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27 11:27최종 업데이트 23.03.27 18:42
  • 본문듣기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탄생 148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제주 4·3과 광주 5·18뿐 아니라 4·19를 폄훼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현행 헌법은 전문 첫 줄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함으로써 3·1과 거의 대등한 지위를 4·19에 부여했다. 그렇지만, 이를 외면하고 4·19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4·3과 5·18에 대해서는 북한 개입설을 운운하는 방식으로 폄훼하는 사람들이 많은 반면, 4·19에 대해서는 그렇게 노골적 방식이 동원되지는 않는다. 대신, 간접적 방법을 구사한다. 4·19혁명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을 칭송하는 일이 그것이다.


일요일인 지난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13주년이었다. 이날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인 정진석 의원은 '전후 70년의 평화와 번영을 선물한 이를 기리며'라는 페이스북 글에서 4·19로 쫓겨난 독재자 이승만을 칭송했다. 정 의원은 "오늘은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1875~1965)의 탄생일"이라며 이승만의 독립협회 활동을 거론한 뒤 "공화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함께 공(共), 합칠 화(和)에서 느껴지듯이, 공화국은 독재국과 상반되는 개념이다. 이승만 정권하의 대한민국이 공화국인지 아닌지는 1960년 3월과 4월의 함성이 잘 웅변한다. 이승만은 공화국으로 가는 길을 막은 독재자였다.

그런데도 정진석 의원은 이승만의 90년 인생에서 독재정치보다 비중이 훨씬 낮은 독립협회 활동을 근거로 "공화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이승만을 이렇게 평가하면, 이승만의 길을 막은 4·19 국민들은 '공화국으로 가는 길을 막은 국민들'이 될 수밖에 없다.

굴욕적인 대일외교를 이끌어 헌법 전문의 3·1정신에 상처를 낸 박진 외교부 장관은 26일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회장 황교안)가 주관한 '이승만 탄신 148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이승만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사실을 거론하면서 "지난 70년의 우리 역사는 이승만 대통령님의 혜안이 옳고 또 옳았음을 여실히 입증해주고 있다"라고 발언했다.

이날 연설에서 그는 "대한민국 외교사에서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업적은 불멸의 선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라며 "선구적인 업적과 위상이 재조명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했다. 들여다보면 문제점이 많은 발언이다.

한국인들이 이승만을 비판하는 것은 외교문제 때문이기보다는 독재와 인권탄압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을 재조명하려면 '이승만이 실제로는 독재자가 아니었다'라는 근거를 대야 한다. 박진 장관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한미동맹 체결을 업적으로 평가한 뒤 '이승만이 재조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의 독재와 인권탄압을 은폐하는 발언이다.

4·19의 손 들어준 대한민국 헌법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탄생 148주년 기념식에서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대학로 근처인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열린 이 기념식에는 박민식 국가보훈처장도 참석했다. 그는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만든 토대 위에 이뤄졌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4·19 당시의 핵심 구호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였다. 3·15 부정선거로 4·19가 폭발하기 전에도 그런 정서가 국민들을 지배했다. 1960년 2월 11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민주당 의원총회는 이런 분위기에 착안해 "정말 못살겠다 이번엔 갈아보자"를 대선 구호로 결정했다.

이승만 집권기를 겪어본 사람들은 '못 살겠다'고 아우성쳤는데도, 박민식 처장은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이 이승만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을 재평가하는 것이 "건국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며 의무"라고 강변했다.

1948년 이후 12년간 이승만 치하에서 신음한 한국인들이 그를 얼마나 증오했는지는 당시의 시대상을 대변하는 김수영의 시에서도 느껴진다. 오전 10시 20분에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발표된 1960년 4월 26일 이른 아침, 김수영은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시에서 김수영은 "이제야말로 아무 두려움 없이 그놈의 사진을 태워도 좋다"라며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인 지긋지긋한 그놈의 미소하는 사진을"이라고 썼다. 박민식 처장의 논리대로라면, 이승만을 지긋지긋해했던 한국인들과 시인 김수영은 '최소한의 예의와 의무'도 모르는 사람들이 된다.

대한민국의 영혼을 담은 헌법 전문은 이승만이 아닌 4·19의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도 이승만을 영웅시하는 일이 그의 생일뿐 아니라 기일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일례로, 작년 7월 19일에는 박민식 처장이 제57주기 추도식에서 '왕의 나라를 백성에게 돌려주려 한 공화주의자'였다고 이승만을 치켜세웠다.

집권당이나 정부의 당국자들이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헌법 전문을 외면한 채 '4·19의 적'인 이승만을 찬양하는 일은 국민의힘 정권뿐 아니라 민주당 정권하에서도 있었다. 4·19 정신을 은근히 훼손하는 일은 여야 정치권 전체의 공통된 현상이다.

3·1운동과 4·19혁명의 근본이념은 동일하다. 3·1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민주공화국에 대한 지향이었다. 3·1운동의 열기를 이어받은 임시정부가 임시헌장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한 것은 한국인들이 희망한 독립 국가의 상태가 왕정이 아니라 민주공화정이었기 때문이다.

3·1과 4·19는 민주공화국을 지향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누구와 맞서는가 하는 점에서는 달랐다. 3·1은 외세와의 투쟁을 통해 그것을 얻으려 했고, 4·19는 내부의 적과 싸워 그것을 얻으려 했다.

정치권은 공범이다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탄생 148주년 기념식에서 황교안 이승만대통령 기념사업회장을 비롯한 내빈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런 차이점은 정부나 정치권이 4·19에 대해 다소 모호한 태도를 취해온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4·19가 맞선 내부의 적이 다름 아닌 정부나 정치권이었다는 점이 그런 태도의 저변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4·19 이듬해에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은 취약한 정통성을 보충하기 위해 4·19를 헌법 전문에 담았다. 전문 첫 문장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에 있어서"라고 선언했다. 4·19의 의의를 어느 정도 평가하는 동시에, 이를 5·16과 동격에 놓음으로써 4·19를 이용하고 희생시켰던 것이다.

4·19에 힘입어 정권을 획득한 민주당은 이 사건의 최대 수혜자이면서도 이를 헌법 전문에 담지 않았다. 4·19 직후인 1960년 6월 15일에도 헌법을 개정하고 같은 해 11월 29일에도 헌법을 개정했지만, 4·19 이념을 담지는 않았다.

2011년에 <정치사상연구> 제17집 제1호에 수록된 서희경 서강대 연구교수의 논문 '한국 헌법의 정신사-헌법 전문의 4·19민주이념 도입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는 "1960년 11월, 제2공화국의 제4차 개헌에서 '4·19 혁명의 합법성과 정당성'을 헌법에 담으려는 첫 번째의 시도가 있었다"라며 "그런데 다수의 민주당 의원들은 독재를 부정한 4·19혁명을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4·19를 전문에 도입하는 것에 반대했다"라고 서술한다. 그런 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이 구체제의 일부였던 동시에 4·19에 의해 탄생된 신체제의 최대 수혜자였기 때문이다. 주권자의 혁명권을 4·19에 한하여 제한적으로 인정하되, 그것을 보편적 권리로서 규정하는 것에는 반대했던 것이다."

민주당이 구체제의 일부인 동시에 신체제의 주역이기 때문에 정치체제에 대한 국민의 저항권 혹은 혁명권을 헌법 전문에 명시하기를 꺼렸다는 설명이다. 불의한 정권에 대한 국민 저항권을 인정하기를 기피하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4·19의 헌법 전문 편입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1980년에 등장한 전두환 정권이 4·19를 전문에 담지 않은 것도 동일한 이유에 기인했다.

6월항쟁의 결과로 탄생한 현행 헌법은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이라고 선언하면서도 4·19가 저항권 행사라는 점은 명시하지 않았다. '불의에 항거한'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것을 인정했을 뿐이다. 위 논문은 "결국 여야는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 계승'이라는 함축적인 표현으로 저항권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고 설명한다.

4·19와 3·1이 헌법 전문에서 거의 대등한 지위를 갖고 있는데도, 한국 정부나 정치권은 이를 은근히 폄하하거나 이런 폄하를 묵인하고 있다. 집권당과 정부의 당국자들이 이승만의 생일과 기일에 간접적 방식으로 4·19 정신을 훼손하고 있다. 이 점에서 한국 정치권은 공범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