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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에서 암리차르까지는 기차로 6시간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하지만 여행은 아주 편안했습니다. 인도에서 가장 빠른 축에 드는 특급열차인 사땁띠 익스프레스에 탑승했기 때문입니다. 가격은 비쌌지만, 식사까지 포함된 특급열차는 나름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렇게 편안히 암리차르에 올라왔습니다. 열차 안에서도 보였지만, 내리자마자 곳곳에 터번을 쓴 사람들이 보입니다. 모두들 시크교 신자들입니다. 암리차르는 시크교 신자들의 도시입니다.
 
암리차르로 향하는 특급열차
 암리차르로 향하는 특급열차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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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교는 15세기 말 구루 나낙(Guru Nanak)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입니다. 라호르에서 태어난 구루 나낙은 신의 계시를 받고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러 선지자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체계화된 교리와 사상을 모아 시크교를 창시했죠.

시크교는 다양한 종교와 교류한 비교적 젊은 종교입니다. 그만큼 과거의 종교와는 여러 측면에서 달랐죠.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고, 사회적인 평등과 합리성을 중시합니다. 형이상학적인 진리보다 적극적이고 성실한 삶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종교적인 헌신이나 고행보다, 정직하고 순수한 일상의 삶이 더 소중하다는 것이죠.

시크교는 여러 의미에서 진보적인 종교였습니다. 여성의 히잡 착용을 폐지했고,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카스트의 혁파를 주장했고, 모든 사람이 신의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었죠. 성씨를 통해 카스트를 알 수 있다는 특성상, 시크교 신자는 모두 과거의 성을 버리고 싱(Singh)과 카우르(Kaur)라는 동일한 성씨를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지금도 시크교 사원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계급도, 나이도, 성별도 관계 없이 모두가 한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는 풍경이 오늘도 시크 사원에서는 펼쳐집니다. 천민이 만든 요리를 브라만은 먹을 수 없다는 힌두교와는 분명한 대조를 이루죠.
 
모든 사람과 같은 식사를 나누는 시크교 사원
 모든 사람과 같은 식사를 나누는 시크교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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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종교죠. 하지만 시크교도, 그 본산인 암리차르도, 오랜 기간 탄압과 박해의 역사를 견뎌야 했습니다.

구루 나낙이 사망한 뒤 제자들에 의해 이어집니다. 암리차르에 처음 자리를 잡은 것은 네 번째 지도자였던 구루 람 다스(Ram Das) 시대였죠. 그 다음 지도자인 구루 아르잔(Arjan)은 이곳에 황금 사원을 짓고 교세를 확장했습니다. 암리차르도 그렇게 함께 성장합니다.

하지만 교세가 확장될수록 위협도 거세졌습니다. 무굴 제국의 황제 자한기르는 관대한 종교 정책을 펼쳤지만, 시크교가 반란 세력에 가담했다고 의심했습니다. 결국 자한기르는 구루 아르잔에게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합니다. 구루 아르잔은 거부했고, 처형당했죠.

그 뒤로 시크교의 역사는 언제나 박해의 역사였습니다. 무굴 제국이 종교 관용 정책을 폐지한 이후에는 더욱 그랬죠. 1675년에는 다시 한 번 교주 구루 태그 바하두르(Tegh Bahadur)가 이슬람 개종을 강요당했습니다. 이번에도 교주는 개종을 거부하고 처형당했죠.
 
암리차르 시내 란지트 싱의 동상
 암리차르 시내 란지트 싱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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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압을 받던 시크교는 스스로 무장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긴 칼로 무장한 일종의 무장 조직을 꾸렸죠. 지금까지도 경호와 치안 유지 업무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는 시크교도의 이미지는 긴 탄압의 역사가 만든 결과물이었습니다. 탄압에 시달린 시크는 종교를 넘어선 무장 조직이자 일종의 정치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죠.

무력을 키운 시크교는 무굴제국 말기, 혼란한 틈을 타 시크 왕국을 건설하기도 합니다. 특히 시크교 세력을 결집해낸 란지트 싱(Ranjit Singh)은 펀자브 지방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1799년 시크 제국을 건설합니다. 펀자브 지방을 넘어서 현재의 인도 북서부와 파키스탄 지역을 광범위하게 지배했죠. 시크교의 본산인 황금 사원에 지금처럼 황금이 덧씌워진 것도 란지트 싱 시절의 일입니다.
 
시크교의 본산인 암리차르 황금 사원
 시크교의 본산인 암리차르 황금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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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탄압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1839년 란지트 싱은 사망합니다. 이후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1849년 시크 제국은 멸망합니다. 시크 제국의 영토는 영국의 지배 하에 놓였습니다. 시크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란지트 싱의 아들 달립 싱(Dalip Singh)은 1853년 기독교로 개종하죠.

1919년에는 암리차르 학살 사건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인도 민족주의 활동가의 체포에 저항한 총파업이 벌어지자, 영국군이 시위 현장을 봉쇄하고 사격을 가한 것이죠. 퇴로조차 막힌 발포에 최소 수백 명이 사망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피해자는 시크교도였습니다.
 
공원이 된 학살 현장에는 여전히 총탄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공원이 된 학살 현장에는 여전히 총탄의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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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독립 역시 시크교도에게는 상처로 남은 역사입니다. 1947년 8월 15일 인도 제국이 해체되면서, 인도와 파키스탄은 각자 정부를 세웠죠. 힌두교 우세 지역은 인도로, 이슬람교 우세 지역은 파키스탄으로 나뉘었습니다. 둘 모두에 속하지 않았던 시크교도들은, 세속주의 국가를 선언한 인도에 소속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땅이 그리 쉽게 둘로 나뉠 리 없겠죠. 힌두교 우세 지역에도 무슬림은 살고 있었고,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특히 시크교도가 주로 거주하던 펀자브 지역은 상황이 더욱 복잡했습니다. 서쪽은 파키스탄으로, 동쪽은 인도로 분할된 것이죠. 원래 하나의 생활권이었던 영토가 두 나라로 분단된 것이죠.

분단의 과정에서는 물론 막대한 혼란이 벌어졌습니다. 소수 종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가산을 정리할 틈도 없이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 사이 힌두와 무슬림 사이 내전에 가까운 폭력과 테러가 벌어졌죠.

둘 모두에 속하지 않았던 시크교도는, 당연히 이중적인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 차례의 폭동으로 수많은 시크교도가 살해당했고, 시크교 지도자들도 그 화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무슬림도 힌두도 아닌 시크교도의 피해는 어느 국가도 대변해주지 않았습니다.
 
암리차르 분단의 역사를 담은 파티션 뮤지엄
 암리차르 분단의 역사를 담은 파티션 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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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교도들은 세속주의를 말하는 인도를 택했습니다. 하지만 힌두교도 위주의 인도가, 시크교도를 비롯한 이교도에게 늘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분단과 학살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불만은 차별과 함께 쌓여갔습니다.

결국 1984년,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던 시크교도 집단이 황금 사원을 중심으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시크교도의 독립국가, 칼리스탄(Khalistan)의 수립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인도 총리였던 인디라 간디는 군사적인 해결책을 선택했죠. 인도군 내에 이미 시크교도가 많았지만, 반대파를 해임하고 황금 사원을 공격했습니다. 무장 집단은 인도군에 의해 축출되었지만, 사원에 대한 군사적 공격은 엄청난 논란을 몰고 왔죠. 수백 명의 시크교도가 이 과정에서 사망했고, 황금 사원의 유물도 다수 실종됐습니다.

이 사건은 시크교도들의 분노를 가져왔습니다. 결국 인디라 간디는 4개월 뒤 시크교도였던 경호원에 의해 암살됩니다. 그리고 이후 인도 전역에서는 반대로 시크교도에 대한 학살이 이어졌죠. 인디라 간디의 암살 소식이 알려진 뒤 사흘 동안 3천명 이상의 시크교도가 살해당했습니다.
 
황금 사원
 황금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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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과 학살의 역사는 여전히 깊은 상처입니다. 전체 시크교도 인구 가운데 75%는 아직 펀자브 지역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현재도 펀자브 지역 인구의 절반 이상은 시크교도지요.

암리차르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이면 파키스탄 국경에 닿습니다. 교류가 적은 두 나라의 특성상 인도-파키스탄 국경은 한적합니다. 하지만 저녁 때면 양국이 국경을 닫을 때 하는 국기 하강식을 구경하기 위한 사람들이 북적입니다.

저도 별 생각 없이 국경으로 향해 국기하강식을 관람했습니다. 하지만 몇 번이나 후회했습니다. 국기를 손에 들고, 국기의 색을 한 모자를 쓴 사람들. 관객들에게 호응을 유도하는 군인.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는 사람들. 저는 그 국가주의의 냄새에 질식할 지경이었습니다. 아예 철책을 걸어 잠그고 오가지도 못하는 한국의 국경보다 나은 것일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국가주의를 쉽게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의 국가주의도 싫어하는 제가, 왜 이곳까지 와서 국기 하강식을 보려 했는지 후회했습니다. 결국 행사가 끝날 때쯤 마지막까지 보지 않고 행사장을 나왔습니다. 그건 파키스탄 쪽 국경에서 하강식을 봤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국기 하강식의 군중들
 국기 하강식의 군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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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분단과 학살의 상처가 살아 숨쉬는 땅이지만, 국경에서는 국기를 흔들며 군인에게 환호하는 행사가 펼쳐진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서로를 향한 야유와 함성이 넘치는 국경에서, 시내에는 그리 많던 터번 쓴 시크교도를 저는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춥니다. 군인은 외칩니다. "힌두스탄(힌두의 땅)!." 군중은 회답합니다. "진다밧(만세)!." 하지만 저는 그 구호가, 전혀 신나지 않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인도, #암리차르, #시크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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