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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고 화학 회사에 다니던 30대 초중반 청년이 선후배와 함께 사업을 시작했다. 막걸리를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이다. 비즈니스의 시작은 비참했다. 대형 마트를 찾아가 "저희가 만든 술입니다. 여기서 판매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부탁하면,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막걸리를 가져와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바쁘니까 나가주세요"라며 문전박대 당한 것만 수십 차례.

그로부터 13년의 세월. 상황은 180도 변했다. 홀대 받던 그의 막걸리는 이제 모내기와 벼 베기로 바쁜 농번기엔 하루 6천 병이 팔린다. 연매출 12억 원, 직원도 한둘씩 늘어 9명이 됐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주조장(酒造場)으로 변모한 것이다.

어떤 마트 경영자는 13년 전 자신이 쫓아낸 청년을 알아보지 못하고, 반갑게 먼저 인사하며 깍듯한 태도로 반겼다고. 유쾌하고 즐거운 '창업 성공기'가 아닐 수 없다.

'옹해야'라 이름 붙인 탁주를 필두로 7종류의 막걸리를 생산하는 청슬전통도가 정광욱(47) 대표는 어려웠던 사업 초기를 떠올리며 "지금은 다 웃음을 부르는 추억"이라 말했다.

"술은 그걸 만드는 사람과 닮는다"는 믿음을 가진 정 대표는 지적장애 3급 장애인과 자폐 장애인을 흔쾌히 직원으로 받아들여 9년째 함께 일하고 있다. "인간미를 잃지 않는 직장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가진 품 넉넉한 사업가.

그가 올 3월 초순 막걸리에 이어 증류식 소주 3종을 만들어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30년 이상 술과 벗하며 살아온 나였기에 직업적 호기심과 함께 개인적 궁금증도 생겼다. 오크통과 항아리에 숙성시킨 세 종류 소주 맛은 어떨까?

유대인 율법학자들은 <탈무드>에서 "사람을 원숭이와 돼지로 만들어버린다"며 술을 평가절하 했다. 하지만, 미국의 시인 제임스 더글러스 모리슨(James Douglas Morrison)은 정반대의 견해를 표명한 바 있다. "술은 인간의 넋을 본질적 자리로 돌려놓는 영혼재귀(靈魂再歸)의 수단"이라 상찬한 것. 과연 어떤 게 옳은 말일까?

귓가를 간질이며 불어오는 봄바람이 따스했던 지난 16일 오후. 경북 포항시 북구 기북면에 자리한 청슬전통도가를 찾아 정광욱 대표와 만났다.

그는 갓 출시된 '따끈따끈한' 영일만 소주, 문덕 헬로우부대 소주, 새록새로 소주를 들고 호탕하게 웃으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농번기엔 하루 6천 병이 팔린다는 청슬전통도가의 막걸리.
 농번기엔 하루 6천 병이 팔린다는 청슬전통도가의 막걸리.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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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어난 곳과 유년을 보낸 지역은 어딘가.
"1976년 포항 죽천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중·고교를 모두 포항에서 다녔다. 대학에선 국제정치학과 경영학을 전공했다."

- 막걸리와는 무관해 보이는 이력이다.
"대학 졸업 후 잠시 정치판을 기웃거렸고, 화학 회사를 몇 년 다니기도 했다. 헌데, 그것들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 함께 회사를 다니던 친구 둘에게 '술 만드는 회사를 만들어보자'고 제의했다. 그게 서른네 살 때다. 학생 때도 암벽과 빙벽을 오르는 모험과 도전을 즐겼다. 그런 기질이 안정적 직장생활보다는 망하든 흥하든 화끈하게 승부를 볼 수 있는 사업 쪽으로 이끈 듯하다."

- 처음부터 당신이 만든 막걸리가 잘 팔리진 않았을 텐데.
"막걸리를 취급하는 마트와 소매점에서 구박을 당한 적도 많았다. 모든 게 처음이니 술을 만드는 것도, 파는 것도 서툴렀다. 여러 가지 난관에 머리가 깨질 지경이었다. 궁여지책으로 '내가 만든 막걸리이니 내가 직접 팔아보자'며 2011년엔 포항 시내에 전통주점 '옹해야'를 열기도 했다. 이젠 다 지난 이야기다. 주조장과 주점 모두 꾸준히 이름을 알려 오늘도 성장 중이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이젠 포항에선 없어서 못 파는 인기 있는 막걸리가 됐다.(웃음)"

- 얼마 전엔 증류식 소주를 만들었다고 들었다.
"포항시, 문덕·해도동 상인회와 협력해 3가지 종류의 증류식 숙성소주를 지난 3월 초 출시했다. '문덕 헬로우부대 소주'는 오크통에 숙성시키고, '영일만 소주'와 '새록새로 소주'는 항아리에 60일간 숙성한다. 3종의 소주는 숙성 방식과 누룩 함량을 달리해 기성세대와 군인들, MZ세대의 각기 다른 입맛에 맞추고자 노력했다."

- 술을 빚는 게 쉬운 일은 아닐 듯한데.
"술의 원료인 효모(酵母)는 온도에 굉장히 민감하다. 온도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술을 망친다. 특히 여름에 그렇다. 10년 넘게 해온 일이지만 아직도 어렵다. 결국 좋은 술을 만드는 핵심 키워드는 '온도 관리'다."

- 술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즐거움은.
"우리 주조장에서 빚은 술을 마시고 좋아하는 사람을 볼 때다. '하루의 스트레스가 싹 풀렸다' '잠시나마 슬픔을 잊게 해줬다'는 말을 들을 때면 덩달아 기쁘다."
 
증류식 소주를 만드는 기계를 점검하는 정광욱 대표.
 증류식 소주를 만드는 기계를 점검하는 정광욱 대표.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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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슬도가'라는 주조장 이름이 독특하다. 정광욱 대표는 시(詩) 읽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시인 신경림, 정호승, 안도현의 시집을 읽으며 청년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일까? '맑은 소리가 나는 거문고'라는 뜻의 청슬(淸瑟)에선 술 향기가 아닌 문학의 향기가 느껴졌다.

한국의 주조장은 대를 이어 운영되는 곳이 흔하다. 대부분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노하우가 담긴 술을 만든다는 이야기. 그러나, 정 대표는 주조장 창업 1세대다. 가르쳐주는 조부와 부친이 없으니 스스로 백지에 그림을 그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 도전정신을 자극했다.

"다른 주조장은 전통을 이어가기에 주조법이 변화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것과 다르게 나는 효모도 다양하게 써보고, 숙성 용기도 바꿔가며 여러 실험을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실패가 있었지만, 그 '실패의 힘'으로 나만의 스타일을 찾게 됐다."
 
정광욱 대표가 증류식 소주가 숙성되고 있는 항아리를 살피고 있다.
 정광욱 대표가 증류식 소주가 숙성되고 있는 항아리를 살피고 있다.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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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의 주도(酒道)는 뭐라 생각하는지.
"취하면 대부분이 자기 주장만을 펼친다.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게 가장 바람직한 주도가 아닐까?"

- 어떤 마음가짐으로 술을 빚나.
"만드는 자의 고통이 클수록 마시는 자의 즐거움은 커진다는 걸 잊지 않으려 한다."

- 시장에 선보인 증류식 소주 3종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처음 만드는 증류주라 '여과 공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 최대 주류회사에서 수십 년간 연구원으로 일한 후배의 아버지가 그걸 명쾌하게 해결해줬다. 여과 과정만이 아닌 정제와 숙성법도 조언했다. 내겐 잊지 못할 은인이다.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우리 주조장 증류식 숙성소주를 맛본 사람들이 '목 넘김이 부드럽고 깨끗하다'는 의견을 들려줬을 때 비로소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 그런 자신감으로 또 어떤 도전을 할 것인가.
"포항을 넘어 서울·경기 지역으로 진출하고 싶다. 막걸리는 유통기간이 짧고 유통망도 대기업에 비해 잘 구축돼 있지 않아 경쟁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소주는 다르다. 청슬전통도가가 빚은 증류식 소주는 서울과 경기도 어떤 주조장에서 만들어진 술과 비교해도 나쁘지 않다고 자부한다. 공평한 시장 상황만 주어진다면 맛과 품질을 당당하게 겨뤄보고 싶다."

- 청슬도가가 어떤 주조장으로 기억됐으면 하는지.
"지역민과 함께 성장하는 회사, 인간미가 느껴지는 직장을 만들고자 한다.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술에는 만드는 사람의 성품이 담긴다는 걸 믿고 있다. 술로 맺어지는 인간관계가 술보다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언젠가 내 아들이 '아버지 뒤를 이어 저도 술을 빚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기쁘게 '그래. 좋은 결정이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에 게재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태그:#청슬전통도가, #정광욱, #증류식 소주, #영일만소주, #새록새로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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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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