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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우주의 삼라만상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을 통하여 생각하고, 느끼고, 소통한다. 이름은 기호이며, 기호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추구하는 상징적 동물이다. 아기가 출생하면 이름을 지어주고, 이름의 유무가 존재의 유무를 의미한다."

드라마 출연진에게도 이름은 부여된다. <더 글로리> 박연진도 문동은도 이렇게 탄생했다. '연진'은 학교폭력의 가해자로, '동은'은 그 피해자로 등장한다. 이 두 사람은 OTT 시리즈물로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작품 속 주인공들이다.

우리 부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고, 우리는 이 아들에게 '연진'이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한자로는 '連眞'이고 영문으로는 'Yeon Jin'이다. 의미는 '진실은 계속된다' 혹은 '진실을 잇는 사람' 정도로 의도했다. 지나가던 노스님이 지어주신 것도 아니고, 동네 작명소에서 받은 이름도 아니다. 우리 부부가 고민해서 아이의 삶이 그 이름처럼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지은 이름이다.

그런데 '연진'이라는 이름은 아들의 출생신고에서 첫 관문을 만났다. 아들은 우리가 유학 중이던 독일에서 태어나서 독일 행정기관에 출생신고를 해야만 했다. 담당자는 서류를 보더니 두꺼운 책자를 꺼내 뭔가를 확인하고는 신고를 받아줄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Yeon Jin'이라는 이름이 여자 이름이라는 것이었다. 독일어 명사에는 남성, 여성, 중성의 문법적 성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름 역시 명사에 속하며 성별에 따른 이름 부여법이 있다는 것을 그때야 알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주독한국 대사관에서 발급한 "'Yeon Jin'이라는 이름은 한국에서는 남자 이름으로도 사용된다"는 증명서를 제출하고 신고를 마쳤다.

두 번째 관문 역시 내용적으로 첫 번째 관문과 유사하다. 아들이 독일에서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칠 때 우리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왔고, 아들은 한국의 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한국에는 '연진'이가 많았다. 그런데 모두 여자 이름이었다.

우리 부부도 많은 '연진'이를 만났는데, 모두가 여자 이름이었다. 아들은 '연진'이가 불만이었다. 독일과 달리 우리나라에는 이름 소유자의 성별과 관련된 법적 규정은 없다. 다만 관습적 혹은 문화적으로 여자 이름, 남자 이름이 구별될 뿐이다. 아들은 다행히 '연진'으로 잘 살고 있다.

이제 <더 글로리>로 인해 세 번째 관문이 도래했다. 인터넷 검색창에서 '연진'을 검색하면 우리 '연진'이들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경쟁하는 글들이 많다. 그리고 여러 매체에서 '연진'이들은 학교폭력의 가해자이다.

언어는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에 큰 영향을 준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등장하는 인물에게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 인물에 대한 이미지나 인식이 형성된다. 그리고 그 이름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면, 그 인물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바뀐다. 드라마 속 인물 이름이 실제 인물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예상치 못한 부작용 중 하나이다.

드라마나 영화,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필요하고 당연하다. 다만 미디어가 '연진'이 경우처럼 학교폭력 문제를 다루며 실명으로 인식되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의도치 않은 피해도 고려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이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폭력이 될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 철저한 검토를 거친 작품을 만들고, 미디어가 보도할 때 실명으로 인식되는 사람들의 사생활과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

태그:#더 글로리, #학교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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