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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복잡하다. 한국인은 어려서부터 효심을 배운다. 음력 4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에는 절에 가서 연등을 밝히고, 양력 12월 25일에는 교회에 가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송을 한다. 우리 집도 참 복잡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스님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목탁을 두드리며 모친의 극락왕생을 빌었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목사님이 찬송을 부르면서 어머니의 천당행을 기도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형제들은 마침내 제례를 올렸다.

"당신의 종교는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버지가 따르던 유교와 어머니가 믿던 기독교와 장형이 귀의한 불교가 나의 종교입니다"라고 나는 말한다. 한 사람의 가슴에 공자와 석가와 예수가 공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편하지 않다. 민태원이 지은 <청춘 예찬>의 영향이었을까? "석가(釋迦)는 무엇을 위하여 설산(雪山)에서 고행(苦行)을 하였으며, 예수는 무엇을 위하여 광야(曠野)에서 방황하였으며, 공자는 무엇을 위하여 천하를 철환(轍環)하였는가?"

서양인이 보기엔 이해하기 힘든 일이겠으나, 이 이질적 사상의 공존에 대해 한국인들은 낯설어하지 않는다. 작고한 신영복 선생도 '기천불(基天佛), 떡 신자'라는 우스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면 기독교, 천주교 신자가 늘고 초파일이 가까워오면 불교 신도가 늡니다. 특별한 때에만 집회에 나오는 신자를 '떡 신자' 또는 '기천불' 종합신자라 부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한국인은 정치이념에 있어서도 복잡하다. 한국인은 민족주의자이다. 김구 때문일까?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는 구절을 나는 지금도 즐거이 암송한다. 서유석의 '홀로 아리랑'을 부르면 절로 눈물이 나는 까닭은 무엇이냐?

한국인은 평등을 좋아한다. 어떤 이유로든 내가 남에게 차별받는 것을 참지 못한다. 어려서 <홍길동전>을 읽은 탓일까? 한국인은 신분에 따른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차별을 받지 않는다"라는 평등권(11조 1항) 조항을 새겨 넣은 대한민국 헌법은 훌륭한 헌법이다. 초등학교 동창회에 가면 누구나 평등한 지위를 누린다. '한 번 반장은 영원한 반장'인 것까지야 쉽게 인정하지만, 철수의 아버지가 양반이었다고, 뼈대 있는 집안의 자식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은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인은 반공주의자이다. 그렇게 세뇌를 당해 버렸다. 이승복이가 "공산당은 싫어요"라고 절규하며 죽었단다. "구름도 망설이는 은둔령 고개"에서 말이다. 우리는 "공산당을 쳐부수자! 이 연사 외칩니다."라고 웅변하였다.

3.1운동이 남긴 두 조직이 있었다. 하나는 그해 4월 상해에서 결성된 '임시정부'이다. 임시정부는 취약하였다. 1923년 임시정부를 갈아엎어 혁명운동조직으로 만들자는 창조파와 임시정부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나가자는 개조파로 나뉘어 논란을 거듭했으나 아무 결정도 못 내리고 흩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우리의 역사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삼권분립의 원칙에 입각한 민주공화정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안동의 청년들이 만든 조선공산당

3.1운동이 남긴 또 하나의 조직이 있었다. 그 조직은 1925년 4월 17일 서울 한복판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이다. 누가 만들었나? 조선공산당은 안동의 청년들이 주도하여 만들었다. 안동의 청년들이라고? 그렇다. 안동의 김재봉, 이준태, 권오설이 부안의 김철수와 함께 만든 정당이 조선공산당이었다. 1926년의 6·10만세운동, 1927년의 신간회, 1929년의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모두 조선공산당의 작품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생각만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반공애국투사 김문수류의 인사들에게 권하고 싶다.

"조선공산당의 선배들을 범죄인으로 취급하려면, 일제의 군홧발 밑에 무릎을 꿇은 이광수와 최남선, 노천명과 서정주와 같은 이들의 부끄러운 이야기만 남기고,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길 바랬던 김재봉과 권오설, 장석천과 장재성과 같은 분들의 위대한 이야기를 역사에서 모두 지우라."

머리 아픈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 김재봉 선생은 어려서부터 사서삼경을 암송하며 자란 선비였다. 감옥에서 <맹자>와 <시경>을 독서하였고, 한문으로 편지를 쓴 분이었으며, 한문으로 시를 짓고 암송한 분이었다. 김철수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일본 판사의 심문 앞에서 마르크스도 레닌도 아닌 "서당 훈장님"이라고 밝힌 이가 김철수였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있는 김재봉의 어록비. 김재봉 생가인 안동 학암고택 앞에 세워져 있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있는 김재봉의 어록비. 김재봉 생가인 안동 학암고택 앞에 세워져 있다.
ⓒ 안동독립운동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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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시인의 서재에는 김철수 선생이 남긴 붓글씨 한 점이 걸려 있다. "종신토록 실천할 가치가 있는 한마디 말은 무엇입니까?"라고 자공이 묻자 공자는 답했다. "그것은 서(恕)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子曰: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논어> 위령공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일제강점기에 고초를 겪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높은 인격을 갖춘 분들이었다.

공자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선배들은 어떻게 해석했을까? 선배들은 수신제가를 수신작당(作黨)으로 해석하지 않았을까? 우스개로 이야기한다. 젊은 시절 우리가 그랬다.

선배들은 왜 조선공산당이라는 이름을 선택했을까? 선배들이 이루고자 하였던 치국(治國)의 꿈은 '조선(Korea)의 독립'이었다. 선배들이 실현하고자 했던 평천하(平天下)의 꿈은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공동체(commune)'였다. 별것 아니다. 독립과 평등의 꿈을 아로새긴 이름이 조선공산당이었다. 'Communist Party of Korea' 말이다.

선배들이 입으로 외친 것은 분명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념이었으나, 그들이 이루고자 한 것은 공자의 대동 사회였다. "계급과 계급 대립으로 얼룩진 낡은 사회 대신에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공동체(commune)"를 만들자며 마르크스는 이야기를 어렵게 했는데, 선배들은 이 어려운 이야기를 아주 쉽게 받아들였다. 어려서부터 서당의 훈장으로부터 익히 배웠기 때문이다.

"​큰 도가 행해지면 천하가 공평해진다. 홀아비와 홀어미, 고아와 독거노인, 의지할 데 없는 사람, 병든 사람 모두가 봉양을 받는다. 이를 이르러 대동(Great commune)이라 한다."(<예기>)

사단법인 인문연구원 동고송 상임이사 황광우

태그:#조선공산당, #김재봉, #권오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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