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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씨앗기금 일본청년들은 3월 20일 양산을 찾아 '김복동의 길'을 답사했다.
 희망씨앗기금 일본청년들은 3월 20일 양산을 찾아 '김복동의 길'을 답사했다.
ⓒ 김복동평화공원양산시민추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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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청년들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복동(1926~2019) 할머니의 경남 양산 생가지를 찾고 22일 서울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도 참석한다.

21일 김복동평화공원양산시민추진위원회(아래 추진위)는 희망씨앗기금(대표 양징자)이 일본 청년 20여 명과 함께 하루 전날(20일) 양산을 방문해 '김복동의 길'을 걷고 관련 활동을 벌였다고 밝혔다.

2017년 6월 일본에서 결성된 '희망씨앗기금'은 이듬해부터 한국에서 청년기행을 진행해오고 있다. 코로나19로 중단됐다가 3년만에 일본 청년들과 함께 방문한 것이다. 이 단체는 2015년 위안부 관련한 한일합의 이후 일본에서 "젊은 세대에게 사실을 제대로 알리자"는 취지로 결성됐다.

'김복동의 길'은 메깃들마을학교에서 양산을 인문학의 관점에서 체험하기 위해 개발한 지역화 교육 프로그램의 하나로, 김복동 할머니의 생가지에서부터 소설 <수라도> 속 일본군 위안부 공출 장소인 토교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특히 비영리단체인 '김복동의 희망'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함께 지난해 10월 말 '김복동 희망학교'를 열고, 양산을 찾아 '김복동의 길'을 답사하면서 더 알려지기도 했다.

양징자 대표는 "코로나19로 청년기행이 중단되는 동안 상황이 바뀌었다. 청년기행 때마다 찾아가던 일부 단체(소셜벤처 마리몬드)는 활동을 중단한 상태고, 할머니들이 계신 '평화의 우리집'도 없어졌다"며 "그동안 할머니들은 계속 돌아가시고 이제 직접 뵐 수 있는 분을 찾기가 힘든 상황이 됐다"고 했다.

양 대표는 "생존자를 못 만나는 세대로서 기억을 계승해 나가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했다"며 "그러던 중 '김복동의 길'의 존재를 알게 됐고 기억을 계승하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소녀상 본 일본 청년의 질문 "어떤 힘이 시민 움직이게 하는가"

청년들은 이날 서울에서 양산으로 왔고, 추진위 집행위원·회원들이 나가 환대했다. 박수연(양산)씨는 김 할머니의 생가지에서 고인의 생애를 일본 청년들에게 들려주었다.

당시 지나가던 주민들도 관심을 보이며 응원하기도 했다. 참가자들은 김복동 할머니도 걸었을 길을 따라 양산 남부시장 쌈지공원으로 이동했다.

쌈지공원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소녀상'이 있다. 추진위는 이곳에서 '김복동평화공원, 평화의 소녀상'을 시민의 손으로 만들려는 의의와 진행 경과를 이야기했다.

이때 일본 한 청년은 "어떤 힘이 시민들을 이렇게 움직이게 하느냐"고 묻기도 했다. 이에 이헌수(양산)씨는 "너무 늦게 알게 된 미안함"이라며 "김복동 할머니의 부고(訃告)를 신문에서 보고서야 양산에서의 일본군 위안부의 아픈 역사를 알게 된 것이 미안했고, 고향에서 함께 싸우지 않고 김복동 할머니만 고군분투하게 한 미안함"이라고 답했다.

이어 참가자들은 춘추공원에 있는 춘추원사를 찾았다. 이곳은 김복동 할머니가 1947년 귀향해 망가진 몸과 마음을 요양한 곳으로, 할머니가 요양하시기 전에는 어머니가 석불을 가져다 두고 끌려간 딸이 무사히 돌아오길 빌기 위해 늘 찾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김복동 할머니의 어머니가 가져다 놓았던 석불은 아직도 법당 한 구석에 있다. 일본 청년을 비롯한 참가자들은 석불 앞에 절을 하기도 했다.

이지양 집행위원장은 "절하는 모습은 아픔을 함께 기억하는 이들의 간절한 기도였다"며 "춘추원사를 나오는 길목엔 천리향 향기가 가득했다. 김복동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꽃이란 말에 모두 한번씩 천리향에 코를 대었다. 동행하는 우리 마음이 천리 만리로 퍼져 넘치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터이다"라고 말했다.

일본 방문 청년들, 22일 수요시위 참석

희망씨앗기금 청년기행은 마지막 장소로 통도사 백련암을 찾았다. 이곳에는 김복동 할머니가 세우신 석등이 있다. 할머니는 1992년 공개 증언을 시작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국내외 활동했고, 이후 부산에 잠시 기거하며 이곳에 석등을 세웠다.

이 집행위원장은 "할머니가 증언하고, 일본군의 전쟁 범죄 증거가 살아 증언함에도 일본은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해결의 기미가 없었다"며 "할머니는 휴식을 위해 부산으로 내려왔고, 그해가 1999년이다. 1947년의 귀향만큼 몸도 마음도 지쳤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부산에 내려와 있으면서 할머니는 통도사 백련암에 석등을 보시했다"면서 "석등을 보며 어떤 마음이셨을지 우리는 짐작조차하기 어렵다. 아마 당신의 한을 깊이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석등을 세우고 난 후 할머니는 다시 서울로 가셨다"고 설명했다.

김복동 할머니를 마지막까지 모셨던 김동희 '김복동의 희망' 운영위원도 청년기행에 함께했다. 그는 "할머니는 '나는 희망을 잡고 살아. 나를 따라'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싸움을 이어갔다. 백련암의 석등에서 진실을 증언하는 기나긴 싸움을 이어가는 할머니의 굳센 마음을 읽는다"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희망씨앗기금 청년기행은 추진위에 평화공원 조성에 써달라며 20만 원을 기부했고, 추진위는 '평화비 소녀상'이 그려진 가방과 '김복동 배지'를 선물했다.

추진위는 22일부터 앞으로 매주 수요일 오후 4~6시 사이 양산 이마트 앞에서 '김복동평화공원, 평화비 소녀상 만들기 수요 활동'을 벌인다.

지난 18일 한국을 방문한 희망씨앗기금 청년들은 22일 경복궁 견학에 이어 서울에서 열리는 '제1588차 수요시위'에 참가한 뒤 일본으로 돌아간다.
 
희망씨앗기금 일본청년들은 3월 20일 양산을 찾아 '김복동의 길'을 답사했다.
 희망씨앗기금 일본청년들은 3월 20일 양산을 찾아 '김복동의 길'을 답사했다.
ⓒ 김복동평화공원양산시민추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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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복동 할머니, #희망씨앗기금, #김복동의 길, #김복동평화공원양산시민추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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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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