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12 13:52최종 업데이트 23.04.1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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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태그 #지역이 시즌2로 돌아왔습니다.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지닌 필진들이 수도권 밖 지역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내다봅니다.[편집자말]
몇 해 전이다. 지역 주민들이 준비한 간담회에 참석한 일이 있다. '여성'이자 '청년'으로서 지역에 사는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요청이었다. 소위 말해 '상대방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 관 혹은 관변단체 행사가 아니었기에 무척 설레며 그 자리를 찾은 기억이 난다. 같은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허심탄회하게 내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조언이나 경험담도 얻을 수 있으리라, 하는 기대를 안고.

물론 그런 기대는 오래지 않아 부서졌다. '청년 여성뿐 아니라 이전부터 계속 지역에 살고 있는 수많은 여성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달라'는 내 말에 일부 남성 참석자들이 보인 반응 때문이다. 
 
"요즘은 여성들이 사회 활동도 하고, 마음껏 의견도 개진할 수 있지 않나요? 그런데도 별다른 활동이 없는 걸 보면 특별히 의지가 없어서 아닌가."
"한때 농협 여성 조합원 활동에 기대를 건 적이 있었는데... 소위 말하는 '오빠 부대' 정도로 전락해버리는 경우도 봤고요."


약간의 당황스러움과 함께 "여전히 여성이 마이크를 잡는 일은 많지 않고, 공적인 자리에서 발화하는 기회 자체가 부족"하니 "그런 자리를 독려하고 자꾸 만드셔야 청년 여성들도 지역에서 살 수 있다" 정도로 답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이 자리에 남성 주민들이 참석할 수 있는 것은 집에서 누군가 살림을, 양육을 도맡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과 함께.
 

전국에서 총 13명의 여성 조합장이 탄생했지만 1300개가 넘는 조합 수에 비하면 1%대의 미미한 수준임은 여전히 아쉬움을 남긴다. 사진은 전국동시조합장선거를 앞둔 지난 2월 27일 오전 부산 중구 부산시수협 자갈치지점에서 직원들이 선거 벽보를 부착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갑자기 이 장면이 떠오른 것은 얼마 전 치러진 농협 조합장 선거 덕분이다. 지난 3월 8일 진행된 전국동시조합장선거에서 충북 옥천은 지역 농협 네 곳(옥천농협, 이원농협, 대청농협, 청산농협)의 조합장을 뽑았다. 앞서 나열한 이야기에서 짐작이 가능하듯, 옥천 지역 농협 조합장 선거에서 여성 후보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아니, 그동안 여성 조합장 선출은 물론 후보로 등장한 적도 없으니 '쉽지 않다'는 말은 너무 순화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반이 여성이듯, 옥천 지역 농민의 절반도 여성이다. 옥천의 여성 농민 수는 6074명으로 옥천군 전체 농민(1만3225명)의 45.9%를 차지한다(2022년 농업경영체 등록 기준). 배우자 혹은 가족과 공동으로 농사를 짓는 경우 농업경영체 등록을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실제 여성 농민 수는 이보다 더 많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지역 농협에서 여성 조합원이 차지하는 비율은 30%를 웃도는 수준이다. 전국 상황 역시 크게 다르지 않는데, <한국농어민신문> 보도(2023년 3월 14일자 "농협 여성임원 비율 고작 9.6%…'대의원 할당제'부터 시행해야")에 따르면 전국 농협 여성 조합원 비율은 33.9%이고 대의원 중 여성은 21.1%에 불과하다. 이사와 감사, 조합장 등 임원으로 가면 이 수치는 더욱 낮아져 전체의 9.6%만이 여성 조합원으로 채워져 있다. 

작은 희망, 여전한 아쉬움

1994년 복수조합원제(부부가 모두 조합원으로 가입 가능하도록 하는 제도)가 도입되면서 여성 농민의 농협 조합원 가입이 가능해졌지만(이전에는 불가능했다는 건데, 이 역시 굉장한 충격이다) 여전히 여성 농민의 조합원 가입 비율은 높지 않다. 이는 조합원 가입이 남성에 비해 훨씬 까다롭고 어려운 상황에서 비롯한다.

조합원 가입에 앞서 '농민'으로 법적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농업경영체 등록을 해야 하지만, 여기서부터 여성에겐 위기가 닥친다. 농업 소득만으로 생계를 꾸리기 어려운 우리나라 농촌 상황에서(2021년 기준 농가당 농업소득은 연 1296만원 수준) 여성 농민은 요양보호사나 체험마을 사무장, 생활지원사 등의 일을 겸업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자연스레 4대보험에도 가입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 경우 농업경영체로 등록할 수 없다. 농업을 하며 농촌에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적은 소득이라도 농업 외의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이렇게 될 경우 결과적으로 농민의 지위를 잃게 되는 것이다. 

어찌저찌 농업경영체(단독경영주든 공동경영주든)로 등록해 조합원 가입이 가능하다 한들, 대의원이나 이‧감사 등 임원으로의 진출은 더욱 어렵다. 조합 출자금이나 예치금, 농업 거래 실적 등 충족해야 할 조건이 많지만, 대부분 '남편 이름'으로 이런 일이 진행되는 현실에서 여성 농민 앞으로 남아있는 실질적인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여성 농민들 사이에선 여성 할당제를 확대해 현재 30% 선에 간신히 머문 여성 대의원 비율을 40%까지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아울러 여성 농민이 공동경영주로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농업 경제 실적 등을 함께 인정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척박한 상황에서도 농협 내 여성 임원 비율은 아주 조금씩이나마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옥천에는 여성 조합장이 아직 없지만, 충북 도내에서는 청주 청남농협 안정숙 조합장이 3선에 성공했고 신임 조합장에 6명의 여성이 당선되는 등 전국에서 총 13명의 여성 조합장이 탄생했다. 역대 가장 많은 여성 조합장이 당선된 것. 하지만 1300개가 넘는 조합 수에 비하면 1%대의 미미한 수준임은 여전히 아쉬움을 남긴다. 
 

조합장 선거의 심각한 성별 불균형은 여전히 성평등이 실현되지 못한 농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 테다. 사진은 충북 옥천군 이원면의 한 마을 풍경. ⓒ 월간 옥이네

 
조합장 선거의 심각한 성별 불균형은 여전히 성평등이 실현되지 못한 농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 테다. 이는 '여성들이 나서지 않아서'도 아니고 '여성의 능력이 미천해서'는 더욱 아니다. 농업에 종사하고 있음에도 농민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기 어려운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 농촌에 뿌리 깊게 남은 성차별이 여성의 능력 발휘를 가로막고 있는 벽일 것이다.

한 가지 사족을 더 붙인다. 여성 농민은 농사일 뿐 아니라 가사노동, 마을 대소사의 뒷일을 감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고된 노동 환경에서 우리 여성 농민의 근골격계 질환 유병률은 70%가 넘는다. 그간 농업을 '노동'으로 보지 않았던(특히 여성 농민의 노동으로) 사회적 인식, 여성 농민의 몸에 맞는 농기계나 관련 지원이 전무했던 것 등 다양한 농촌 상황이 겹쳐진 결과다.

오늘 저녁도 우리 농민, 그중에서도 여성 농민들의 손이 많이 갔을 농산물로 식탁을 차리는 우리가 이런 고단함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다면 좋겠다. 당장 농촌이라는 공간에 함께 살고 있는 우리 이웃들부터 그 어려움을 마주보고 함께 목소리 낼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매일 '지역소멸', '인구감소' 따위를 입에 올리면서도 잊고 있던 것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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