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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2년간 한자와 서예를 가르치는 학원을 다녔다. 정식 학원은 아니었고 집에서 하는 공부방 같은 곳이었는데 선생님이 꼼꼼하시고 아이들을 잘 봐주셔서 언제나 정원이 꽉 차던 곳. 미리 연락도 안 하고 무작정 찾아가 등록을 희망했는데 마침 오늘 이사 나간 아이가 있어 등록이 가능했던 걸로 기억이 난다.

당시 서예와 한자는 슬슬 사양학원(?) 쪽으로 접어드는 추세였다. 컴퓨터 학원이 생기고, 영어 학원이 싹을 틔우려 준비하던 시기. 서예와 한자는 조금 고리타분하거나 아니면 정말 산만한 애들이 차분해지라고 다니는 학원 이미지가 조금 있었다. 참고로 옷에 먹물이 튀는 것이 싫으면 차분해야 하긴하다.

나는 붓글씨를 쓰며 먹물을 소매에 잔뜩 바르고 집에 오기 일쑤였는데 엄마가 그런 걸로 화낸 기억이 없다. 참으로 대단하신 엄마이시다. 나는 지금 애들이 급식을 먹으며 짜장이나 카레만 묻혀와도 짜증이 나는데 말이다. 여하튼, 그렇게 시작한 서예에서 나름의 끈기와 열성으로 글씨를 작게, 예쁘게, 한 장 가득 빼곡하게 쓸 수 있는 수준에 까지 이르렀다.
 
친정에서 찾아낸 유물, 초등학생의 솜씨 치고 굉장히 우수하다.
▲ 나의 솜씨  친정에서 찾아낸 유물, 초등학생의 솜씨 치고 굉장히 우수하다.
ⓒ 한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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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은 앉아 있는 것, 차분하게, 너무 느리면 먹이 번지고 빨리 쓰다 보면 글씨가 예쁘지 않으니 적당히 천천히 써 내려 가는 법을 배우는 것. 아니, 스스로 터득하는 것은 물론 힘이 들었다. 그 중 가장 힘들었던 건 한 글자, 두 글자, 세 글자 정도를 쓰다가 맘에 안 드는 점, 획이 나오면 이번 장은 망했구나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일단 마음이 흔들리니 예쁜 글씨가 써지지 않았고, 글씨가 예쁘게 써져도 이미 틀린 글씨만 보였으며 그러다 결국 구겨 버려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쓰게 되는 그 마음이 제일 힘들었다.

끝까지 예쁘게 안 틀리고 해냈을 때의 기쁨은 어쩌다 한 번이었고 대부분 이번 장은 망했구나 하는 마음과의 싸움이었으니, 열 살, 열한 살 꼬마였던 나의 인생 최대의 고비, 살얼음 위를 살살 걷는 마음으로 평안하기보다 불안한 마음으로 글씨를 쓸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 쓰다 보니 어느덧 도를 아는 순간이 왔다. 조금 틀린 것 같은 점, 맘에 안 들게 뻗은 획, 비뚤게 느껴지는 선들을 꾹 참고 한 글자 한 글자 끝까지 써서 완성만 하면 일단 작품이 된 다는 것, 한 글자의 작은 부분들보다 전체의 조화, 균형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더 큰 요소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후로는 작은 실수들에 연연하지 않고 진정한 평정심으로 끝까지 쓸 수 있게 되었다. 불안을 떨치고, 평안하게 끝까지 마무리 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다. 그 무렵부터 노트 필기가 마음에 안 들어졌다고 공책을 부욱 뜯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쓰는 고약한 심보도 고쳤다.

서예 학원을 다녔다고 나의 덤벙거리는 타고난 성격이 고쳐진 건 아니지만, 그런 도를 깨쳤다는 건, 인생을 살아가는데 좋은 영향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그때 배운 한자로 어휘력도 늘었고,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한문 과목 시험을 벼락치기로 준비할 수 있었고, 더 나중에는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큰 아이는 다섯 살에 종이 접기에 입문을 했다. 처음엔 간단한 여우 접기, 밤 접기여서 같이 접고 접어 주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여섯 살이 되어 종이 팽이 접기를 시작하면서 아이의 종이접기는 물줄기가 달라졌다. 아이 키우는 엄마들이라면 많이들 익숙할 만한 네모아저씨라는 유튜브 채널을 보며 팽이 접기를 하는데 난이도가 여섯 살 아이에게는 너무 어려워 접어줄 수밖에 없었다.
 
색종이 세 장의 마법
▲ 종이팽이  색종이 세 장의 마법
ⓒ 한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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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스스로 해 보겠다며 고사리 손으로 팽이를 접기 시작했는데, 어려움에 좌절하면서도 성실히 배우더니 색종이 세 장으로 접는 종이 팽이의 원리도 이해했다. 그리고는 이내 자기의 팽이가 예쁘지 않은 것, 비뚠 모양이 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눈에 쌍심지를 켜고 연습을 했다. 그러더니 기어이 꼼꼼하게, 예쁘게 마스터했다. 정말 기특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아주 미세하게 조금씩 엇나가는 부분이 있을 때마다 실패했다고, 망쳤다고 짜증을 부리기 일쑤였고 분에 못 이겨 울 때도 있었다. 도대체 어디가 틀린 거냐고 물어보면 끝 모서리가 조금 삐뚤어져 있거나, 모서리 부분이 조금 찢어진 정도, 그 짜증을 받아내야 하는 나는 도대체 무슨 죄인가. 그런데 이 모습, 어디서 많이 봤다 싶더라니 내가 붓글씨를 쓰며 작은 것 하나에 집착을 하던 그 모습과 너무 닮았다.

뒷골 당기는 아이의 떼부림을 참아줘야 할 이유가 생겨버린 것이다.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아는 나이고, 어쩌면 나를 빼닮아 이 아이가 이러는 것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아이가 실패했다고 짜증을 부리는 그 색종이들을 주섬 주섬 주워 들어 내가 팽이를 접어 완성해 주었다. 조금 틀어져도 완전한 작품이 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음을 내 손으로 천천히 옆에서 보여 준 것이다.

모서리가 찢어진 것은 어차피 마지막엔 가려져서 안 보이고, 조금 비뚤게 접어진 것도 완성된 팽이에선 하나도 티가 안 난다고. 몇 번이나 실패했다 내던진 색종이를 들고 팽이를 접어 완성해 주니 아이도 엄마의 뜻을 이해한 듯 하였다. 그러더니 정말 무서운 속도로 팽이 접기를 마스터하였다.

나중엔 완성된 팽이 몇 개를 모아 돌려 보며 도는 모양을 보고 최종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보기엔 다 똑같은 것 같은데 팽이마다 균형감, 손잡이의 모양 등으로 도는 모양새가 다 다르다고 한다.

맘에 드는 것을 고르고 나머지는 동생에게 하사하기도 하고 정리 좀 하자는 엄마의 요청을 받아들여 하루 이틀 지난 것들은 쓰레기통에 선뜻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팽이 접기의 과정을 이겨낸 평정심의 영향이 컸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아의의 평정심은 나의 흰머리, 주름과 맞바꾼 결과물이라 그러는 동안 나는 한 소끔 더 늙었다.

최근에 인터넷 영상에서 한 일타강사가 한 말이 기억이 나는데 단언컨대, 여러분이 살아갈 세상은 열심히 하면 성공하기 쉬운 세상이 될 것이라는 요지의 말이었다. 그 말의 근거는 열심히, 끝까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내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든다고, 포기가 빠른 세상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 세상에서 끝까지 열심히 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냐는, 아이들을 북돋는 명언이었다. 팽이 접기를  끝끝내 마스터하는 아이를 보며 단순한 종이접기가 아니라 끝까지 해보는 경험, 종국엔 해내는 기쁨을 누리는 경험이 이 아이를 성장시킬 것이라고 확신했다. 
 
마트에서 파는 플라스틱 장난감보다 종이 팽이가 훨씬 낫다. 경제적으로 환경적으로.
▲ DIY 장난감  마트에서 파는 플라스틱 장난감보다 종이 팽이가 훨씬 낫다. 경제적으로 환경적으로.
ⓒ 한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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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팽이 접기가 잠잠 하더니 네모아저씨의 팽이 접기 책 제5권 마스터십을 구입하여 다시 어려운 팽이 접기를 하는 중이다. 이번 책은 마스터십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정말 어렵다. 모서리마다 뾰족하게 각이 잡혀야 멋진 팽이인데 나의 둔한 손으로는 그렇게 뾰족하고 작은 각을 맞추기가 정말 어렵다.

아이에게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처음 팽이 접기를 할 때처럼 조금 접다가 실패했다고, 망쳤다고 짜증을 부리지 않는다. 정말 접다가 완전히 찢어져서 못 쓰게 되는 경우를 빼고는 웬만하면 끝까지 접어는 본다. 접다가 안 되는 것은 물어보기도 하고, 일단 접으며 익히고, 익힌 걸 바탕으로 새 색종이를 갖다가 다시 접어보니 5권에 있는 어려운 팽이들 제법 접을 줄 알게 되었다. 

팽이를 잘 접는 것도 기특하지만,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진 것이 더 기특하다. 팽이 접기 책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나는 눈이 침침해서 머리가 아파지는데 아이의 골똘한 눈빛은 더 빛이 난다. 여섯 살 꼬마에서 이젠 어엿한 1학년 형아가 되어 당연히 더 자랐겠지만, 팽이 접는 아이를 보며 엄마는 또 한 번 아이의 성장을 느낀다. 부럽다. 자람. 잘 함.

태그:#종이접기 , #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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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둘을 키우고 있습니다. 아이 교육과 독서, 집밥, 육아에 관한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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