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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가 '주 최대 69시간 근로시간 개편안'을 발표했다. 여론의 반발로 대통령이 직접 재검토를 지시했지만, 정부는 사회에 '얼마나 오래 일할 것인가'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노동건강연대는 ‘노동시간 개악안’에 대해 더 건강한 노동을 위한 조건으로서의 노동시간을 논의하기 위해 긴급진단을 세 차례에 걸쳐 싣는다.[기자말]
자유와 선택으로 포장된 주 69시간이라는 나쁜 선택지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로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과로사한 이들,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들의 사례를 들며 장시간 노동과 직장 내 괴롭힘은 사라져야 한다고 말할 때 청중 대다수는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일부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아니, 회사가 그렇게까지 일을 시키는데 그만 두고 나오면 되었을 텐데….", "그렇게 괴롭힘을 받았으면 때려치우고 나오면 되었을 텐데…."

해가 되는 작업환경에서 일하는 것을 '선택'할 이들은 적을 테니 노동환경과 노동조건을 규제하기보다는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게 맡기자는 이야기다. 최근 논란이 되는 정부의 근로시간 개편안도 마찬가지다.

주 52시간 이상 일한다고 해서 당장 건강에 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변화하는 노동시장의 조건과 한국적 '관행'을 고려할 때 '유연한 선택지'가 필요하며, MZ세대 같은 경우는 권리의식도 강하니 개인이 충분히 선택할 수 있고, 악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택'을 빙자하며 윤석열 대통령은 노동시간 규제를 허물려 하고 있다.

하지만 괜찮은 사회라면 나쁜 선택지를 마련해 놓고 "이걸 선택하는 것도 당신 자유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개인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선택지를 마련해 놓지는 않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근로시간 개편안은 주 69시간이라는 일하는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선택지를 마련해 놓고, 선택과 자유 심지어 노동자의 건강을 들먹이며 포장하고 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마련해 놓은 주 69시간이라는 강요된 선택지가 노동자에게 어떤 '결과'를 만들지는 명확하다. 단시간 더 많이 일하고, 이후에 더 많이 쉬면 된다는 윤석열 정부의 주장이 수많은 연구를 통해 노동자 건강에 치명적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주 69시간 노동을 '선택'한 사회의 노동자 건강 
 
노동자 건강을 위협하는 근로시간 개편안 - 유가족, 전문가 기자긴담회가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침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쿠팡노동자의 건강과 노동과 인권을 위한 대책위와 택배노동자 과로사대책위,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 주최로 열렸다. 쿠팡 물류센터 고 장덕준씨 어머니 박미숙씨가 증언하고 있다.
 노동자 건강을 위협하는 근로시간 개편안 - 유가족, 전문가 기자긴담회가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침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쿠팡노동자의 건강과 노동과 인권을 위한 대책위와 택배노동자 과로사대책위,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 주최로 열렸다. 쿠팡 물류센터 고 장덕준씨 어머니 박미숙씨가 증언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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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간 노동이 노동자 건강을 해친다는 근거는 많은 연구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그러한 근거에 따라 한국에서는 장시간 노동을 한 노동자가 심장병이나 뇌졸중에 걸리면 산재로 인정한다. 한국의 직업병 인정기준에서는 주 60시간 이상 일했을 때는 관련성의 강도가 강한 것으로, 주 52시간 이상 일했을 때는 업무시간이 길어질수록 업무와 질병과의 관련성이 증가하는 것으로 평가하고, 다른 요인이 복합되면 관련성의 강도가 강한 것으로 평가한다. 일반적으로 연구 문헌에 의하면 주 50시간 이상 일하면 심장병과 뇌졸중 위험이 증가하는 것으로 본다.

뇌심혈관계질환뿐 아니라 당뇨병 등 대사성 질환 역시 그 위험이 증가한다. 장시간 일하게 되면 식습관이 변화하고 활동량이 적어져 몸의 대사 균형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일하게 되면 건강에 나쁜 생활 습관을 지닐 수밖에 없게 되는 것도 문제다. 장시간 일하는 이들의 흡연율, 음주율은 높고, 활동량은 적다. 수면의 질이 저하되고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리는 것도 문제다. 이러한 조건이 산재 사고의 증가로도 나타난다.

장시간 노동은 일-삶 균형을 깨뜨리고 가정생활, 사회생활을 어렵게 만든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는 사업장에 시간을 빼앗겨 가족, 친구들과 시간을 가질 기회를 박탈당한다. 본인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도 없다. 그 결과 우울증, 불안증, 스트레스 등 정신건강 수준이 나빠진다.

장기간 노동에 수반될 수밖에 없는 야간 노동 역시 노동자 건강에 좋지 않다. 위에서 언급한 위험에 더해 야간 노동을 하면 유방암, 전립선암, 대장암, 직장암 등 암 발생의 위험이 커진다. 여성 노동자의 경우 야간 노동을 하면 월경주기 불규칙 또는 중단, 자연 유산, 저체중 출산과 조산의 위험이 커진다.

장시간 노동이 노동자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얘기하면, 그러한 예는 오랫동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 사람들 얘기지 몇 달 혹은 몇 주 집중적으로 일한 사람들은 괜찮지 않냐고 반문하는 분들도 있다. 이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일부 연구에 의하면 짧은 기간이라도 하루에 평소 일하던 시간보다 3시간 이상 넘게 일하면 그것이 심혈관에 무리를 유발하여 허혈성 심장발작의 위험이 2.5배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러한 연구 결과에 근거해 한국에서는 "발병 전 1주일 이내의 업무의 양이나 시간이 이전 12주(발병 전 1주일 제외)간에 1주 평균보다 30% 이상 증가한" 상황에서 심장병이나 뇌졸중에 걸리면 이를 산재로 인정한다.

장시간 노동이 노동자 건강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여전히 이를 원하는 노동자들도 있고, 그들을 위해서는 아주 심각하지 않은 수준에서 '선택지'를 마련해 주는 것이 좋지 않으냐 묻는 분들도 있다. 그런 분들에게는 앞서 말한바, 많은 이들에게 '선택'은 자유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강제된 선택'일 뿐이고, 그러한 강제된 선택지를 만드는 사회는 나쁜 사회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주 69시간은 문제고, 주 60시간은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발상 또한 우습다. '유연한 근로시간', '근무시간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표현으로 치장된 이 정부의 노동시간 규제 허물기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죽음을 선택할 기회 제공", "한국 사회를 100년 이상 뒤로 되돌리기".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이상윤씨는 직업환경의학과 의사이자 노동건강연대 대표입니다.


태그:#근로시간, #과로, #과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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