월에 만났을 때는 ‘간토스터디투어팀’의 참여자로 갔었다. 이때 '간학살 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의 김종수 집행위원장과 조진경 교육홍보위원장, 기억과 평화의 김창규 목사, 진실과화해위원회의 전 위원 임승철 목사 등 8명이 함께했다. 그때 인상이 강렬해 3월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단독으로 만났다. 이때 못 다한 얘기를 4월에 줌으로 나눴고 요코하마에서 15년간 살아온 오은정 선생이 통역을 맡아주었다. 이 글은 답사했던 날을 축으로 세 번의 만남에서 나왔던 얘기를 종합해서 썼다.
2) 야마모토 선생의 논문 제목은 <横浜における関東大震災時朝鮮人虐殺>이다. 호세이대학 대원사회문제연구소에서 2014년 6월 펴낸 잡지에 실렸다.
3) 가나가와현 희생자에 대한 이 조사와 관련 논란이 많다. 당시 이재동포위문반의 조사에서 6661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중 요코하마가 포함된 가나가와현이 3999명이다. 그런데 재일조선인 인구추계조사에 따르면 가나가와현 거주 조선인 수가 1922년에 1969명, 1923년에는 3645명이다. 거주 인구보다 학살자 수가 많은 셈이다. 가지무라 히데키는 이에 대한 보완연구를 통해 2000명으로 학살자 수를 추정하였다.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국가와 민중의 책임>(논형 2013간 야마다쇼지 저) 229쪽 참조
4) 이철의 이 회고를 기록한 사람은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에 연루되었던 한현상이다.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국가와 민중의 책임>(논형 2013간 야마다쇼지 저) 202쪽 참조
5) 토비코치에 의한 살인 증언은 시오(潮) 1971년 9월 100쪽에서 나왔다. 여기선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국가와 민중의 책임>(논형 2013간 야마다쇼지 저) 229쪽에서 재인용했다.
6) 야마모토 선생의 표현은 <関東大震災における朝鮮人虐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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