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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이란 느끼는 것이다. 판단하고 사고하기 전에 느끼는 것으로, 보고 만지고 맡고 맛보고 듣는 오감으로 우리는 무엇을 지각한다.

민병훈의 소설집 <겨울에 대한 감각>은 모두 세 편의 단편과 에세이인지 시인지 알 수 없는 한 편의 글, 그리고 이 전부를 해석한 또 한 편의 평론으로 묶인 소설집이다. 출판사 '자음과 모음'이 야심차게 발간하는 단편집 트리플의 열두 번째 작품으로, 표제작인 '겨울에 대한 감각'으로 시작하여 '벌목에 대한 감각', '불안에 대한 감각'으로 이어지는 세 편의 단편을 묶은 책이라 하겠다.

공통되는 것은 감각이다. 화자가 느끼는 감각이 독자에게 전해지기까지 오롯이 작가의 선택을 거친 언어가 곧 소설의 전부라 해도 좋겠다. 첫 이야기는 표제작인 '겨울에 대한 감각'으로, 읽는 이를 단박에 혼란에 빠뜨린다.
 
<겨울에 대한 감각> 책 표지
 <겨울에 대한 감각> 책 표지
ⓒ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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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기대하는 것, 이 소설엔 '없습니다'

통상 소설에 대해 기대하는 것, 이를테면 주인공이 맞이하는 사건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갈등, 그 해소에 이르는 일련의 이야기를 이 작품으로부터는 찾을 수 없다. 소설은 분명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읽는 이의 기대를 벗어나기 일쑤다. 말하자면 독자는 첫 사건으로부터 다음 사건을, 또 그로부터 그 다음 사건으로의 연결을 기대하게 마련이지만 소설은 첫 문장과 다음 문장조차 독자가 기대하는 방식으로는 내어주지 않는 것이다.

내가 읽는 것이 한 줄에 꿰어지는 이야기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수차례 의심하며 읽고 다시 돌아오길 반복하는 과정으로부터 독자는 첫 이야기의 얼개를 서서히 깨닫는다. 그건 화자가 어머니와 함께 일본 오키나와로 여행을 갔던 이야기이며, 다시 삿포로로 자리를 옮겨 맞이하는 일이기도 하고, 또 공항 출국심사대에서 겪은 어느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두는 시간이며 개연성과는 관련 없는 무엇이고, 낯선 나라에서 겪은 불특정한 사건을 아무렇게나 기록한 것이기도 하다.

불현듯 떠오르는 어떤 기억이 있고, 또 기억 아닌 어느 감각이 스치듯 묘사되기도 한다. 이야기는 나아가는 듯 하다가도 이내 돌아오며, 앞선 문장과 따르는 문장이 서로 어울리지 않기도 한다. 기존의 어느 소설과도 비슷하지 않은 이야기는 읽는 이를 거듭 혼란케 하다가는 마침내 독자 자신의 감각을 일깨우게 되는 것이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이 스치듯 지나가는 가운데 소설을 읽는 이는 각 단어와 문장이 제게 와서 닿는 감각과 마주하게 된다.

이쯤되면 아방가르드나 해체주의 미술사조가 떠오르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무의식을 일깨워야 비로소 느껴지는

문학평론가 박혜진은 이에 대하여 '민병훈이 쓰는 소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질서가 있다면 우리 의식을 스쳐 지나는 슈퍼마켓과 공원과 망상이 같은 범주 안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슈퍼마켓과 공원과 망상을 구분하는 의식이라는 층위를 잊자 그의 소설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증언한다. 말하자면 민병훈의 소설은 무의식을 일깨워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이며, 알고 이해하려 들면 읽히지 않는 무엇이다.

때로 헛소리의 연속처럼 느껴지는 대목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이다. 소설이란 읽는 재미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오락적 장르이기도 할 것인데 민병훈의 소설 세 편에선, 심지어 그 뒤에 실린 에세이에서조차도 글을 읽는 즐거움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는 의도적으로 연속되지 않는 배치를 두어 독자를 불편케 하고, 의식을 이야기의 흐름으로부터 거듭 떼어놓는다. 그러나 또 완전히 의미 없는 이야기는 되지 않아서 이로부터 최소한의 줄거리, 이를테면 죽음과 만남과 여행 따위를 읽어낼 수는 있는 것이다.

감각만 남는 이 소설에도 미덕은 있다

소설 한 편을 읽고 나서도 그것이 대체 어떤 내용이었는지를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좌절감을 맞닥뜨리는 한편으로, 각 글이 남기는 감각이 또 선명하게 남는 탓에 '무의식의 리얼리티'라 불리는 이 소설에 대한 평가에도 고개가 끄덕여지게 된다. 만약 소설로부터 문학성이며 줄거리나 어떤 이해, 또 상징 따위를 제하고 오로지 감각만을 남길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민병훈의 문학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서로 다르지만 또 같다고 보아도 무방할 세 편의 소설에서 거의 유일한,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충분할 미덕을 들어볼 수 있겠다. 그것은 여타의 다른 작품들에서 흔히 마주하게 되는 오만, 즉 작가의 서술로부터 독자가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였다 믿는 마음을 제하고 저의 부족한 독해력을 거듭 의심하게 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박혜진은 '쉽게 단정하고 싶어 하는 욕망과 습관으로부터 벗어나 진짜 자기와 연결되는 시간'을 갖게 된다 하였는데, 이 소설의 낯섦에 대하여 막연한 불쾌함을 느낀 나조차도 이 같은 시간을 만났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겠다.

결국 민병훈의 이토록 낯설고 불친절한 소설에 대하여 나는 이것이 또한 소설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고 만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겨울에 대한 감각

민병훈 (지은이), 자음과모음(2022)


태그:#겨울에 대한 감각, #자음과모음, #소설, #민병훈, #김성호의 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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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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