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24 12:06최종 업데이트 23.03.24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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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토스카나주 리보르노에 있었던 카페 바르디 리보르노 ⓒ 위키미디어 공용


커피 한 잔 주문하고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앉아서 쉬고, 책을 보고, 잡담을 할 수 있는 장소인 카페 문화가 우리에게는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이런 문화가 모든 나라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커피는 집에서 마시든지, 일터에서 마시는 음료, 혹은 음식과 함께 마시는 음료였지, 커피만을 위한 제3의 장소가 있지는 않았다.

커피는 음식이나 술처럼 별도의 장소에서 마시는 독립된 음료는 아니었다. 음식이나 술을 파는 곳에서 곁들여 팔거나 디저트로 제공하는 음료였지 그 자체가 메인 음료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19세기 중반 커피가 대중화된 이후 매우 오랫동안 이런 문화가 지속되었다. 지금도 유럽 여러 나라의 카페는 음식을 파는 곳이지 커피만을 파는 곳은 아니다.


이런 오래된 문화에 변화가 생긴 것은 20세기 들어서였다. 몇 가지 계기가 작용하였다. 첫 번째 계기는 집에서 만들기 어려운 커피인 에스프레소의 등장, 에스프레소를 만드는 전문 직업인 바리스타의 등장이었다. 이런 변화가 시작된 곳은 이탈리아였다.

1930년대 초반 에스프레소 음료의 유행과 함께 출근길에 빠른 속도로 커피 한잔을 마실 수 있는 제3의 장소 '바르'가 나타난 것이다. 바르 안에서 일하는 멋진 커피 전문가 바리스타도 등장하였다. 골목마다 등장한 바르에서는 커피만을 주문할 수 있었고, 선 채로 커피를 빠르게 마시는 것이 보통이었다. 샐러리맨이나 노동자들도 부담스럽지 않은 매우 싼 가격에 에스프레소를 즐길 수 있었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이런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다. 1~1.5유로(1400~2100원) 정도의 낮은 가격에 커피 한잔을 마시는 공간 바르가 골목마다 하나씩 있다. 음식이 메인이고 커피는 곁다리 음료로 판매하는 카페와는 다르다.

커피만을 즐기는 제3의 장소가 등장한 두 번째 계기는 마일드 커피라고 통칭되는 고급 커피의 등장이었다. 브라질산 저급 커피와 대비되는 의미의 마일드 커피라는 명칭이 붙은 첫 사례는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콜롬비아 커피였다. 이후 하와이 코나,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등 향이 뛰어나고 맛이 부드러운 비싼 커피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마일드 커피를 넘어 1980년대에는 스페셜티 커피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은 최상급 커피들이 등장했다. 커피가 더 이상 음식이나 술의 보조 음료가 아닌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커피를 마시는 제3의 장소가 만들어진 세 번째 흥미로운 계기는 경제 대공황이었고, 지역은 동아시아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된 일본의 야욕은 나날이 커갔고, 군수산업을 비롯한 공업에 대한 투자 확대로 농업은 위축되고 도시는 팽창하였다.

농촌 인구 감소에 따라 일본에서 대규모 식량부족 사태가 벌어진 것이 1918년이었고, 부족한 쌀을 확보하고자 식민지 조선에서의 수탈이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사람들의 삶을 점점 힘들게 만들었다. 3.1운동은 민족주의와 더불어 일본에 의한 수탈 확대가 초래한 당연한 저항이었다. 반성 없이 1920년대 내내 일본은 식민지 수탈을 지속하였다.

조선식 다방, 순끽다점
 

1929년 2월 12일 <동아일보>에 실린 광고. "지나실 길에 한번... 본정 끽다점 금강산"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커피를 비롯한 음료 소비에도 변화가 불가피하였다. 미국처럼 금주령이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변화가 나타났다. 자연스럽게 생긴 소비 양극화였다. 웨이트리스가 있고 술이 있는 이른바 퇴폐 카페를 찾아 술을 마시는 것은 소수의 부자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 중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술집, 선술집이 등장한 것이 이즈음이었다. 앉을 자리도 없는 곳에서 선 채로 간단한 안주를 벗삼아 술을 마시는 곳이었다. 술 문화의 양극화였다.

문제는 커피였다. 커피를 제공하는 대부분의 업소는 유럽이나 일본식으로 음식을 팔든지, 미국식으로 술을 팔았다. 게다가 이런 업소에는 팁을 주어야 하는 웨이트리스들이 있었다. 커피를 마시고 싶으나 비싼 음식을 주문할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갈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런 절박함이 만들어낸 곳이 바로 조선식 다방이었다. 이름은 순(純)끽다점으로 출발했다.

값비싼 음식이나 술이 중심이 아니라, 저렴한 커피 한잔이 주인공인 '거리의 안식처'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27년 12월 18일 자 <조선신문>을 보면 경성 시내 본정3정목(현 충무로3가)에 "순끽다점"을 표방하며 새로운 메뉴를 선보인 후타미테루무가 인기를 끌었다. 커피와 양과자 세트 메뉴였다. 이 기사 어디에도 당시 끽다점이나 카페 광고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미모의 웨이트리스'라는 문구는 보이지 않았다.

본정2정목(충무로2가)에 있던 끽다점 금강산은 신문 광고를 통해 '주류를 팔지 않는 끽다점,' '저렴한 가격,' '순민중적인 업소,' '사회생활의 안식소,' '거리의 안식처'라는 특징을 부각시켰다. 1928년 8월 1일, 1929년 2월 19일 여러 신문에 광고를 내보냈다. 비싼 음식이나 술이 없는 순끽다점이었고, 시민의 휴식처였다. 본정에 있던 푸라치나도 순끽다점이었다.

대공황의 여파로 진행된 양극화 속에서 비주당들은 새로운 향락의 터를 찾기 시작하였고, 적은 돈으로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로 순끽다점이 안성맞춤이었다. 순끽다점은 어느 순간 다방(茶房)이라는 우리식 이름과 함께 쓰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고급 카페나 바가 많았던 청계천 이남 남촌의 일본식 향락 문화에 비판적이거나 적응하기 어렵던 조선인 인텔리들이 북촌에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순끽다점이나 다방은 북촌의 새로운 문화로 성장하였다. 모뽀나 모껄 두세 사람이 한 다방에 가서 커피 한 잔만 먹고 현금 십 원짜리 지전 한 장을 내놓으면 몇 시간을 앉아 있어도 문제가 없었다. 커피 한 잔에 오십 전쯤이었다.

이상이 1933년부터 문을 열었던 청진동 제비다방, 인사동 쯔루, 광교 맥 등은 청춘남녀들이 모여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음악을 듣고, 세상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휴식처였다. 평양에서 이효석이 즐겨 다녔던 세르팡이나 낙랑도 커피가 중심인 다방이었다.

커피온리 업소의 아시아적 기원
 

미국의 블루보틀 커피 창업자 제임스 프리먼 ⓒ 연합뉴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일본이었다. 192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카페는 더욱 퇴폐화되었다. 문란한 정도가 조선의 카페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탄배 유키히로의 표현대로 카페는 "에로틱, 그로테스크, 난센스 시대의 밤을 장식하는 스타"가 되어 있었다. 이런 카페에 대해 일본 경찰 당국은 1929년에 '단속강령'을 발표하여 규제를 시작하였다.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소비 위축과 경찰에 의한 카페 단속이 동시에 등장하자 새로운 유형의 업소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술 중심의 카페와는 선을 긋고 커피와 식사만 취급하는 업소들이 생겨났다. 탄베 유키히로의 주장에 따르면 1930년대 초반이었다. 커피가 메뉴의 중심에 놓인 새로운 형태의 끽다점이었고, 쥰킷샤(純喫茶)라고 불렀다. 조선에 순끽다점이 등장한 몇 년 후의 일이었다.

일본의 쥰킷샤는 술이 없었을 뿐 여전히 음식이 커피와 함께 제공되는 점이 조선의 다방과는 달랐다. 1920년대 후반에 순끽다점으로 등장하여 1930년대에 조선식 휴식처로 발전한 다방에서는 보통 음식은 없이 커피와 차만을 취급하였다. 요즘 표현으로는 '커피온리' 카페였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는 다방이 우후죽순식으로 등장하였다. 문제는 미국식 커피문화의 빠른 유입이었다. 인스턴트커피 가루에 뜨거운 물과 설탕을 부어 만드는 달달한 커피가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커피 본연의 맛에 관심이 있는 커피전문가도, 그런 맛에 관심을 가진 소비자도 거의 없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카페 드 람브르를 창업한(1948년) 세키구치 이치로와 같은 선구적인 인물들이 나타났고, 빠른 경제 성장을 배경으로 UCC, 도토루 등 대형 커피기업 뿐 아니라 다이보(1975년 창업) 등이 등장하여 1930년대 커피 중심의 쥰킷샤 문화를 전승할 수 있었다.

2000년에 스타벅스에 도전장을 내밀며 등장하여 커피 제3의 물결을 리드하고 있는 미국의 블루보틀 창업자 제임스 프리먼은 자신의 창업 정신 뒤에는 일본식 킷사텐 커피 문화가 있다고 선언하여 충격을 준 바 있었다.

프리먼에게 영감을 준 킷사텐 문화는 술과 음식이 중심이었던 일반 킷사텐 문화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커피가 중심이었던 쥰킷샤 문화를 의미할 것이다. 물론 프리먼이 쥰킷샤 문화에서 조선이 일본보다 빨랐다는 것을 알았을 리는 없다.

1920년대 후반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소비의 위축, 문란한 일본식 카페 문화에 대한 반감으로 생겼던 조선의 순끽다점이 쥰킷샤 문화의 선배였다. 이후 조선에서 번창하였던, 음식 없이 커피만을 즐기는 '사회생활의 안식소' 다방이 커피온리 업소의 아시아적 기원이었다.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표현대로 맥락 없이 등장한 역사적 현상은 없다.

(유튜브 '커피히스토리' 운영자, 교육학 교수)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한국가배사. 푸른역사.
탄베 유키히로지음, 윤선해 옮김(2018), 커피세계사. 황소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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