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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9일 국회 정무위 법안심사 제1소위는 회의를 열어 이정문 의원 등 의원 60명이 공동발의한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1차 심사했다. 일부개정법률안은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 서훈대상으로 포함하고 있다.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지난 수년 동안 관련 학계와 시민단체에서 계속 나왔다. 관련 학계와 시민단체는 을미의병(1895) 서훈이 합당하다면, 2차 동학농민혁명(1894) 참여자도 서훈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을미의병과 2차 동학농민혁명이 똑같은 항일무장투쟁 즉 독립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정읍시 구민사 경내에 있음
▲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상 정읍시 구민사 경내에 있음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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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보훈을 담당하고 있는 국가보훈처는 을미의병 참여자에 대해서는 1962년부터 지금까지 145명을 서훈하면서도, 전봉준·최시형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단 한명도 서훈을 하지 않았다. 

3월 9일 법안심사 제1소위에 참석한 윤종진 국가보훈처 차장은 "동학 2차 봉기도 독립운동으로 볼 여지가 있다는 찬성 의견, 2차 봉기가 반일 투쟁의 국면을 보인 것은 맞지만 반봉건 투쟁도 함께 진행돼 단정할 수 없다는 내용도 있다. 양 의견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이에 정무위 위원들은 "보훈처는 찬반 의견에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분명히 밝히라"는 질의를 하였다고 한다.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50개 단체 참여) 상임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필자(독립운동사 전공 역사학자)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은 일제가 일으킨 국권침탈 사건이었다.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은 일본군이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하여 국왕 고종을 포로로 잡고 조선군대의 무장을 해제하였으며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친일개화파 정권을 세워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 경복궁 점령사건 때에 조선군 궁궐 수비대 17명이 전사하였고 60여 명이 부상하였다.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은 1895년 을미사변보다 더 규모가 컸고 더 폭력적이었다. 을미사변으로 조선군 궁궐 수비대 11명이 전사하였고 민비가 시해되었으며 궁녀 2명이 사망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를 국권침탈로 보는 국가보훈처의 주장을 따른다면(<제2차 동학농민혁명 서훈 해결의지 없는 보훈처>, 2021, 10, 12. 민형배 국회의원실 작성 문서, 4쪽), 1895년 을미의병 참여자 145명에 대한 서훈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둘째, 항일투쟁인 을미의병 참여자 145명의 서훈이 합당하다면, 2차 동학농민혁명(1894) 참여자도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 똑같은 항일 독립운동이기 때문이다. 독립보훈을 책임지고 있는 국가기관은 형평성과 공정성에서 같은 잣대를 대야 한다. 

일제가 일으킨 1894년 경복궁점령사건(국권침탈사건)에 맞서,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2차 동학농민혁명(=항일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한국 역사학계는 2차 동학농민혁명이 '독립운동사의 범주에 포함된다'라고 논증하였다. 한국의 독립운동이 갑오의병(1894)과 2차 동학농민혁명(1894)에서 시작되었다고 대학의 한국독립운동사 개설서인 <한국독립운동사 강의>(한울, 1998년∼2023년)에서 가르쳐왔다.

김상기 교수는 국권침탈 사건으로 갑오변란(1894년 경복궁 침범사건)을 설명하면서, 갑오변란을 계기로 반침략투쟁인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났다(김상기, <갑오·을미 의병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0, 8, 16쪽)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어 김 교수는 갑오·을미의병이 항일투쟁이기에, 독립운동에 해당한다고 여러 저서와 논문을 통해 강조했다.

한시준 교수(현 독립기념관장)는 <총설: 한국 독립운동사의 이해>에서,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사건인 '갑오변란'과 1895년 민비시해사건을 계기로,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군과 을미의병들이 봉기하여 일본군과 싸우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라고 서술하였다.

김희곤 교수(현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장)도 "독립운동사는 1894년부터 1945년까지 51년 동안 전개되었고, 그 가운데 첫머리를 장식한 것이 1894년 갑오년에 일어난 갑오의병이었다. 그런데 독립운동사의 출발점인 갑오의병이 일어난 곳이 바로 이곳 안동이었다"(김희곤, <안동의 독립운동사>, 안동시, 1999, 23쪽)라고 갑오의병을 한국 독립운동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들도 2차 동학농민혁명을 "민족독립운동"으로 주장하였다. 청일전쟁 연구의 대가인 일본 나라여자대학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현대 일본의 역사인식>(2007, 256∼257쪽)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이 '조선의 민족독립운동'이고, '동아시아 민족독립운동의 선구'라고 주장하였다.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는 2020년 "동학농민혁명은 동아시아 민족독립운동의 선구, 세계 민족독립운동의 선구"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반대하고 민족의 독립을 지키려는 운동"(<세계사의 현단계와 동학 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생각한다>, <나주동학농민혁명 재조명과 세계시민적 공공성구축-자료구축을 중심으로-2020년 나주동학농민혁명 한·일학술대회 자료집), 나주시, 2020, 10, 28, 14∼15쪽)이라고 강조했다. 

셋째, 역사학계의 통설에 따르면 1차 동학농민혁명(1894, 3, 20, 무장 봉기)은 신분제 철폐와 같은 반봉건 민주주의 운동이었다. 2차 동학농민혁명(1894, 9, 10. 전주 삼례 봉기)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1894, 6, 21.)으로,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의병운동에도 반봉건 운동의 성격이 있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후기의병도 반봉건 투쟁이 있었다. 의병운동에서 반봉건 투쟁이 있었다고 해서, 의병운동 참여자가 독립유공자로 서훈이 되는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독립유공자 서훈은 항일투쟁, 반일투쟁을 가지고 하였다. 2차 동학농민혁명 봉기가 항일 투쟁을 전개한 것이 맞으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해야 한다.

넷째, 1980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2023년 현재 9종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까지 43년 동안 2차 동학농민운동을 일본군을 몰아내려고 한 항일 투쟁 즉 독립운동으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 형성은 법률 제정과 국가기념일 제정으로 완결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2004)은 제2조(정의)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란 "1894년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 참여자를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2019년 2월 대한민국 정부는 동학농민혁명을 국가기념일(5월 11일)로 제정하여, 매년 국가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세종시 소재
▲ 국가보훈처 팻말 세종시 소재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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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보훈을 담당하고 있는 국가보훈처는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에 대해 보다 분명한 견해를 국회 정무위와 국민에 밝히기를 바란다. 국가보훈처는 올해 2월 27일 국회 본회의 통과로 '국가보훈부'로 격상되었다. 국가보훈부의 위상에 맞는 역할을 하여주기를 바란다.

태그:#국가보훈처, #국가보훈부, #2차 동학농민혁명, #전봉준 , #독립유공자 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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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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