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라틴아메리카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쩌다 중남미 여행을 하게 된 세 명의 활동가가 현지 활동가들과 교류하며 인터뷰한 기록을 연재하는 코너입니다. 대학 교지에서 만난 셋은 서른을 앞두고 각각 퇴사와 휴직을 했습니다. 서른의 여행이면 조금은 도전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여 중남미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운동을 지속할 것인지 고민을 품은 채 떠난 여행이었기에, 지구 반대편의 활동가들은 어떤 생각으로 운동을 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지역도, 인종도, 계절도 완전히 다른 나라의 활동가들을 통해 관점의 전환과 색다른 해법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습니다.

인터뷰 주제와 대상은 방문국가의 최근 현안이거나 전환점인 이슈이면서도, 젠더·노동·보건이라는 우리의 활동의제와 연결되어 한국적 맥락에서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를 고려해 선정했습니다. 네 번의 인터뷰는 그들의 열정과 에너지를 충만히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분명 한국적 맥락에서 함께 고민해볼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그 기록들을 한국의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기자말]
한국에서 1만6000km 떨어진 페루의 정치적 갈등 상황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드물다. 대다수 한국 여행자들이 남미 여행코스의 첫 번째 루트로 삼는 페루이지만, 직항도 없을 정도다. 

페루 방문의 목적은 단 하나, 마추픽추였다. 대규모 시위 때문에 마추픽추가 있는 도시 쿠스코에 가기 어렵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금방 해결될 것이라고 여겼다. 한국 언론에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바꾸려고 한 대통령이 탄핵되자 이를 반대하는 지역에서 시위를 주도한다는 짤막한 기사만 있을 뿐이었다. 

시위 도중 경찰에 의해 사망한 사람이 수십 명이 되고, 결국 마추픽추가 폐쇄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고 했을 때는 당혹스러웠다. 독재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수 있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다. 

급하게 여행경로를 바꿔 비교적 안전하다는 페루의 수도 리마로 향했다. 시위대가 총에 맞아 죽고 있는 다른 지역과 같은 나라라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리마는 조용했다. 부자 동네라고 불리는 리마의 미라플로레스 광장을 산책하다가 들리는 노래소리를 따라가니 사람들이 둥그런 원을 그리고 모여 있었다. 
 
1월 27일 리마 미라플로레스 광장에서 벌어진 예술가들의 시위.
 1월 27일 리마 미라플로레스 광장에서 벌어진 예술가들의 시위.
ⓒ 안태진

관련사진보기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라는 구호를 손으로 적은 플래카드와 촛불이 바닥에 놓여 있었고, 광장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발언자가 한 명씩 나와서 소리 높여 이야기하다가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불렀다.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발언과 공연 순서가 명확히 구분된 한국의 집회 문화와 달라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지켜봤다. 

번역기만으로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아 집회가 끝나고 사회자를 찾아가 말을 걸었다. 시간이 늦어 다음날 만나서 이야기 나눌 수 있겠냐는 물음에 그녀는 흔쾌히 알겠다며 연락처를 알려줬다. 2023년 1월 28일, 리마 미라플로레스 광장 근처 숙소 게스트하우스 거실에서 독립활동가 아드리아나를 만났다. 

"많은 토착민들이 다치고 죽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안하게 대화 나누면 좋겠어요. 저는 한국에서 온 안태진, 이재정이라고 합니다.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인권과 여성의 권리 향상을 위해 활동하는 독립운동가 아드리아나 세미안리오(Adriana Semianrio)입니다. 저는 10년 동안 독립 운동가로 활동하면서 취약한 상황에 처한 여성들, LGBT와 함께 일했습니다."

- 어제(1월 27일) 미라플로레스 광장을 지나가다 우연히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예술가들의 공연과 발언이 중심이 되어서 인상적이었는데요. 시위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저는 뮤지컬, 콘서트 같은 이벤트 음악 프로듀서로 일했습니다. 어제 공연한 아티스트들도 거기에서 만났습니다. 우리는 지난 두 달간 이런 시위를 조직했습니다.  경찰과 정부는 두 달 전부터 무차별적으로 무력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까지 경찰의 직간접적인 폭력의 결과로 6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시위대의 주장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생명은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권리입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시위를 조직하게 됐습니다."

- 시위가 크게 일어나고 있는 지역은 어디인가요? 주로 어떤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나요?

"수도 리마와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시위가 크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토착민들이 다치고 죽었습니다. 현재 시위로 인해 100개 이상의 도로가 차단됐고 마추픽추의 관광이 마비됐습니다. 예를 들어 푸노(puno), 쿠스코(cusco)같은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경찰과 국가가 무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 그들의 주된 요구는 무엇인가요?

"현재 페루는 페드로 카스티요(José Pedro Castillo Terrones) 전 대통령의 탄핵을 계기로 사회적 갈등이 폭발한 상황입니다. 이러한 시위에 직면한 정부는 시위대를 통제하기 위해 과도한 폭력과 탄압으로 대응했습니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증가하자 사람들은 폭력 중단과, 현 대통령 디나 볼루아르테(Dina Ercilia Boluarte Zegarra)의 퇴진을 더 거세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리마로 왔습니다. 그들은 리마에서 정부의 입장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셀프 쿠데타' 이후 페루에서 벌어진 일
 
1월 28일 리마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의 인터뷰 중.
 1월 28일 리마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의 인터뷰 중.
ⓒ 안태진

관련사진보기

 
2022년 12월 7일 카스티요 전 대통령은 국영 TV에 출연해 의해를 해산하고 비상국가체제로 전환하며, 신헌법논의 기구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자신의 측근을 비롯해 군대, 경찰, 사법부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몇시간 만에 망명을 위해 멕시코 대사관으로 가던 중 체포됐다. 법무부장관은 카스티요를 기소했고, 의회는 그를 해임한 뒤 당시 볼루아르테 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 투표했다.

리마 법원은 카스티요를 18개월동안 보석없이 구금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지난 9일 페루 대법원은 정부 내 부패 행위에 깊숙이 관여한 혐의 등을 받는 카스티요 전 대통령에게 36개월간의 예방적 구금 명령을 내려 카스티요 전 대통령의 구금 기간은 더 늘어났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페루 옴부즈맨 사무소는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 속에 시민과 보안군 간 충돌로 지금까지 60여 명이 숨졌다고 전했다.

- 시위는 리마 남부 푸노출신인 전 대통령 카스티요의 탄핵에 반발해 발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시위가 크게 일어난 지역 사람들의 지지로 당선됐었는데요. 의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카스티요의 '셀프 쿠테타' 이후 의회에 대한 지지도는 매우 낮습니다. 더불어 국민의 70% 이상이 디나 볼루아르테 현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디나 볼루아르테는 카스티요와 러닝메이트였지만, 탄핵에 동의하고 새로운 대통령이 됐습니다. 대통령이 공석이 된 후 책임 없이 그냥 자리를 이어받는 것은 안 됩니다.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선거를 (2026년에서) 2023년으로 앞당기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시위대들이 요구하는 것은 즉각적인 대통령의 사임, 의회의 사퇴, 새로운 선거입니다. 볼루아르테는 이 죽음과 살인에 정치적 책임이 있습니다. 의회도 함께 책임을 져야 합니다."

- 말씀하신 푸노나 마추픽추 인근의 쿠스코 지역은 도로가 차단될 정도로 시위가 거센데, 리마는 상대적으로 안정돼 보입니다. 외신에 따르면 현재의 갈등이 도시와 농촌간의 갈등이라는 시각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페루는 상당히 수도 집중적인 국가입니다. 리마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중요하지 않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어제 우리는 미라플로레스 같은 중앙 공간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도시와 농촌간의 갈등'이라는 말은 유감이지만, 가장 큰 도시 리마가 사람들의 고통과 요청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상황은 맞습니다. 시위는 자신의 목소리를 알리기 위해 올라온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지만, 일부 리마 사람들은 시위대에게 머물 곳을 제공하고, 의복과 생필품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 농촌 사람들이 이렇게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이 사태를 해결하는데 가장 우선시돼야 하는 것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그들이 가족과 직장을 떠나서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은 이 상황이 페루에서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갈등의 연장선이기 때문입니다. 페루에는 비수도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의 문제가 누적돼 있습니다. 예를 들어 푸노는 역사적으로 광물 자원이 있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착취당했습니다. 미국과 국제사회는 푸노에 있다는 리튬에만 관심이 있지, 그곳에 사는 토착민의 상황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티티카카 호수로 유명한 페루의 푸노는 식민지시절부터 '은' 생산지로 유명했고, 현재도 금과 주석 등의 광산이 있다. 버려진 광산과 관리되지 않은 폐기물의 영향으로 땅과 호수는 오염됐고, 인구의 58%에 해당하는 71만 명 이상이 중금속과 기타 화학 물질에 노출돼 있다. 

최근에는 캐나다 회사에 의해 푸노 지역에 거대한 리튬 광산이 발견됐고, 인근 지역에서 우라늄도 확인됐다. 배터리의 원료인 리튬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받는 캐나다와 미국의 기업들이 사업에 적극적으로 합류하고 있다. 페루의 좌파 정당은 에너지 주권을 강조하며 국유화를 주장하고, 환경단체들은 리튬 광산의 개발로 벌어질 토양과 토착민의 피해를 주목하고 있다.

"뻔뻔한 방식으로 대통령이 되는 건 옳지 않다"

- 이 사태를 해결하는 데 가장 우선시돼야 하는 건 무엇인가요?

"가장 중요한 것은 리마 외부에서 유독 심하게 발생하는 인권침해, 경찰의 무차별적인 무력 사용을 멈추는 것입니다. 토착민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무력 사용이 더 심각합니다. 대통령의 사임이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 시위를 준비하고 주도하는 단체가 있나요?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또 누가 있나요? 

"시위는 현직 대통령에 반대하는 좌익 단체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명확하게 주도하는 한 단체는 없습니다. 수많은 민중들과 학생, 인권운동가들이 참여하고 있고, 노동조합과 페미니스트, LGBT 단체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 외신에서 디나 볼루아르테를 페루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반기는 논조의 기사도 있었습니다. 한국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있었지만, 여러 문제로 탄핵당했습니다.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선 여성 대통령에 대한 의견이 어땠나요?

"내 딸은 최초의 여성대통령에 대해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실망했습니다. 그녀는 페루 최악의 대통령 중 하나입니다. 그런 뻔뻔한 방식으로 대통령이 된 것은 옳지 않습니다."
 
페루의 독립 활동가?아드리아나 세미안리오 (Adriana Semianrio).
 페루의 독립 활동가?아드리아나 세미안리오 (Adriana Semianrio).
ⓒ 안태진

관련사진보기

 
- 페루 페미니스트들의 가장 큰 현안은 무엇인가요? 

"여성 문제와 관련해 페루의 가장 시급한 현안은 여성살해(femicide)와 강간입니다. 여성 살해 피해자는 데이터조차 없어서 얼마나 많은 여성이 살해되는지 조차 알 수 없습니다. LGBT에 대한 인권침해 상황도 매우 심각합니다."

-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어제 리마에서도 첫번째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억압은 잔인했고, 많은 사람이 다쳤습니다. 경찰은 부상자가 병원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으며, 언론인들도 폭행했습니다. 페루의 상황은 심각합니다. 국제적인 관심이 필요합니다."

불평등에 저항하는 페루 민중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페루 남부지역 사람들의 분노를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 최근 페루 시위는 단순한 대통령 퇴진 시위를 넘어 페루 내부의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운동이기도 하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차치하더라도, 시골마을 교사 출신인 카스티요에 대한 '리마 엘리트들'의 지역 차별적 조롱과 비난은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런 차별적 분위기를 그의 지도력 상실과 탄핵까지 연관짓지 않을 순 없다. 또한 카스티요 탄핵을 지역 토착민들이 또다른 지역 차별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배제할 순 없다. 

최근 볼루아르테 대통령은 페루인들을 보호해야 한다며 "푸노는 페루가 아니다"라고 발언해 다시 한번 공분을 샀다. LA타임즈 기사에 따르면 페루 남부 우르코스(Urcos) 마을 리더는 "우리는 이 인종차별주의자들이 계속 통치하도록 허용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안데스 산맥 인근의 토착민의 저항은 우리가 사용하는 구리, 금, 주석, 리튬의 생산과도 연결돼 있다. 그들이 사는 지역의 환경을 파괴하고 건강권을 침해하며 추출된 자원을 전세계가 함께 누리고 있다. 대통령의 사퇴와 새로운 선거, 그리고 페루의 오래된 지역불평등을 해결하려는 민중들의 행동을 주목해야 한다. 

태그:#페루, #페루대통령, #페루시위, #마추픽추폐쇄, #페루사망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노동조합에서 일하다 퇴직 후 세계여행 중입니다.

사회에 관심이 많습니다만, 가끔은 자연에 파묻혀 단절되길 즐깁니다. 돌봄이 존중받는 사회를 위해 활동하고, 부업으로 여행유튜브 채널(무계획재정부)을 운영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