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21 13:50최종 업데이트 23.04.21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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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청사 ⓒ 위키미디어 공용


일본은 1860년대부터 침략을 꿈꾸면서 조선 지배가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문화적으로 열등한 민족이 문화적으로 우수한 이웃 국가를 지배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일본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조선인의 열등성을 지적하는 데 혈안이 되었던 이유도 자신들의 조선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안간힘이었다. 일본의 침략에 동조하는 서구인들, 그리고 이들과 결탁하여 작은 이익을 취하던 조선의 지식인들이 입만 열만 조선 문화의 야만성을 들먹인 것도 자신들의 친일 행위가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산업화의 성공으로 일자리가 많아 노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일본, 일자리가 적었기에 빈둥거리는 사람이 많았던 조선이었다. 게으르고 아니고는 일자리의 많고 적음의 차이였지 민족성의 차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일본인들이나 서양 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인의 천성이 게으르다거나 일본인은 본래 부지런하다는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우등한 민족의 열등한 민족 지배가 자연법칙이라는 사회진화론으로 포장하였다.

그들이 세운 학교에서 일본인 교사들은 일본 민족의 우수성과 조선 민족의 열등성을 외쳐댔다. 일본인들의 주장에 거부감을 갖던 조선인들도 일본 본토 시찰이나 유학을 다녀오면 친일로 돌아서는 것이 비일비재하였다. 근대화를 성취한 일본의 도시풍경이나 일본인들의 과학적 생활 태도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도시화나 과학 수준이 민족의 문화 수준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는 것,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 폭력보다는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식이 도시화나 과학보다 결코 가벼울 수는 없다.

자신들의 산업화 결과물을 내다 팔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부족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이웃 민족의 삶과 생명을 파괴하는 민족이 문화민족일 수는 없다. 일본인들이 그 어떤 괴변으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 해도, 친일 지식인들이 그 어떤 논리로 자신들의 행위나 사고를 합리화하려 해도 가능하지 않은 이유이다.

지난 수천 년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적어도 사람의 생명을 대하는 태도에서 일본은 문화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늘 자신들의 왜곡된 기준으로 문화와 비문화, 문명과 야만을 나누고 자신들은 문화와 문명의 경계 안에, 그리고 이웃인 우리 민족은 경계 밖에 세우려했다.

1934년 11월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의례준칙'이란 것이 이런 일본의 왜곡된 의식을 잘 보여준다. 자신들의 왜곡된 기준으로 만든 준칙을 강요하기 위해 각종 교육활동과 계몽활동을 벌였다. 친일 인사들은 자신들이 하는 친일 활동의 정당성을 보여주고자 할 때 이 의례준칙을 인용하곤 하였다.

이 의례준칙은 조선의 혼례, 상례, 제례 등 대부분의 우리 전통문화를 "전부터 내려오는 폐단"이라고 하여 일절 배척할 것을 요구하였다. 예컨대 혼례 중 궁합이나 사주 등은 무식에서 생긴 폐단이어서, 혼인을 청할 때 예물로 보내는 납채는 매매혼인의 흔적이어서, 나무 기러기를 사용하는 전안례는 가치 없는 중국의 풍습이어서 폐지하는 것이 옳다는 식이었다.

조상 숭배는 헛된 의식이어서 폐지하고, 대신 일본식으로 영좌를 50년간 집에 두었다가 폐기하는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도 등장하였다.

반상식적인 '음식점과 식당의 영업법'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전시라는 이유로 온갖 해괴한 생활 지침을 발표하였다. 한 신문의 표현대로 자고 나면 발표되는 '7.7 금지령'이니 '8.1 조치'니 하는 온갖 명령과 규제로 일상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1940년대에 접어들자 저들이 벌인 배영 운동의 영향으로 음식점이나 카페 이름에 영어 사용은 금지되었고, 미국이나 영국 등 적성국 음악은 가정이든 음식점에서든 틀어도 들어도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시대의 한복판이었던 1944년 6월 18일 '경성부내식당조합'에서 발표한 '음식점과 식당의 영업법'은 그 종결판이었다. 발표된 내용은 6월 20일부터 경성 시내의 카페를 포함한 모든 요식업소에서 일제히 실시하도록 강요되었다.

그중에서도 흥미를 끄는 것은 첫 번째 항목이다. 손님이 카페든 끽다점이든 음식을 파는 업소에 젓가락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음식을 내놓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동안 음식점에서 내놓던 젓가락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다른 방침들은 6월 20일부터 실시하였지만 이 우스꽝스러운 조치는 7월 1일부터 실시하기로 하였다. 아마도 총독부의 판단으로도 젓가락을 들고 가야 음식을 주문할 수 있다는 것은 일정한 계도 기간이 필요한 반상식적 조치였을 것이다.

문화민족이라고 자랑하던 일본인들이 젓가락을 들고 음식점 앞에 줄을 서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수저를 들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걸인들이나 하는 행동으로 여기고, 길거리에서 음식 먹는 것 또한 점잖치 못한 행동으로 꺼리던 조선인들의 동참을 이끌어내기는 어려웠다. 젓가락을 들고 음식점 앞에 줄을 서게 하는 것이 문화민족을 자부하는 일본인들이었다.

둘째는 음식점의 점심 영업 시작 시간을 일제히 11시로 하였다. 음식점 주인의 판단으로 11시 이전에 문을 여는 것을 일절 금지하였다. 10시부터 음식점 앞에서 문을 열기를 기다리는 것을 "사무와 작업 시간을 허비하는 일"로 규정하여 금지한 것이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음식을 사 먹으려면 11시까지 기다려야 했다. 배고픔도 시간을 지켜서 표현하도록 강요한 것이 문화민족 일본인들이었다.

셋째는 음식점 명칭에 이어 음식 명칭에서도 적성 용어, 즉 영어나 프랑스어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런치'니 '커피'니 '오렌지·에토'니 하는 이름들이었다. 커피는 안 되고 고히는 가능하였고, 런치는 안 되고, 란찌는 가능한 시대였다. 자신들이 문명과 문화의 선구자라고 추종하던 서양풍을 배격하는 것이 이제는 문명국 일본이었다.

넷째는 음식점에서는 '반차'(湯茶)를 반드시 내놓도록 하였다. 대중음식점에서는 식사를 마친 손님들에게 반드시 차를 내놓되 무료로 제공하도록 강제하였다. 식사를 한 후 카페나 다방을 찾아 커피를 마시는 양풍을 막아보자는 심리였다. 카페나 다방의 영업 자체를 금지시키면 될 일이었지만 세금 수입을 포기할 수 없었던, 전쟁을 좋아하는 문명국 일본이었다.

(유튜브 '커피히스토리' 운영자, 교육학교수)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 푸른역사.
매일신보 1944년 6월 18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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