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21 21:13최종 업데이트 23.03.21 21:13
  • 본문듣기

굴욕외교라는 거센 비판속에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회담 비준서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 자료사진


1953년 한국전쟁 휴전 이후 안보가 가장 위태했던 시절은 1960년대 후반이다. 1968년에는 무장공비 김신조 등에 의한 청와대 습격 미수도 발생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내각이 한일관계가 다 해결된 때라며 높이 치켜세우는 1965년 한일협정 이후의 5년간은 그처럼 불안한 시기였다.

윤석열 정권은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 나온 1998년이 한일관계가 가장 좋았던 시절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번에 윤 정권이 벌인 일은 1998년이 아닌 1965년을 모델로 하는 것이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 때는 피해배상에 대한 언급이 없는 대신에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라도 있었다. 사과·배상 없이 식민지배 문제를 봉합한 윤 정권의 방식은 한일협정으로 통칭되는 한일기본조약과 부속 협정들이 체결된 1965년 방식과 일치한다.


강제징용(강제동원) 문제를 1965년 방식으로 봉합한 윤석열 대통령은 16일 한일정상회담 기자회견 때 "오늘 아침 북한은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여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하였습니다"라고 한 뒤 "날로 고도화되고 있는 북한·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한미일·한일 공조가 매우 중요"하다며 이번 조치를 합리화했다. 징용 문제를 1965년으로 되돌리기 위한 명분을 안보 문제에서 끌어낸 것이다.

윤 정권은 일본과의 안보협력을 위해 역사문제를 억누르는 것이 대북 방어에 유리하다는 논리를 유포하고 있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이 논리가 경험적으로 실증된 사례는 없었다. 실제로 증명된 것은 이와 정반대였다.

2011년 11월 10일 미국 외교협회가 발표한 '한국의 군사적 긴장 고조' 보고서에 따르면, 1955년부터 2010년까지 한반도에서 일어난 군사 충돌은 총 1436건이다. 이 중에서 49.4%인 709건이 1960년대 후반에 발생했다. 1960년대 전반에는 20.1%가 발생했고, 1970년대 전반에는 10.7%가 발생했다. 1960년대 후반을 그 직전 및 직후와 비교해봐도, 이 시기 안보 환경의 불안정성을 실감할 수 있다.
 

2014년 <군사> 제91호에 수록된 이윤규 국방대 교수 논문에 등장하는 연도별 북한의 대남 침투도발 변화 추이를 보여주는 그래프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960년대 후반이 그런 시기였다는 점은 2014년 <군사> 제91호에 수록된 이윤규 국방대학교 교수의 논문 '북한의 도발 사례 분석'에서도 나타난다. 이 논문은 "시기별로 분석해 보면, 196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침투 도발이 격화"됐다고 한 뒤 송영선닷컴을 근거로 북한의 연도별 군사행동 추이를 보여주는 그래프를 제시한다. 이 그래프를 봐도 1965년 이후의 상황 변화가 단번에 느껴진다.

1960년대 후반에는 북한 공작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한 1·21사건으로도 불리는 김신조 사건, 북한에 의한 미군 푸에블로호 나포(1968년 1월 23일),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1968년 11월 2일), 북한에 의한 미군 EC-121기 격추(1969년 4월 15일) 외에도 안보상의 대형 이슈들이 하루가 멀다고 터져 나왔다.

1967년 한 해 동안 발생한 사건 중 주요한 것만 열거해도 이렇다. ▲ 해군 당포함 격침(1.19) ▲ 중부전선 교전(4.12) ▲ 화천군 비무장지대 침투(4.12) ▲ 격렬비열도 간첩선 격침(4.17) ▲ 서부전선 미군 막사 폭파(4.22) ▲ 강릉 고단지구 무장공비 침투(5.21) ▲ 연평도 근해 어선 포격(5.27) ▲ 대성동 미군 트럭 기습(8.7 ▲  서부전선 군용 트럭 기습(8.10) ▲ 판문점 미군 막사 기습(8.28) ▲ 경원선 폭파(9.5), 경의선 폭파(9.13).

안보를 불안하게 만드는 정반대 결과 초래

김일성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장 시절인 1961년부터 '남한을 곧바로 통일하지 않고 남한 혁명을 먼저 유도하는 남조선혁명론'을 추진했다. 이에 따른 무장공비 대거 파견이 1960년대 후반에 격증하게 된 첫째 요인은 1964년부터 격화된 베트남전쟁이다.

미국뿐 아니라 한국의 관심도 베트남전에 쏠린 틈을 타서 남한의 동요를 초래하고자 무장공비를 더욱 많이 파견한 측면도 있고, 한국의 시선을 베트남뿐 아니라 북한으로 돌림으로써 한국의 베트남 지원을 약화시키고자 한 측면도 있었다.

둘째 요인은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인한 정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한일협정에 의해 생겨난 한미일 협력체제는 군사협력 수준을 뛰어넘어 군사동맹 수준까지 지향했다. 이 동맹이 조만간 성사되리라는 전망은 그해 6월 22일에 협정이 체결되기 전부터 나돌고 있었다.

한일협정에 대한 국민적 저항과 반발이 극심할 때인 그해 5월 15일 발행된 <경향신문> 기사 '박 대통령의 세 번째 방미'는 "국교 타결이 뚜렷이 된 한국과 일본을 묶어 한미일 삼각체제의 방공 협력체를 구상하고 있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나오고 있는 이야기들이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정국의 안정, 경제부흥 그리고 방공이라는 점에서 극동방위체제에 관한 미국의 구상에 박 대통령이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을 것이고 이를 위한 한국의 역할을 다짐할 것도 뚜렷한 일이다"라며 한미일 군사동맹의 실현을 낙관했다. 거대한 국민적 저항을 체험한 박정희가 한일협정 뒤에 움츠리는 바람에 한미일 군사동맹이 성사되지 못했지만, 당시에는 이 동맹이 조만간 구체화되리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었다.

한미일이 자국 코앞에서 뭉치리라는 전망은 김일성을 움츠러들게 하지 않았다. 도리어 1965년 이후로 그를 더욱 거칠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김신조 사건에서 나타났듯 그는 1968년 청와대까지 습격하려고 특공대를 파견했다. 군사동맹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어도 한미일이 연대하는 상황이 안보 환경을 오히려 악화시켰던 것이다.

남조선혁명론과 베트남전쟁이라는 변수가 함께 작용한 결과이긴 하지만, 1965년에 한미일 협력체제가 형성된 뒤로 북한의 군사행동이 더욱 격증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윤 정권처럼 박 정권도 한일협정의 명분으로 대북 안보를 제시했지만, 이는 한국 안보를 불안하게 만드는 정반대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다.

박 정권은 미국과 일본의 약속을 믿고 국민적 저항을 불사하며 한일협정을 밀어붙였다. 이랬던 박 정권은 얼마 뒤 미·일의 버림을 받기 시작했다.

실패작 리메이크하는 윤석열 정권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6일 일본 도쿄 긴자구의 경양식집 렌가테이에서 기시다 일본 총리와 만찬을 한 뒤 떠나면서 손을 흔들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1968년 1월부터 베트남전에서 밀린 미국은 1969년 7월 25일 닉슨 독트린 발표를 계기로 아시아 문제에서 한발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는 한미일 협력체제에서 박 정권이 소외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베트남전에서 불리해진 미국은 세계적인 화해 무드를 조성하면서 이른바 데탕트 국면을 만들었다. 이를 위해 탁구 대표팀을 중국에 파견해 핑퐁 외교를 하더니(1971년 4월 10일), 동맹국인 대만을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에서 내쫓고 중국을 그 자리에 앉혔다(1971년 10월 25일). 그런 다음, 1972년 2월 28일 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해 중국과의 적대 관계를 청산했다.

일본도 미국을 따라 그런 분위기에 동참했다. 일본은 1972년 9월 29일 중·일 공동성명을 통해 중국과의 국교를 정상화했다. 미국처럼 일본도 냉전체제의 예외를 인정하면서 공산주의 진영과 손을 잡았던 것이다. 박 정권은 이런 흐름에서 '패싱'됐다. 미·일은 함께 손잡고 냉전의 담벼락을 살짝 넘었지만, 박 정권은 담벼락 아래서 구경하는 데 그쳤던 것이다.

박 정권은 7·4남북공동성명으로 남북 간에 데탕트 분위기가 잠깐 감돌았던 1972년 하반기에 10·17 유신체제 선포라는 극단적 행동을 선보였다. 냉전체제에 더욱 단단하게 자신을 가둔 것이다. 이렇게 한 것은 미·일처럼 데탕트에 뛰어들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박 정권에게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미·일이 손잡고 먼저 뛰어든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일협정으로부터 불과 몇 년 뒤인 데탕트 시기에 한미관계와 한일관계는 험악해졌다. 미국은 주한미군 감축 카드를 꺼내 들고, 박 정권은 미국을 못 미더워하며 핵무장 쪽으로 기울었다. 일본은 김대중 납치사건과 문세광 사건(육영수 피살) 당시에 박 정권을 비판하거나 견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박 정권은 그런 일본도 못 미더워했다.

이 때문에 1974년 8월 30일에는 박정희가 우시로쿠 도라오 주한일본대사를 불러 국교 중단 가능성을 시사하는 일까지 있었다. 미국이 급히 중재에 나선 결과로 9월 19일 시나 에쓰사부로 특사가 박정희를 찾아가 사과하지 않았다면, 한일협정 9년 만에 양국 관계가 파탄 나는 일이 발생했을 수 있다.

1965년에 형성된 한미일 협력체제는 북한을 더욱 자극해 한반도 안보 환경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 체제는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1969년부터 흔들리더니, 한국이 미·일의 데탕트 무드에 동참하지 못하고 한미관계·한일관계가 험악해지는 결과로 연결됐다. 1965년은 한국 안보가 가장 나빴던 시절로 진입하는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한국 정부가 미국의 중재에 따라 일본과의 무조건적 제휴를 선택하면서 식민지배 피해자들을 희생시키는 방식은 이처럼 이미 실패로 증명됐다. 이런 실패작을 윤석열 정권이 다시 리메이크하고 있다. 한국의 운명이 어두운 터널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