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31대 국왕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은 한국사의 수많은 군주중에서도 가장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고려의 마지막 개혁군주에서, 노국대장공주와의 애틋한 로맨스와 비극적인 결말까지 공민왕의 인생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22일 방송된 tvN스토리 역사강연 <벌거벗은 한국사> 48회는 '개혁군주 공민왕은 왜 원나라 공주와 사랑에 빠졌나'편을 통하여 공민왕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1330년 5월 6일, 공민왕은 고려의 27대왕 충숙왕과 명덕태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공민왕의 본명은 왕기이고, 즉위 이전 왕자로서의 호칭은 강릉대군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형 충혜왕이 즉위하고 2년 뒤인 1341년, 열두 살의 나이에 원나라로 불려가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됐다. 당시는 '원 간섭기'로 고려는 여몽전쟁 이후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상태였다. 고려의 왕족인 공민왕은 케식(kesik,숙위)으로 발탁되어 원나라 황실의 친위대 역할을 하게 됐다.
 
그런데 고려조정에서는 당시 케식 생활을 하던 공민왕을 '대원자(大元子)'로 불렀다. 세자에 아직 책봉되지않은 임금의 맏아들, 즉 차기 국왕이 될 후계자를 뜻하는 표현이다. 이는 왕의 동생인 공민왕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지만, 당시는 원나라 황실과의 관계가 왕위 계승에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고 고려에서는 공민왕을 유력한 왕위 후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공민왕이 고려의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1344년 형 충혜왕이 폭정을 저지르다가 원나라에 의하여 폐위당했지만, 원나라 왕비인 덕녕공주의 아들로 몽골 핏줄을 이어받은 충목왕이 즉위했고, 그가 요절하자 이번에는 친원세력의 지지를 받던 충정왕이 연이어 공민왕을 제치고 왕위를 계승했다.
 
공민왕이 정치적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하여 내린 선택은 바로 원나라 황실과의 혼인이었다. 1349년 10월, 20세의 공민왕은 원나라 황궁에서 결혼식을 올리니, 아내가 바로 원나라 황제와의 육촌 지간이었던 보탑실리, 훗날 고려의 왕비가 되는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였다. 이 정략결혼을 통하여 공민왕은 원나라 황실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얻게 된다.
 
2년뒤인 1351년, 고려에서는 14세의 충정왕이 또다시 원나라에 의하여 갑자기 폐위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충정왕은 국왕이었지만 정작 큰 실권도 실정도 없었고, 원나라 역시 뚜렷한 폐위의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가들은 그 배후에 공민왕이 있는게 아니냐는 의견도 나온다. 실제로 충정왕 폐위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된 것은, 그 뒤를 이어 마침내 고려의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 공민왕이었기 때문이다.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케식생활 10년만에 꿈에 그리던 고려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고향을 떠나 남편을 따라 머나먼 이국으로 향하게된 노국공주의 심경은 복잡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그동안 고려 왕과 혼인을 했던 원나라 공주들의 운명은 막장드라마의 연속이라고 할만큼 대부분 평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충렬왕의 왕비인 제국대장공주는 괄괄한 성격으로 국왕인 남편에게 욕을 하고 손찌검을 했던 일화가 있었다. 충선왕의 계국대장공주도 남편과의 금슬이 좋지 못했고 몇차례나 개가 소동에 휘말렸으며, 심지어 충숙왕의 계비였던 경화공주는 의붓아들인 충혜왕에게 겁탈당하는 충격적인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정략결혼이라는 관계로 출발했음에도 부부간의 금슬은 매우 좋았다. 이는 역대 고려왕-원나라 공주의 혼인관계에서는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둘다 문화예술적인 감성과 소양이 깊다는 점에서 서로 성향이 잘 맞았다. 또한 공민왕은 생전 노국공주 외에 다른 여자에게는 아예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공민왕은 고려로 돌아오자마자 놀라운 본색을 드러낸다. 공민왕은 몽골식 호복을 벗어던지고 변발도 폐지했다. 원의 풍습을 보리고 고려의 전통을 회복하겠다는 정치적 메시지였다. 원나라에서 오랫동안 생활했고 원의 공주까지 아내로 맞이한만큼 당연히 친원 행보를 보일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는 결과였다.
 
1356년 공민왕은 마침내 조정내 친원세력을 숙청하고 쌍성총관부를 함락시키며 여몽전쟁때 상실한 동북면의 수복에 성공했다.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겠다는 공민왕의 확고한 의지였다. 그리고 이는 치밀한 사전 준비와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판단에서 나온 성과이기도 했다. 당시 원은 홍건적의 난 등 농민봉기와 내부혼란으로 고려에 군사를 파견할 여력이 없었다.

노국공주는 모국인 원나라와 남편의 고려 사이에서 일생일대의 선택의 기로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노국공주는 남편이 가는 길을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않고 묵묵히 지지해줬다. 그녀는 더 이상 원의 공주가 아닌, 고려의 왕비가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이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공민왕은 왕위에 오른 지 9년이 되도록 후사가 없었다. 원나라 출신에다가 후사를 낳지못한 노국공주의 정치적 위치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왕권의 안정을 위하여 후계자를 고민해야했던 신하들은, 노국공주를 찾아가 공민왕에게 새 아내를 맞이할 것을 요구했다. 공민왕 부부는 어쩔 수 없이 신하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남편을 설득하여 신하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노국공주는 얼마 지나지않아 후회하며 식음을 전폐할만큼 힘들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공민왕은 결국 후비들에게서도 자식을 얻지 못했고 노국공주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오히려 부부간의 사이는 더욱 애틋해졌다.

공민왕의 재위 기간은 생애 수많은 국난과 암살 위협 등의 연속이었다. 1361년에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고려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며 공민왕 부부는 급히 수도 개경을 떠나 피난길에 올라야했다. 고려군이 사투 끝에 홍건적을 몰아내고 개경을 수복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수도로 돌아오던 공민왕 일행이 흥왕사에서 측근이었던 김용의 쿠데타 시도로 암살 위기에 처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노국공주는 남편 공민왕을 밀실로 피신시키고 괴한들의 앞을 몸으로 막아서는 용기를 발휘했다. 친원을 명분으로 했던 김용 일파는 차마 노국공주를 해칠 수 없었고 덕분에 공민왕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 다행히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이 흥왕사 경내로 들어와 김용의 반란군을 토벌하면서 반란은 평정되었다. 원나라에 맞선 공민왕을 상대로 원나라 사람 노국공주가 몇 번이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원나라는 1363년에는 눈에 가시인 공민왕을 제거하기 위하여 고려 왕족인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고 대군을 보내 고려를 침략한다. 하지만 공민왕은 이마저도 격퇴하며 왕권과 고려의 자주성을 더욱 확고하게 다졌다. 그리고 노국공주는 그런 공민왕의 든든한 정치적 동반자이자 수호자로서 모든 순간을 함께하며 아내 이상의 역할을 해냈다.
 
1364년, 수많은 환란을 함께 헤쳐온 공민왕 부부에게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이 전해진다. 바로 결혼 15년 만에 선물처럼 찾아온 노국공주의 임신 소식이었다. 공주가 아들을 낳는다면 공민왕에게는 든든한 후계자까지 생기게 되는 것이었다. 원나라의 위협과 내우외환속에서 공민왕 부부는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며 새로운 삶의 이유를 찾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듬해인 1365년, 부부의 희망을 무참히 깨뜨리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극심한 난산에 시달리던 노국공주가 산통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나게 된 것. 인생 최대의 행복이 되어야할 날에 공민왕은 오히려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아내를 잃은 공민왕은 슬픔에 빠져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고공민왕은 노국대장의 사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고려의 중흥을 이끌겠다는 개혁군주로서의 모습은 사라져버렸고, 무능하고 무기력한 암군이 그 자리를 채웠다. 공민왕은 노국공주를 기리기 위하여 거대한 무덤과 영전을 만드느라 국고를 탕진했고 노역을 동원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생전 공민왕은 죽어서도 노국공주와 같은 자리에 묻히고 싶다고 항상 신신당부했고, 실제로 700년이 지난 지금도 두 사람의 무덤은 나란히 이웃한 현릉과 정릉에 나란히 안장되어있다. 무덤에는 구멍이 하나씩 뜷려있는데 이는 영혼들이 서로 만나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이는 고려시대 무덤 중 유일한 쌍릉이며,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진심어린 사랑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불린다.
 
하지만 공민왕의 노국공주에 대한 그리움은 점차 이상행동으로까지 변해갔다.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식사를 할때도 혼자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노국공주가 세상을 떠나고 8년이 지났지만 공민왕은 후비들도 멀리하며 여전히 후사를 얻지못했다. 태후가 이를 걱정하자 공민왕은 "노국공주만한 여인이 없습니다"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노국공주 사후, 공민왕은 '자제위'라는 측급 집단을 만들어 자신의 경호를 맡겼다. '고려사'에는 공민왕이 어리고 예쁜 용모를 지닌 미소년들을 선발하여 난잡한 행위를 즐겼다고 기록하며 자제위의 숨겨진 역할이 따로 있었다고 폭로했다.
 
심지어 공민왕은 후사에 대한 부담 때문에 자제위 소년들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아내들과 동침하여 아이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익비가 자제위 홍륜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공민왕은 홍륜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모조리 죽여서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면서 공민왕은 오히려 역습을 당했다.
 
1374년 9월 21일, 공민왕은 자신의 처소에서 홍륜 일당에게 습격을 당하며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고려의 마지막 희망으로 불리우며 한 시대를 풍미한 군주의 비참하고도 허무한 결말이었다. 다만 이 기록이 집필된 '고려사'는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 왕조에서 만든 기록이기에 신빙성에 의문이 가는 내용들도 다수 존재한다. 공민왕이 정말로 자제위를 통하여 비정상적인 방법까지 불사하며 후사를 보려고 했는지는 미지수지만, 그만큼 노국공주 사후 의지할 데 없이 정신적으로 고립된 공민왕의 절박한 처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도 하다.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은 이후 슬픔이 지나쳐 뜻을 잃어버렸다." 사관이 공민왕에 대하여 남긴 평이다. 그만큼 공민왕의 일생에서 정치적으로나 한 인간으로서나 노국공주가 남긴 영향력이 막대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원나라에 맞서서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려고했던 공민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곁을 지키며 고려와 운명을 함께하려고 했던 노국공주의 사랑은 세월을 지난 지금까지 죽음도 갈라놓지못한 '세기의 로맨스'로 역사에 남았다.
벌거벗은한국사 공민왕 노국공주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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