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03 20:26최종 업데이트 23.04.03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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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요금 인상의 적기라고 정부 인상안을 거드는 언론들은 노골적이었다. 난방도 에어컨 가동도 필요 없는 4월에 요금을 인상하면 국민의 반발이 적을 것이라는 논리인데 대놓고 국민을 속이라는 주장과 다를 바 없었다. 전기 사용량이 적은 시기만 한정해서 올리는 것도 아니기에 곧 에어컨 사용량이 많아질 여름이 다가오면 '요금폭탄' 원성이 곳곳에서 생겨날 게 뻔한데 말이다.

그러나 지난달  31일 한국전력(한전)과 정부는 기정사실화했던 요금 인상을 전격 보류했다. 인상의 적기(?)라는 언론의 참견도 최악으로 치닫는 국민 경제와 동요하는 민심을 넘어서지 못했다.


3월 29일 국회에서 전기·가스요금 관련 당정협의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문재인 정부 탈원전이 남긴 한전 적자와 가스공사 미수금 때문에 전기·가스 요금 청구서를 한 번에 받게 됐다며 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요금 인상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는 민주당을 향해서는 요금 조절을 번번이 묵살한 문재인 정부 탓에 한전의 누적 적자가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라며 무책임한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했다.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내세워 값싼 원전의 전기 생산을 외면하고 요금 인상도 제때하지 않아 윤석열 정부에 공공요금 인상의 짐이 떠넘겨져 왔다고 한 것이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전기요금 관련 공약을 발표한 뒤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2.1.13 ⓒ 공동취재사진

 
그러나 자가당착이다. 작년 1월 문재인 정부가 2022년 4월부터 10.6% 전기요금을 인상한다고 발표했을 때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는 민생을 외면한 무책임한 인상이라고 성토하면서 인상안 백지화를 요구했다. 한발 더 나아가 대통령이 되면 전기요금을 인상하지 않겠다는 공약도 했다(관련기사: '문재인 때리기' 윤석열 "4월 전기요금 인상, 전면 백지화" https://omn.kr/1wvts).

전기 요금 인상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디지털 강국에 방해 요소가 될 것이라던 윤석열 대통령. 요금 인상을 제때하지 않은 문재인 정부 때문에 한전의 적자가 누적됐다고 말하려면 요금 인상을 무책임한 인상이라며 막아섰던 대통령의 후보 시절 발언부터 해명하는 게 순서다.

국민 고통을 외면한 무책임한 인상이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국민의힘이 여당이 되면서 불가피한 인상으로 바뀌었다. 인상이 아니라 요금 현실화라는 말장난 같은 주문도 있었다.

같은 전기, 다른 가격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무책임한 인상'이 '불가피한 인상'이 된 이유를 따져야 한다. 얼마를 올려야 요금이 현실화 되는지도 따져야 한다.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2022년 한전의 누적 적자는 32조 6034억 원으로 파악된다. 적자의 가장 큰 원인은 전력 구매 평균 단가가 ㎾h당 95.35원에서 155.17원으로 1년 사이 62.7%로 뛰었기 때문이고, 더 근본적인 원인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 에너지 가격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금 인상으로 적자를 메워야 한다는 주장은 일견 일리가 있다. 적자를 해소하지 못하면 결국 국민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는 주장도 맞다.

그러나 모든 전기 소비자에게 같은 가격으로 전기가 팔리지는 않는다. 3단계 누진제가 적용되는 주택용 전기요금과 많은 시간 원가 이하로 공급되는 산업용 전기요금에 같은 적자의 책임을 지우는 건 공평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올라온 2022년 한전 전력 총 평균단가는 ㎾h당 155.17원이다. 주택용 전기요금의 경우 (저압. 7.1-8.31 제외 전 기간) 200㎾h까지 전력량 요금은 ㎾h당 112.0원이다. 기본요금을 제외하고 전력량 요금으로만 본다면 ㎾h당 155.17원에 사서 112.0원에 팔면 적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200㎾h∼400㎾h까지는 206.6원, 400㎾h를 초과하면 299.3원이다. 주택용 전기 소비자가 대부분 누진 2구간 이상을 적용받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한전 적자의 원인을 주택용 전기 요금으로 보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

산업용 전력의 경우 시간대별 계절별 계약 형태에 따라 요금 부과 기준이 복잡해서 주택용 요금과 단순 비교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전 전기요금표에 의하면 낮은 요금이 부과되는 시간대인 경부하(22:00∼08:00) 구간 전력량 요금은 ㎾h 71.5원에서 ㎾h 94.3원 정도다. 지난 7월 기준 산업용 판매 단가는 ㎾h당 105.48원이라는 <전기신문>의 발표 내용도 있다.

이 통계대로라면 한전은 산업용 전기를 팔면 팔수록 적자가 누적된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더불어민주당 김용민 의원이 한전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토대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지난 5년간 10대 대기업이 전기요금 감면 혜택을 받은 금액만 4조 2000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h당 155.17원에 사서 105.48원에 팔고 5년 동안 10대 대기업에 4조 2천억 원의 전기요금을 깎아주는 구조이다.

한전의 전력통계월보에 따르면 지난 7월 기준 국내 전력 판매량은 총 4853만㎿h에 달한다. 이 가운데 산업용 전력 판매량은 2612만㎿h로 전체 판매량의 53.8%에 달한다. 적자의 원인을 찾으려면 이게 먼저다. 전체 전력 사용량의 15%에 지나지 않은, 그러면서도 3단계 누진제까지 적용받는 주택용 전기에 적자 책임을 묻는 건 공평도 공정도 아니다.

또 봐야 할 건 전력 구입 비용의 적절성 여부다. 우리나라 전력 시장에서 민간 발전사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40%가 넘는다. SK, GS, 포스코 등 대기업이 직·간접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지난 한해 한전이 32조의 영업 적자를 기록하는 동안 민간 발전사들은 3분기까지 영업 이익이 1조 5천억 원에 달했다. 2022년 1분기 GS EPS는 영업이익 2555억 원으로 전년도 1년치를 넘어섰다. SK E&S, 포스코에너지, GS파워, 에스파워, 평택에너지 등 민간 발전사들의 실적도 다르지 않았다.

기업에 의한 기업을 위한 한전

민간 발전사에 대한 초과 이익을 규제하고 전력거래소 SMP(계통한계가격: 발전회사가 생산한 전력을 한국전력에 판매하는 가격) 상한제를 해야 된다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그래서 결정된 게 2022년 12월부터 3개월간 SMP 상한제 한시적 시행이었다.

그러자 민간 발전사들이 발전기 가동을 조정해 최대한 발전기를 가동하지 않는 방법으로 대응했다는 게 한국발전산업노조 제용순 위원장의 증언이다(3월 29일 용산 대통령집무실 앞 '에너지 공공성 강화' 공동기자회견).

민간 발전사에 천문학적인 영업 이익을 몰아주는 구조, 영업 이익을 보장하지 않으면 발전기를 세울 수도 있다는 민간 발전사의 횡포.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한전의 적자가 커졌던 것이다. 국민 호주머니를 털어 적자를 메우는 일보다 민간 발전사를 공영화하고 한전의 공공성 강화를 먼저하라는 주장이 과격하다고만 볼 수 없는 근거는 충분하다.

정부와 국민의힘은 31일 전기요금 인상 잠정 보류를 발표하면서 국민에게는 요금 인상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한전과 가스공사에는 뼈를 깎는 구조 조정을 요구했다. 공기업인 한전의 적자가 커지면 전기 요금을 인상해서라도 적자 폭을 줄여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 그러나 전기를 사오면서 대기업 발전사를 배불리고, 팔면 팔수록 적자를 내는 산업용 전기 요금 체계를 두고 국민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걸 불가피함으로 포장해서는 안된다.
 

전기·가스 요금 인상이 잠정 보류된 31일 서울 시내 전기·가스 계량기 모습. 국민의힘과 정부는 이날 오전 국회에서 당정협의회를 열고 전기와 가스 요금 인상 여부를 추후 결정한다고 밝혔다. 2023.3.31 ⓒ 연합뉴스

 
모든 걸 다 가진 대기업이 왜 전기를 직접 만들어 쓰지 않을까? 그건 계열 민간 발전사 전기를 직접 쓰는 것보다 전력거래소와 한전을 거쳐서 공급되는 전기가 더 싸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전기요금을 올리지 않겠다고 공약했다. 지켜지지 않았고, 지금에 와서 왜 지키지 않느냐고 논쟁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무책임한 인상이라던 전기요금 인상이 윤석열 정부에서 불가피한 인상이 된 이유는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다.

국민을 위한 국민의 한국전력이 아니라, 기업에 의한 기업을 위한 한국전력이 되어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요금 인상의 적기는 없다. 국민 반발을 무마할 적기를 찾아내려는 노력보다 시급한 건 전기·가스 등의 공공재가 기업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쓰이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다.

최악의 경기침체에 전기·가스 인상 논의에 조마조마했었다. 보류 소식에 안도하긴 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전기·가스 공공요금 인상 논의에 그때마다 좌불안석이다. 가슴 졸여야 하는 현실이 화나고 서글프다. 시작도 못 하고 좌초한 탈원전 정책, 그것 때문에 한전 적자가 누적됐다는 궤변도 이제는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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