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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2학년 담임을 맡았다. 줄곧 4학년만 하다 오랜만에 저학년을 가르치게 되었다. 새 학기 첫날, 교실 앞문이 덜컹거리더니 아이들이 들어왔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작은 체구의 무구한 눈빛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쉬는 시간에는 엄마아빠 놀이를 하고, 운동장에 나가면 모래를 하염없이 파고, 방금 설명했는데 10초도 되지 않아 "선생님, 이거 어떻게 해요?"라고 묻는 아홉 살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우당탕탕 하교를 하고 나면 나는 교실 바닥에 뒹구는 학용품을 주워 담고, 교실 구석구석 청소기를 돌린다. 책들을 뒤죽박죽 꽂아놓은 책장을 정리하고, 삐뚤빼뚤한 책상을 반듯하게 맞춘 후 내 자리에 앉는다. 이제 학부모에게 보낼 알림장을 쓸 시간.

사실 나는 아이들에게 매일 알림장을 공책에 손글씨로 쓰게 한다. 알림장을 부모에게만 알리면 아이들이 스스로 숙제와 준비물을 챙기지 않고 부모에게 계속 의지하는 습관을 갖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이 알림장을 쓰는데도 e알리미로 학부모에게 또 알림장을 보내는 이유는 추가되는 내용이 있기 때문. 학부모용 알림장에는 '교실 이야기'가 들어가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 매일 알림장을 공책에 손글씨로 쓰게 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매일 알림장을 공책에 손글씨로 쓰게 한다.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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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이야기는 그날 우리반 교실에서 이루어진 교육 활동과 교사로서 학부모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자세히 적은 것이다. 주간학습안내를 통해 그주에 배우게 되는 과목과 학습주제가 미리 안내되긴 하나 알림장에는 그보다 더 구체적으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고 익혔는지, 수업을 했을 때 아이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학교에서 지도하였으나 가정에서도 좀 더 살펴주시면 좋을 것 같은 내용 등을 쓴다.

이런 알림장을 쓰게 된 건 내 아이의 2학년 때 담임선생님 영향이 크다. 올해 4학년인 아이는 2학년 시절을 지금도 가끔 이야기하며 행복하게 기억하는데 부모인 나 또한 그렇다. 선생님께서는 매일 다정한 어투로 수업일지 같은 알림장을 써서 학부모에게 보내주셨다.

2학년은 아직 어리다 보니 부모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 놓고도 마음이 좀처럼 놓이지 않는다. 아이가 학교생활은 잘하는지 걱정되고, 학교에서는 무엇을 배웠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선생님이 날마다 교실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시니 아이의 학교생활이 눈에 보이듯 그려졌다. 한결 안심이 되고 선생님에 대한 신뢰도 굳건해졌다.

또한 알림장 덕분에 아이와의 대화가 더 풍부해지기도 했다. 전에는 아이에게 "오늘 학교 어땠어?"라고 물으면 "좋았어요"라고 단답형으로 말해버려 짧은 대화로 끝날 때가 많았다. 하지만 교실 이야기가 담긴 알림장을 읽고 나면 콕 집어 질문을 할 수 있었고, 아이는 쉽게 대답하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오늘 봄 시간에 라켓과 공 가지고 꿈 띄우기 활동했다면서, 어땠어?"
"좀 어렵긴 했는데 재밌었어요. 공을 머리보다 위까지 띄어야 하거든요. 전 10번까지 성공했어요."
"우와. 잘했다! 선생님이 재밌는 수업 준비해주셨네."
"선생님도 같이 도전했어요. 우리 꿈 응원한다고. 27번이나 하셨어요!"


선생님의 알림장이 좋았던 이유는 또 있다. 나는 워킹맘으로 늘 바쁘고 정신이 없어 아이를 잘 챙기지 못했다. 그래서 선생님이 알림장에 적어주시는 조언이나 강조사항을 중심에 두고 그것만이라도 충실히 따르려고 노력했더니 아이의 생활 태도나 학습 습관에 큰 도움을 받았다.

나도 교사이긴 하나 담임선생님만큼 내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교육전문가는 없다. 선생님의 꼼꼼한 알림장이 학교 교육과 가정 교육을 긴밀하게 연결해주었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좋은 점이 많았으나 내가 교사로서 실행에 옮기기엔 망설여졌다.

우선 내 수업 내용을 낱낱이 공개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매일 다른 누구도 아닌 학부모에게 짧지 않은 글을 쓰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게다가 수업 준비, 과제 검사, 업무 처리, 회의 참석 등 매일 아침 적는 투두리스트(To Do List)의 번호가 열 개도 넘는데 이것까지 하게 되면 너무 버거워지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됐다.

하지만 해보기로 했다. 이건 분명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거라 믿었기에. 막상 해보니 역시 쉽지 않다. 그날 수업한 내용을 천천히 복기하며 하나하나 써 내려가는데 학부모에게 어떤 내용을 어디까지 알려드리면 좋을지를 감이 잡히질 않아 썼다 지우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알림장 하나를 쓰는데 1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교실 이야기를 담은 알림장을 씁니다.
 교실 이야기를 담은 알림장을 씁니다.
ⓒ 진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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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서 이루어진 교육 활동과 교사로서 학부모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알림장에 자세히 씁니다.
 교실에서 이루어진 교육 활동과 교사로서 학부모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알림장에 자세히 씁니다.
ⓒ 진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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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학기 시작한 지 4주차. 여전히 학부모용 알림장을 쓰는 것이 하루의 큰 과제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조금씩 수월해져 쓰는 시간이 줄고 있다. 알림장을 쓸 때 내 나름의 원칙도 정했다. 미사여구를 사용하지 말고 최대한 담백하게 전달하기, 모든 걸 다 쓰려고 애쓰지 말고 기억이 나는 대로만 쓰기, 사진까지는 첨부하지 않기 등이다.

며칠 전 교사인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런 말들이 나왔다. 요즘은 학교에서 알림장을 보내도 알림장을 읽지 않는 학부모들이 그렇게나 많다는 것. 그러나 우리반은 열람 현황을 확인해보니 모든 학부모가 이제까지 쓴 알림장을 다 읽어주셨다.

2년 전의 나처럼 알림장을 보며 아이의 학교생활에 대해 조금 안심하게 되고, 아이와의 대화가 좀 더 늘어나고, 선생님의 조언을 나침반 삼아 도움을 받는 학부모가 계신다면 좋겠다.

태그:#알림장, #2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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