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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8일 발표된 일본 문부과학성의 소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는 한일정상회담 직후의 양국관계 국면에서 큰 파란을 낳았다. 한국의 언론과 시민단체들은 새로운 교과서 검정 결과에 독도 영유권 주장과 전시동원의 강제성을 희석하려는 의도 등이 담겨있다며 일제히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소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에 대한 비판은 한국이 아닌 일본 국내에서도 제기됐다. 특히 오키나와 전투 당시 '집단자결'(강제집단사)에 '일본군이 관여했다'는 설명이 검정 합격 교과서들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오키나와 시민사회로부터 거센 반발이 일었다.

<류큐신보(琉球新報)>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에 동원됐던 학도 출신자들의 모임 '전전학도의 모임'(元全学徒の会)은 3월 30일 성명을 내고 "당시의 교과서에서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을 장려하고 황국사관을 심었던 것이 '집단자결' 등 오키나와의 비극을 낳았다"고 지적하며 "전쟁의 무서움, 전쟁 전 군국주의 교육의 실태를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극적 집단자결'이란 미사여구에 삭제된 것 
  
내부에는 아직도 유골 등이 남아있어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 주민 집단자결의 현장 중 한 곳인 치비치리가마 내부에는 아직도 유골 등이 남아있어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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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자결은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 각지의 격전지에서 반복됐다.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전진훈에 따라, 연합군에 저항할 전력을 상실한 일본군 패잔병 다수는 자결을 선택했다. 특히 사이판이나 오키나와와 같은 지역에서는 이 집단자결에 다수의 민간인이 휘말렸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1/4에 달하는 주민이 목숨을 잃었던 배경 중 하나가 바로, 전투 막바지에 횡행했던 이 집단자결이다(관련 기사: "주민 넷 중 하나가 죽었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국민들).

집단자결은 전쟁 중에 숭고한 애국적 행위로 예찬됐다. 즉, 귀신·짐승(鬼畜)과 같은 적에게 붙잡히는 치욕을 당하기보다 '천황폐하의 신민'으로서 의롭게 죽었기에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전후 평화헌법이 정착되고 인권의식이 신장되면서 극단적 인명경시이자 국가폭력이라는 틀 안에서 바로잡혀 가게 됐다. 그리고 현재 군이 관여했다는 사실은 빠진 채 '비극적 집단자결'이라는 미사여구만이 교과서에 남게 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오키나와 지역과 시민사회가 우려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가해자성과 책임을 가리고 차세대에 그릇된 전쟁관을 심어줄 수 있으므로 교과서 검정이 재검토돼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오키나와 각지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죽음의 현장들이 뒷받침한다. 필자는 박사과정 연구의 일환으로 3월 9일부터 13일까지 오키나와를 방문해 여러 전적지들을 답사했는데, 여기서 도출해낸 가장 주요한 화두는 바로 '자결'이었다.

'육군병원'이라는 이름의 생지옥 

일본육군 병원이 위치했던 오키나와 남부 하에바루(南風原)에서는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듯하다.

일본육군은 미군 상륙에 앞서 하에바루 지역에 여러 인공동굴을 파고 여기에 15~19세의 여학생들로 구성된 히메유리 학도대를 간호요원으로 투입했다. 이후 4월 1일에 미군이 오키나와 본도에 상륙하고 전투가 격화되면서 하에바루 지역의 동굴들은 부상병들로 가득차게 됐다.

'육군병원'이라는 이름은 달고 있었으나, 절망적으로 악화되는 전황 속에서 부상병들은 적절한 조치를 받을 수 없었다. 식량은 하루에 한 번 배급되는 조그만 주먹밥 하나가 전부였다. 조명조차 없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환부엔 구더기가 들끓었고 급기야는 광증을 보이며 날뛰는 이들까지 속출했다. 어린 여학생들은 포화 속에서 휴식을 취할 틈도 없이 부상병들의 대·소변과 잘린 팔다리, 시신들을 나르며 혹사를 감내해야 했다.
 
당시에 사용된 약병 등의 흔적이 남아있다.
▲ 육군병원 하에바루호군 20호 내부의 모습 당시에 사용된 약병 등의 흔적이 남아있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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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있던 조선인 부상병이 자신의 성인 '강'을 한자로 새긴 것으로 전해진다.
▲ 육군병원 하에바루호군 20호의 천장에 남은 조선인 병사의 흔적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있던 조선인 부상병이 자신의 성인 '강'을 한자로 새긴 것으로 전해진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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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하순, 미군의 공세로 전선이 밀리는 가운데 오키나와 수비를 담당하고 있던 제32군은 사령부를 후방으로 철수시키며 육군병원에도 철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모두가 이 명령에 응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중상을 입은 탓에 거동에 제약이 있던 자들은 그대로 동굴의 어둠 속에 남겨졌다. 육군병원 측은 남겨진 부상병들이 미군의 포로가 돼 정보가 누설되는 것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모두 죽이기로 결정했다.

남겨진 부상병들에게 청산가리가 든 우유가 배급됐다. 굶주림에 허덕이던 부상병들은 반색하며 우유를 받아들고 허겁지겁 들이키다가 유명을 달리하게 됐다. 이들의 죽음은 당초 자발적인 자결로 알려졌으나, 청산가리 배급을 거부한 양심적 군의관, 구토 증세로 목숨을 건진 생존자 등이 전후에 당시의 참상을 증언하면서 '강제집단사'의 어두운 실태가 밝혀졌다.

강제집단사를 감내해야 했던 것은 민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연동굴 등에 은신하고 있던 주민들이 '미군에게 잡히면 온갖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된다'는 선전에 속아 혈육을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는 비극이 비일비재했다. 하루라도 더 미군의 발목을 잡는다는 일본군 수비대의 작전목표 아래서, 주민은 보호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일본군에게 은신처나 식량 등을 빼앗기고 전장 한가운데로 내몰린 주민들은 무력하게 쓰러져 갔다.

끝없이 이어지던 전쟁의 비극 
  
위령탑 아래는 해산명령 때까지 히메유리 학도대가 은신했던 육군병원호가 있다.
▲ 히메유리 학도대 위령탑 위령탑 아래는 해산명령 때까지 히메유리 학도대가 은신했던 육군병원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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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메유리 학도대 역시 6월 18일에 돌연 해산명령을 받고 군으로부터 버려지면서 스스로 활로를 찾아야 했다. 안타깝게도 이들 중 절반 이상은 끝내 살아남지 못했다. 집단자결을 강요한 일본군 병사나 인솔교사의 사례, 미군에게 잡힐 수 없다며 일본군 병사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원했다는 여학생의 사례, 숨을 곳을 찾지 못하고 포탄에 맞아 산산조각난 이들의 사례 등, 히메유리 학도대의 비극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끔찍하기 그지없는 오키나와 전투는 일본군 지휘부 역시 마찬가지로 집단자결을 택하면서 비로소 끝을 보게 됐다. 아니, 끝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폐가 있을 것이다. 제32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츠루(牛島満) 중장은 참모장과 함께 자결하면서, 잔존병력들에게 항복을 금지하고 마지막까지 항전하라는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일본군 패잔병들과 오키나와 주민들은 오키나와에서의 조직적 저항이 끝이 난 뒤에도 동굴과 해안을 방황하며 그들만의 전쟁을 이어가야 했다.
 
우시지마 사령관 등은 잔존병력들에게 항복금지와 철저항전을 명령하고 자결했다.
▲ 우시지마 사령관 등이 자결한 제32군 사령부호 우시지마 사령관 등은 잔존병력들에게 항복금지와 철저항전을 명령하고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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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에 몰린 일본군 패잔병들은 저항능력을 상실했음에도 항복하지 않고 집단자결했다.
▲ 아리카와 중장 이하 장병 자결호와 위령탑 궁지에 몰린 일본군 패잔병들은 저항능력을 상실했음에도 항복하지 않고 집단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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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의 고급장교들은 이 방에서 수류탄으로 집단자결했다.
▲ 오키나와 구 해군사령부호의 수류탄 폭발 흔적  해군의 고급장교들은 이 방에서 수류탄으로 집단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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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전쟁에 휘말려 죽음을 강요받았던 오키나와인들의 비극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큰 상처로 남아 있다. 오키나와의 해군지상병력을 지휘했던 오타 미노루(大田実) 소장은 해군지휘부의 집단자결 직전 본국으로 보낸 전보에서 오키나와 주민들의 희생을 언급하며 "(오키나와) 현민에 대해 후세에 특별히 배려"해줄 것을 당부하는 문구로 끝문장을 맺었다.

이러한 바람이 무색하게, 오키나와의 슬픔과 아픔이 정치공학적 역학에 따라 외면 받는 것은 씁쓸하기 그지없다. 진영논리를 넘어 역사를 직시하고 화해와 평화에 이를 수 있는 날은 요원한가.

태그:#오키나와, #집단자결, #강제집단사, #교과서, #아시아태평양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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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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