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하지만 반전인생을 살고 있는 혹은 반전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편집자말] |
2년 전부터 친구 두 명과 함께 매달 10만 원씩 모은다. 통장 이름은 '버킷리스트 실행통장'. 우리는 한 사람의 버킷리스트를 나머지 두 사람이 무조건 같이 해주기로 약속했다. 혼자 하려면 망설여지지만, 함께하면 용기를 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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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 에펠탑이 보이는 호텔에 묵으면서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 지중해 사이프러스 섬에서 10가지 요리가 넘게 나오는 정찬 메제(meze)를 먹으며 와인 마시기. 그리고 나의 버킷리스트인 '하와이에서 훌라 배우기'. 올해 초, '버킷리스트 실행통장' 이야기를 찬찬히 듣던 지인이 말했다.
"왜 미루고 기다려? 지금 하면 되지!"
"돈이 어느 정도 모여야……"
"아니, 훌라 말이야. 나 요즘 훌라를 배우거든."
나는 지인을 따라 당장 훌라 수업에 등록했다. 하와이 민속무용인 훌라(hula)는 노래 가사를 손동작으로 표현하는 수화(手話) 같은 춤이다. 하와이는 고유 언어가 있지만,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선조의 신화와 역사, 전통과 삶을 훌라에 담아 계승했다.
따라서 훌라를 배우면 자연스럽게 하와이 문화를 접하게 된다. 수업 시작과 마무리는 하와이말로 된 의례 에호마이(E Hō Mai)(기독교 예배에서 주기도문 외우듯이)를 함께 외운다.
의례에는 '지금 내가 하는 행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를 소망'하는 뜻이 담겨 있다. 하와이말은 성조가 있어 그런지 신성하고 신비로운 주문처럼 들린다. 눈을 감고 들으면, 태초의 열대우림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의례로 본격적인 훌라 수업에 들어가기 앞서, 모두 둥그렇게 모여 앉아 서로의 근황을 나눈다. 소소한 일상을 주고받는데, 훌라를 통해 '내 몸을 긍정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 수강생은 작고 왜소한 자기 몸이 싫었다고 한다. 한 벽면이 거울인 수업 장소에서 어쩔 수 없이 거울에 비친 몸을 계속 보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게 됐다. '그래, 이게 나야!'라고 받아들이고 나니 오히려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반대로 어떤 이는 체격이 커 보일까 봐 그동안 검은색, 회색 옷만 입었다. 파우(pau skirt 훌라 할 때 입는 치마)를 입어야 해서, 빨간색 치마는 처음 입어보게 됐다. 기분까지 밝아져서 일상복에도 다른 색이 점차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며 환하게 웃었다.
생애 처음으로 '엉덩이를 해방한' 기쁨을 나눈 이도 있다. 그는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 여자는 야하다. 남자를 꾀려는 속마음'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나이 오십이 넘도록 억눌렀던 성적 수치심을 버리고, 자기 엉덩이를 훌라를 추며 마음껏 살랑살랑 흔들 수 있어서 후련하다고 했다.
훌라를 추며 심리적으로 즐거워질 뿐 아니라 두통이나 생리통 등 몸이 건강해졌다는 이야기도 종종 나온다. 실제로 훌라춤이 고혈압 환자의 혈압을 낮춘다는 미국 심장학회 연구 결과가 있다.
2019년 미국 하와이대 연구팀은 고혈압을 앓고 있는 하와이 원주민 250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참가자들은 모두 수축기 혈압이 140mmHg 이상이었다. 6개월 동안 훌라춤을 췄던 그룹은 훌라춤을 추지 않은 그룹보다 수축기 혈압이 평균 10mmHg 이상 감소했다(고혈압은 10mmHg의 단위로 고위험 단계를 나누기 때문에 10mmHg 변화는 상당히 큰 수치다).
미국국립보건원의 데이비드 고프 박사도 "훌라춤은 호흡과 심장이 뛰는 속도를 빠르게 해 건강에 좋은 신체 활동"이라고 덧붙이며 "혈관 건강을 위해서는 어떤 운동을 하든지 더 많이, 더 자주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오늘도 훌라를 춘다
어떤 운동이나 춤도 건강에 도움이 되겠지만, 훌라야말로 '더 많이, 더 자주 움직임'이 가능하다. 나는 요즘 청소기를 돌리면서도 훌라 스텝을 밟는다. 4박자씩 오른쪽과 왼쪽으로 이동하는 기본 발동작 카홀로(Kaholo)이다.
요리하다가도 중간중간 훌라 연습을 한다. 오늘도 두부조림을 하면서 두부 한 면이 익을 때까지 배운 동작을 연습했다. 집안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훌라를 추니 전보다 훨씬 자주 움직이게 된다.
글을 쓰다가도 기본 손동작인 파도 타듯 쓰다듬는 핸즈 모션을 연습한다. 내 손이 이렇게 뻣뻣했나 싶으면서 손끝까지 혈액순환이 되도록 열심히 쥐었다 핀다. 앉아만 있어서 몸이 찌뿌드드하면 얼른 일어나 노래를 틀고 훌라를 연습한다. 나의 유일한 관객인 반려견 망고는 '또 시작이군' 하는 듯 끄~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몸을 붙인다.
훌라 동작을 물 흐르듯 바람이 불 듯 자연스럽게 이어가기도 어렵지만, 춤추는 내내 멈추면 안 되는 '웃는 얼굴'이 가장 힘들다. 내가 평소에 얼마나 무표정으로 살아가는지 알게 됐다. 선생님도 수업 내내 "미소~ 미소~"를 외친다. 머리에 알록달록한 열대 꽃핀을 꽂고, 아무리 화려한 훌라 치마를 입는다 해도, 얼굴에 미소가 없다면 아름다운 자연과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한 시간 동안 억지로 웃으며 훌라를 추다 보면 수업 끝날 즈음엔 환하게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평소에도 가끔 내가 웃고 있나 싶어 일부러 입꼬리를 올리고 얼굴 근육을 움직여보곤 한다. 훌라는 경직됐던 내 얼굴에 미소를 찾아주었다.
"훌라는 내 안의 바다를 꺼내는 일이에요."
첫 수업 시간에 훌라 선생님 하야티가 말했다. 훌라를 출 때마다 '내 안의 바다'를 들여다본다. 세월의 바람이 만든 크고 작은 파도가 내 안에 넘실거린다. 잔잔한 물결도, 삼킬 듯 달려오는 해일도 모두 내 안의 바다다. 생각지도 못한 세찬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흔들릴 때도 있지만, 거친 파도도 언젠가는 잠잠해질 것을 안다.
나는 오늘도 훌라를 춘다. 찰랑찰랑한 파도가 내 마음을 간지럽히는 그 시간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