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22 16:10최종 업데이트 23.03.22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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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오후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일 확대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16~17일 이틀간에 걸친 한일 정상회담을 둘러싼 후폭풍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 대해 대통령실은 '통 큰 결단', '미래를 위한 선택'이라며 자화자찬 혹은 항변하고 있지만, 외교의 암묵적 규칙은 '기브앤테이크'이다. 딱 절반씩 주고받기는 힘들더라도 최소한 눈에 보이는 가시적 효과를 조금은 받아내야 한다.

그런데 이번 한일 정상회담은 이익적 측면은 고사하고 한국 국민의 정서 및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가장 큰 안건이었던 강제동원(징용)에 대해선 이후 일본기업에 구상권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나왔다. 그 외 앙금이 쌓여 있던 사안들에 대해서도 윤석열 대통령은 물러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실은 독도 및 위안부, 후쿠시마산 금수 조치 해제가 논의되었다는 일본 언론에 대해 '왜곡 보도'라 일축했다. 하지만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에 대해선 정상 간의 회담을 전부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식이라면 진실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그렇기에 또 다른 당사자인 일본 측의 반응을 토대로 이번 한일 정상회담의 막전막후를 추리해볼 수밖에 없다.

일본 "진심으로 놀랍다"

우선 일본 내 보수·진보를 막론한 거의 모든 언론과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진심으로 놀랍다"고 말한다. 아무리 기시다 후미오 내각이 아베 정권 시절부터 이어진 "우리는 더 이상 할 게 없으니 한국이 해결책을 찾아서 가져와라"라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한국이 양보할 줄은 몰랐다는 말이다.

오히려 일본언론에서 가장 극우적인 위치에 있는 <데일리신초>는 시게무라 도시미쓰의 칼럼을 통해 선물을 한 보따리 들고 온 윤석열 대통령을 제대로 환영하지 못했다며 다음과 같이 자민당 및 내각을 비판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결단으로 한일관계에 새로운 역사가 펼쳐졌다. 하지만 일본은 윤 대통령의 체면을 배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관계를 회복시킨 윤 대통령은 기시다 총리보다 훨씬 더 신념을 가진 지도자이며 용기 넘치는 법률가였다. 반면 일본은 '체면'과 '대의명분'이 정치생명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한국 정치 최대의 가치'라는 인식조차 없었다."
 
또한, 시게무라는 칼럼을 통해 윤 대통령이 방일 인터뷰 매체로 <아사히 신문>이 아닌 <요미우리 신문>을 선택했다는 것이 역사적 대사건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했다. 
 
"윤 대통령이 방일 직전 <요미우리 신문>과 인터뷰한 것은 일본 신문 역사에 남을 대 사건이다. 한국의 거의 모든 대통령은 지금까지 <아사히 신문>과 인터뷰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아사히 신문>의 한국관련 보도를 그다지 평가하지 않는다'라는 윤 정권의 입장표명이자 <아사히 신문> 권위의 추락을 의미한다. <아사히 신문>은 지금까지 보도 및 사설을 통해 좌파 문재인 정권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왔으며 위안부 및 징용공 문제에 대해서도 문재인 정권에 호의적이었다고 윤 정권은 판단한 것이다."
 
가장 극우적 매체인 <데일리신초>, 그리고 평소 극우적 입장의 평론가로 이름이 높은 시게무라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이러한 '극찬'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7일 오전 일본 도쿄 한 호텔 식당에 한일 정상회담을 보도한 현지 조간 신문이 놓여 있다. ⓒ 연합뉴스

 
한편, 위 칼럼에서 언급한 진보매체로 분류되는 <아사히 신문> 역시 17일 자 사설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보였다.
 
"한국 윤석열 대통령이 방일, 기시다 총리와 회담했다. 이번에야말로 정체되어 왔던 양국 정상외교에 종지부를 찍고, 빈번이 서로 얼굴을 맞대 호혜적 미래를 논의해야만 한다. 이번 회담을 그 기점으로 삼고 싶다. 지금까지 서로의 왕래를 막아왔던 것은 역사문제였다. 특히 최근 몇 년간은 한국 사법부가 일본기업의 배상을 명령한 징용공 문제로 대립이 심화됐다. 이 난제에 대해 윤 정권은 한국 정부 산하 재단이 배상액을 대신 납부하겠다는 해결책을 발표했다. 그로부터 불과 열흘 후 실현된 이번 회담이다. 양국 정상이 왕래하는 셔틀 외교의 재개를 약속하는 건 당연하다."
 
<아사히 신문>은 이 사설을 통해 한국 내 반발 여론 등을 거론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윤 대통령의 이번 방일을 계기로 한일관계의 청사진을 그리자고 당부한다. <데일리신초>처럼 표나는 극찬은 아니지만 환영한다는 입장을 보인 셈이다.

윤 대통령 덕에 지지율 회복한 기시다 총리

여기엔 여야가 따로 없다. 이번 정상회담에 대해 일본 제1야당 입헌민주당의 이즈미 겐다 대표는 "한국 야당의 반발이 심하다고 들었다"면서 "나라도 직접 나서 한국 야당 대표들과 만나 설득하고 싶다"며 말했다. 국내 정치 안건, 특히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안보담당상의 경질 문제로 날을 세우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윤석열 대통령을 돕겠다고 야당 대표가 나서고 있는 것이다.

언론 및 정치권뿐만이 아니다. 각종 매체의 17~19일 여론조사를 보면 한일 정상회담을 잘했다고 평가하는 일본 국민은 63~65%로 집계되었다. 양국 간의 사이가 좋아질 것이라는 의견도 소폭 상승했으며, 특히 지난 8개월간 30%대로 정체되어 있던 기시다 내각의 지지율이 의미 있는 반등을 기록했다.

NHK와 교도통신의 여론조사에서는 각각 40%를 회복했으며 평소 기시다 내각 지지율이 가장 박하기로 유명한 <마이니치 신문> 여론조사에서도 35%를 회복한 것으로 나왔다. 당연히 기시다 총리 입장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고마울 수밖에 없다.

작년 여름 참의원 선거 승리를 계기로 기시다 2차 개조내각이 출범하면서 기시다 총리는 '황금의 3년'(큰 선거가 없는 시기)을 맞아 자신의 정책을 마음 놓고 펼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하지만 인플레로 촉발된 내수경제, 통일교 관련 내각 대신들을 경질하지 않는 등 여러 복합적 문제로 인해 지지율이 30%대로 급락했다.

일본 정가에는 내각이 20%대 지지율을 기록할 경우 내각 총해산/중의원 총선거를 통해 국민의 신임을 다시 받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즉 기시다 총리 안팎으로 공격받는 처지였다. 특히 자민당 최대 파벌 아베파(세이와정책연구회, 중참의원 96명 소속)는 총리 지지율이 떨어지기 시작한 작년부터 공공연히 태클을 걸어왔다.

예를 들어, 기시다 총리는 작년 가을 아베노믹스를 재점검하자는 의미로 아소 부총재를 최고 고문으로 하는 '재정건전화위원회'를 총리 직속 기구로 만들었다. 하지만 당시 자민당 정조회장이던 다카이치 사나에가 당내에 아베파 중심으로 아베노믹스는 틀리지 않았다는 의미로 '재정정책연구회'를 만드는 등 사사건건 총리의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그래서 개조내각 출범 시 아예 무임소 장관인 경제안보상으로 내각에 들어 앉혔다.

이후 다카이치는 통일교와 관련이 있다는 스캔들에 연루됐지만 경질되지 않았다. 아베 전 총리의 오른팔이었던 그녀를 내칠 경우 아베파의 반발이 눈에 보이기도 할뿐더러 지지율이 낮을 경우 당내 파벌 및 역학관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 덕분에 지지율 40%를 회복한 지금 기시다 총리는 거칠 것이 없다. 다카이치 경제안보상은 자신이 총무상을 맡았던 2018년부터 2020년 사이에 작성된 행정문서에서 아베 정권을 비판하는 언론에 대한 직접 개입을 의미하는 부분이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경질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기시다 총리의 정치적 숙원
 

(키이우 UPI=연합뉴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왼쪽)가 2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전격 방문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기시다 총리는 오는 5월 자신의 고향에서 열리는 히로시마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등을 초청한다고 발표했다. 한일 정상회담이 끝나자마자 바로 우크라이나를 방문해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나는 장면이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전혀 다른 맥락이지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일본 야구팀의 선전도 일본의 경기 활성화 등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런 식으로 만약 기시다 총리의 지지율이 50%까지 회복된다면 다카이치 및 자민당 매파들과 거리를 두며 강한 정치력을 과시할 발판이 마련된다.

이 모든 시작이 이번 한일 정상회담,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이 가지고 간 선물 보따리 때문이었다. 기시다 총리는 윤석열 대통령이 고마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고맙기에 뭔가를 해줄 것이라는 헛된 기대는 버리는 게 낫다.

기시다 총리는 2015년 박근혜 정권 시절 나온 위안부 합의안을 총괄했던 외무상 출신이다. 그의 최측근인 하야시 외무상은 지난 1월 초순 아르헨티나 외무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아르헨티나에 건립될 예정이었던 소녀상을 세우지 않게끔 물밑 노력을 해 왔다는 점을 기자회견을 통해 말했다. 참고로 이들은 강제동원(징용), 종군위안부란 단어를 절대 쓰지 않는다. 구조선반도노동자 문제, 위안부 문제라고 말한다.

강제동원이 해결됐으니 다음은 기시다 총리의 정치적 숙원이라 할 수 있는, 일본 입장에서의 종군위안부 문제 해결일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라면 해 줄 것이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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