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고향을 생각하면 '서산마애삼존불상'이 떠오른다. 서산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이 대학, 직장, 군대와 같이 출가할 때면 친구들과 마지막에 들르는 곳이 서산마애삼존불상이다.

이후 서산마애삼존불상은 학창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읽은 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로 가슴에 남는다. 타지 생활하면서 힘들 때면 천년을 넘게 우직하고 다정하게 그 자리에 서 있는 큰 바위 얼굴(서산마애삼존불상)을 생각하며 용기와 인내를 얻곤 하였다. 1992년, 대학 진학으로 고향을 떠나오기 전에 처음 들렀던 서산마애삼존불상을 다시 찾았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상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상
ⓒ 최장문

관련사진보기

 
서산 나들목을 나와서 고풍 저수지를 돌아온 시각이 오전 11시, 서산마애삼존불상을 영접하였다. 이제는 보호각이 해체되어 자연의 공기와 햇빛, 바람을 자연스럽게 접하고 있는 삼존불상이 새로웠다.

2005년에 왔을 때는 삼존불 보호를 위해 누각을 씌워 관리하고 있었다. 보호각으로 인해 햇빛을 받은 삼존불의 미소를 볼 수 없게 되자 관리인 성원 할아버지는 대나무에 전깃불을 메달아 햇빛의 각도에 따라 미소가 바뀌는 것을 보여 주었었다.

"프랑스의 모나리자도 울고 가는 천년의 미소, 백제의 미소다. 모나리자는 미소가 하나지만, 삼존불 할아버지는 미소가 아침, 점심, 저녁마다 다르고 계절마다 다르다. 햇빛이 비치는 시간과 각도에 따라 다양한 미소와 느낌을 담고 있다"라고 자랑을 하던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서산마애삼존불 보호각(2005). 풍화방지로 1965년 설치되었다가 보호각 내부 암벽습기 등의 문제로 43년만에 완전히 철거되어 2007년부터 자연 햇빛을 통한 천년의 미소를 보게 되었다.
 서산마애삼존불 보호각(2005). 풍화방지로 1965년 설치되었다가 보호각 내부 암벽습기 등의 문제로 43년만에 완전히 철거되어 2007년부터 자연 햇빛을 통한 천년의 미소를 보게 되었다.
ⓒ 최장문

관련사진보기

국보 84호로 지정된 서산용현리마애삼존불이 대한민국에 대중화된 것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권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3년 '남도 답사 일번지'로 시작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가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1997년 3권을 출간하였다. 서산마애삼존불 사진이 표지 모델로 등장하고, 삼존불과 관련된 에피소드와 30여 년 간 서산마애불을 관리해온 성원 할아버지의 애절한 사연이 실려있다. 책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산마애삼존불이 역사학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59년이다. 숫자상으로는 64년 전이지만 실제로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과 같다. 6․25 전쟁이 끝난 지 불과 6년 밖에 안 되었고, 교통편이나 도로 사정이 아주 흉악하고 인적이 닿지 않는 심심산골이 많던 시절이다. 

부여박물관장을 지낸 홍사준 선생이 보원사터를 올 때마다 동네 사람들에게 바위에 부처님 새긴 것이나, 석탑이 무너진 것 등을 묻곤 했는데 어느 날 나이 많은 나무꾼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 산 중턱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바위에 새겨져 있유. 양 옆에 본 마누라와 작은 마누라도 있는데, 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 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 마누라가 장돌을 쥐고 집어던질 려고 하는 게 있슈."
- *출처: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권(서울: 창비,1997), 38.


위대한 발견의 순간이었다. 나무꾼의 해석은 당시만 해도 사회적으로 남아있던 처첩제도의 사회상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어느 전문가의 해석보다도 현실적이고 그럴듯한 해석이었다. 그런데 오늘 또 다른 해석을 들었다.

"아빠, 저 불상이야. 5천 원 불상. 크크크, 3천 원 말고 5천 원."

가족이 함께 왔는데, 초등학교 1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본존불의 손가락 모양을 보고 경험적 해석을 한 것이었다. 60년 전 나무꾼 아저씨 못지 않은 멋진 품평이었다.
 
초등학생이 생각하는 서산마애삼존불과 5천원
 초등학생이 생각하는 서산마애삼존불과 5천원
ⓒ 최장문

관련사진보기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다. 천년의 미소, 백제의 미소와 인사를 하고 나오다 보면 관리사무소 못 미쳐 작은 석불이 하나 있었다. 우리 같은 소시민의 소원을 들어주는 불상 같아서 특히 좋아했었다. 보원사지에 있었던 석조비로자나불 좌상을 이곳에 옮겨다 놓았던 것인데, 2005년에 분실되어 지금은 받침대만 남아 있었다.
 
서산마애삼존불 입구에 있었던 보원사지 석조비로자나불(2005). 2005년 3월 분실되었다.
 서산마애삼존불 입구에 있었던 보원사지 석조비로자나불(2005). 2005년 3월 분실되었다.
ⓒ 최장문

관련사진보기

 
오후 4시, 보원사지에서 반나절을 보내고 다시 서산마애삼존불을 찾았다. 늦은 오후 햇살에 비친 천년의 미소가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삼존불은 오늘 모든 것을 내어주지 않았다. 해는 이미 삼존불상 어깨를 넘어가 등 뒤를 비추고 있었다. 고향에 올 때 또 한번 오라는 삼존불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삼존불 본존불에서 보는 어머니
 삼존불 본존불에서 보는 어머니
ⓒ 최장문

관련사진보기


이제 삼존불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돌아선다. 계단을 내려오며 어머니를 보듯이 다시 돌아 보았다.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근심하지 마. 오지 않은 미래 걱정하지 말구. 오늘 잘살아. 몸만 건강하면 돼. 오늘은 선물이여. 그래서 서양 놈들도 Present(오늘)라고 하는겨."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서산시청 시민리포터>에도 송부되었습니다.


태그:#서산마애삼존불,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 #백제의 미소, #천년의 미소, #최장문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가 세월속에서 문화의 무늬가 되고, 내 주변 어딘가에 저만치 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아름답다고 했는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