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29 21:23최종 업데이트 23.03.30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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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서로 벚꽃길. 축제 기간이 아닐 때도 사람들이 자주 찾아온다. ⓒ 성낙선


이 정도 되면 바퀴벌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없애려고 해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약을 놓아도 어디선가 계속 기어 나온다.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속이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도 그냥 내버려 두면, 온 세상에 넘쳐날 게 뻔해 다시 한번 약을 친다. 약을 치는 심정으로 쓴다.

며칠 전 인터넷으로 기사를 훑어보다가 흠칫했다. 한동안 눈에 잘 띄지 않았던, 아니면 제대로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는, 그놈이 모니터 위를 쓱 기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다가 다시 나타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이놈은 살아 있는 생물도 아니면서, 피와 심장을 가진 것들보다 더 질긴 생명력을 지녔다. 이쯤 되면 스스로 살아서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다. 평상시 누군가의 머릿속에 숨어 살다가, 때가 되면 그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튀어나와 종이 신문과 컴퓨터 모니터를 가리지 않고 얼굴을 쓱 내미는 것이다.
 

여의서로, '여의도 봄꽃축제' 개최 소식을 알리는 현수막. 현수막에서도 '윤중로'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 성낙선

 
이미 1984년에 사라진 그 이름

이놈의 이름은 '윤중로'다. 일찌감치 사라졌어야 할 이 이름이 여전히 수많은 언론사의 지면과 사이트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그동안 이놈을 박멸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 그 사람들의 노고가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만 건지. 이놈이 여전히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걸 보고 있으려니 그저 가슴이 답답하다.


윤중로는 한국인의 일상에 친일 잔재가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인치고 이 말을 써 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이 단어는 박정희 정부가 1960년대 후반 모래섬이었던 여의도에 제방을 쌓아 택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그때 쌓은 제방을 '윤중제'로, 그 위를 지나가는 도로를 '윤중로'라고 불렀다. 친일 성향을 가진 독재정권 시기라, 윤중제가 일본말이라는 사실은 간단히 무시됐다.

윤중제는 '輪中堤(わじゅう堤)'를 그대로 한글로 옮긴 말이다. 윤중제는 '강섬 둘레에 쌓은 제방 川や島の周りを囲んだ堤'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꽤 생소한 말일 수밖에 없다. 윤중제는 그냥 '제방'이나 '방죽'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그 말들을 두고, 하필 일본의 건축용어를 제방 이름과 도로명으로 써야 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도 일본식으로 '윤중제'를 건설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껴서였을까?

한편으로는 일본 말이 얼마나 친숙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후 윤중제가 일본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결국 서울시는 1986년 윤중제를 '여의방죽'으로 명칭을 변경됐다. 비슷한 시기에 윤중로 또한, 마포대교와 서울교를 가운데 두고 동쪽은 '여의동로'로, 서쪽은 '여의서로'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로써 마침내 윤중로와 윤중제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여의서로 벚꽃길과 자전거도로. ⓒ 성낙선

 
여전히 생생히 살아 있는 그 이름

그런데도 그놈의 윤중로가 올해 여의도에서 4년 만에 다시 벚꽃 축제가 열리는 시기를 틈타 여기저기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윤중로가 눈에 띄는 일이 급격히 늘고 있다. 최근 몇 년, 이놈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건 순전히 착각이었다. 그 사이 코로나 때문에 벚꽃 축제가 중단되면서 잠시 모습을 감추었을 뿐인데 말이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인터넷에서 윤중로를 표기한 기사들을 찾아봤다.

- 윤중로 20배, 40㎞ 벚꽃길 열린다... (중앙일보, 3/18)
- 매번 가는 윤중로 말고 여기!... (조선일보, 3/21)
- 어느덧 찾아온 봄... 윤중로에 활짝 핀 벚꽃 (서울경제, 3/26)
- [날씨] 서울도 벚꽃 개화... 윤중로 상황은? (YTN, 3/26)
- [포토] 벌써 흐드러진 윤중로… "나도 사진작가" (국민일보, 3/27)
- 벚꽃 가득한 윤중로 (연합뉴스, 3/28)


벚꽃 축제를 언급하면서, 이처럼 제목에 윤중로를 표기한 기사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기사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이외에도 제목과 본문에 윤중로를 언급한 기사가 3월에만 최소 100여 개가 넘는다. 개중에는 '여의서로(윤중로)'처럼 여의서로와 윤중로를 함께 표시한 기사도 몇 개 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여의서로만 표시해도 여의도 벚꽃 축제가 어디서 열리는지는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여의서로'만 표시한 기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수가 매우 적다. 그리고 그런 기사들은 대부분 영등포구에서 배포한 보도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기사들이었다. 다행히도 '받아쓰기'를 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다. 보도자료에는 윤중로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지 않다. 축제 장소로 오로지 '여의도 벚꽃길'과 '여의서로'만 나와 있을 뿐이다. 영등포구 보도자료 내용(일부)은 이렇다.

"영등포구(구청장 최호권)가 4월 4일부터 9일까지, 여의서로(서강대교 남단~여의2교 입구, 1.7km) 및 여의서로 하부 한강공원 국회 축구장에서 '제17회 영등포 여의도 봄꽃축제'를 전면 개최한다고 밝혔다... (중략) ... 구는 지난 3년간 지역사회 내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전국의 대표 벚꽃길인 여의도 벚꽃길(여의서로)을 통제하고 '봄꽃 거리 두기'를 실시해왔다."
 

여의서로 벚꽃길, 벗나무 터널. ⓒ 성낙선

  
보도자료만도 못한 언론사 기사들

어쩌다가 언론사 보도 기사가 보도자료만도 못한 꼴이 되고 만 것인지 모르겠다. 일반 시민들이 윤중로를 쓴다고 해도 말려야 할 판에, 말과 글을 엄격히 가려서 써야 하는 언론사와 기자들이 별생각 없이 윤중로를 사용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모르고 써도 문제, 알고 쓰면 더 큰 문제다. 일찌감치 사라졌어야 할 윤중로가 아직도 살아 숨 쉬는 건 언론사들의 잘못이 가장 크다. 윤중로가 우리나라 언론사들의 응원에 힘입어 질긴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기자들이 모두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억력은 조금 부족할 수 있다. 지난 4년간 코로나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는 동안 그새 윤중로가 어떤 단어인지를 잊었을 수도 있다. 다음은 윤중로라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한 <중앙일보> 기사 일부다. 기사는 지난 2019년에 작성됐다. 짬이 있을 때, 한 번 되짚어 보는 마음으로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내일(5일) 여의도 봄꽃축제가 시작된다. 언론에는 행사 소식을 알리는 기사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여의도 윤중로 벚꽃 시즌 개막' '꽃샘추위에도 윤중로 상춘객 활짝' 등과 같이 '윤중로'란 말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중략)... 도로 이름이 바뀌면서 행사 공식 명칭도 '영등포 여의도 봄꽃축제'로 변경됐다. 따라서 굳이 문제가 있는 '윤중로'란 말을 쓸 필요가 없다." (중앙일보, 2019년 4월 4일)

글 내용만 보면, 마치 최근에 쓴 기사 같다. 이 기사의 제목은 "[우리말 바루기] '윤중로'는 없다"이다. 이 기사는 일본말이라서 문제가 있고, 지금은 도로명과 행사명까지 바뀐 마당에, 굳이 언론에서 '윤중로'라는 말을 쓸 이유가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윤중로라는 과거 이름이 익숙하다 해도, 이제는 더 이상 쓸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후로도 <중앙일보> 기사에 윤중로가 등장한다. 위 기사가 나간 이후로 그 단어를 쓰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뻔했다. 기자의 말은 공염불에 그쳤다.
 

여의서로 벚꽃길. ⓒ 성낙선

  
축제 명칭까지 '봄꽃축제'로 바꿨지만

위 기사와 영등포구에서 배포한 보도자료를 유심히 보신 분들이라면 이미 알아챘을 텐데, 여의도에서 열리는 벚꽃 축제의 공식 명칭은 '여의도 봄꽃축제'다. 벚꽃 축제가 봄꽃 축제로 바뀌게 된 배경에 국민의힘 홍문표 의원이 있다. 국민의힘 홍문표 의원 말에 따르면, "자신의 노력 끝에" 여의도에서 열리는 '벚꽃 축제'의 명칭이 2007년 '봄꽃 축제'로 변경됐다.

그는 언론사 기고문을 통해 "일제 식민 통치의 상징인 벚꽃이 만개한 것을 볼 때마다 꽃을 보고 마냥 즐기지 못하고 역사적 아픔을 상기해야만 하는 현실이 슬퍼진다"며, "일제 잔재인 '벚꽃축제'의 명칭을 '봄꽃축제'로 바꾸고 무궁화 나무심기 대국민 캠페인을 진행해 무궁화의 가치와 소중함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머니투데이, 2021년 3월 31일)

벚꽃을 일제의 상징으로 보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여의도에 심은 벚나무의 원산지를 한국으로 보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윤중로'가 '여의동로'와 '여의서로'로 바뀌고, '윤중로 벚꽃 축제'가 '여의도 봄꽃 축제'로까지 바뀐 마당에 언론사에서까지 계속 '윤중로'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게 정상은 아니다.

정상인 언론사라면 누군가 윤중로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 말이 이미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그럴 의무가 있다. 그런데도 언론사들이 앞장서서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일본말을 자꾸 되살려내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자전거를 타고 마포대교를 넘어서, 조만간 축제가 열릴 예정인 여의서로를 지나간다. 아직 이른 시기인데도, 벚나무에 벚꽃이 꽤 풍성하게 피어 있다. 이 풍경을 보려고 축제와 상관없이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여의도를 찾는다. 4년 만에 열리는 올해 축제 기간에는 예년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 벚꽃을 식민 통치의 상징으로 보고 있는 홍문표 의원에겐 볼썽사나운 일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런데 홍 의원도 되돌아봐야 할 게 있다.

홍 의원 역시 자신의 기고문에 "요즘 여의도 윤중로 또한 화려한 벚꽃으로 치장이 한창"이라고 썼다. 아마도 윤중로가 어떤 말인지를 모르고 쓴 것 같다. 윤중로를 쓰지 않았다면, 그의 말에 좀 더 무게가 실렸을 법하다.

이런 걸 보면서 윤중로가 얼마나 질긴 놈인지를 다시 한번 실감한다. 나 또한 윤중로라는 단어를 쓴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말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를 안 뒤로는 두 번 다시 쓰지 않는다. 누구 말대로, 이제 "윤중로는 없다", "쓸 필요가 없다". 올해 벚꽃 축제는 여의서로에서 열린다.
 

마포대교 남단, 여의도 여의서로 진입로 부근.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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