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26 11:45최종 업데이트 23.03.26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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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뒤에도 미당시문학관·미당문학상·미당문화제 등으로 추앙을 받은 시인 서정주는 살아생전에 친일파라는 굴레를 불편해했다. 27세가 된 1942년부터 3년간 벌인 친일 행위의 오명에서 그는 벗어나고 싶어 했다.

1972년에 나온 <서정주 문학전집> 제3권에서 57세의 서정주는 자신이 친일파나 부일파로 불리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자신은 일본의 욱일승천지세 밑에서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로 체념하며 살았을 뿐이라는 게 그의 해명이었다.

일본의 기세가 뻗어 올라가는 부득이한 상황에서 하늘의 기운을 따라 일본에 순종헸을 따름이라고 그는 자신을 합리화했다. 이 말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서정주의 집에 전시된 미당 서정주 생전 모습. 전시물을 재촬영했다. ⓒ 김종훈

 
친일 행위, 그에게는 먹고사는 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듬해인 1915년 5월 18일 전북 고창에서 출생한 서정주는 한때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중학교) 재학 당시인 1930년에 광주학생운동 1주년 기념 시위를 주도했다가 구속당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는다.


운동권 학생이라는 이유로 일반 학생으로 살아가기 힘들어진 그는 18세 때인 1933년 중앙불교전문강원에 입학했다. 그해에 <동아일보>를 통해 등단한 그는 해인사 부설 해명학원 교원, 만주 양곡주식회사 룽징출장소 직원(1941년까지), 동대문여학교 교사 등을 거쳐 27세 때인 1942년 7월부터 친일 대열에 본격 합류했다.

친일 문인이 된 그는 강압에 눌려 억지로 글을 써주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일제가 그를 꼭 필요로 해서 강압을 행사할 만큼의 문학적 영향력이 그에게는 없었다. 2019년에 <국어문학> 제70집에 수록된 남기혁 군산대 교수의 논문 '해방기 서정주의 글쓰기에 나타난 정치적 욕망 - <김좌진 장군전>과 <이승만 박사전>을 중심으로'는 서정주가 문단에서 영향력을 가진 것은 해방 뒤에 위인전을 집필하면서부터라고 설명한다.

서정주에게는 친일이 억지로 하는 일이 이니라 생활을 해나가기 위한 방편이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서정주 편은 "(1943년) 11월 전후로 최재서가 경영하던 인문사에 입사하여 1944년 2월까지 일본어로 간행된 친일 노선의 문예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를 편집했다"라고 설명한다. 친일파 최재서의 회사에 취업해서 친일 문예지를 전문적으로 편집했다. 친일 행위가 그에게는 먹고사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서재에 앉아 억지로 친일 작품을 끄적댄 뒤 건네주는 정도에 머물지 않았다. 그의 친일 문학은 적극성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1943년 10월 17일부터 23일까지 최재서와 (함께) 용산 주둔 조선군이 김제평야에서 진행한 전쟁 연습에 조선군 보도요원 자격으로 종군했다"라고 위 사전은 설명한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8권에 따르면, 그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도 시와 산문들을 기고했다. 친일파 기업에 입사해 친일 문예지를 전문적으로 편집하고 또 총독부 기관지에 기고하는 모습은 그가 금액의 다소를 떠나 친일 재산의 축적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일관되게 전쟁과 독재 찬미

자신은 친일파나 부일파가 아니라 종천순일파였다는 강변은 그의 인생 궤적과도 모순된다. 그의 문학 인생에서는 전쟁과 독재를 찬미하는 방식으로 문학적 영향력을 늘려가는 패턴이 일관되게 발견된다. 친일 행위를 그의 나머지 인생과 분리할 수 없는 이유다.

전쟁과 독재의 공통점은 소수 지배층을 위해 다수 대중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소수 지배자의 편에 서서 전쟁이나 독재를 찬미하는 방법으로 영향력을 높이는 서정주의 패턴은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그의 나이 30대 후반인 일제강점기 때 있었던 일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1943년 11월 16일 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헌시(獻詩)'에서 그는 학병 지원을 독려했다. 그는 "교복과 교모를 이냥 벗어버리고", "주어진 총칼을 손에 잡으라/ 적의 과녁 위에 육탄을 던져라"라고 한 뒤 "네 위엔 한 송이의 꽃이 피리라"라고 읊었다. 침략전쟁에 헌신해 육탄이 되면 그 위에 한 송이 꽃이 피리라고 선동했던 것이다.

1944년 8월호 <국민문학>에 실린 '무제-사이판섬에서 전원 전사한 영령을 맞이하며'에서는 일본 병사들의 집단 옥쇄를 찬미했다. "희생 제물은 내가 아니면 달리 없으리/ 어머니여, 나 또한 창을 들고 일어서리"라고 선동했다. 일왕을 중심으로 군부와 재계 등으로 구성된 일본 지배층을 위해 일본 민중뿐 아니라 한국 민중까지 희생 제물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문학을 이용해 대중을 전쟁으로 내모는 그의 모습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본격 개입한 지 2년 뒤인 1966년에도 나타났다. 그해 8월 15일에 나온 '다시 비정의 산하에'라는 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견되던 시기에 창작한 이 시에서 그는 8·15 해방 이후 세대의 인생을 간략히 짚어나가다가 마지막 대목에서 "새로 나갈 길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베트남뿐이다/ 베트남뿐이다"라며 베트남에서 활로를 찾자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일제 침략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똑같은 수준에서 놓고 볼 수는 없지만, 대중을 전쟁으로 내모는 데 주저함이 없는 태도는 1966년 작품에서도 분명히 확인된다. 일제 강점기 때 대중을 전쟁으로 내몬 친일 행위가 정말로 부끄럽고 후회됐다면, 이런 시를 또다시 쓰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대중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 그에게는 부담스럽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지배자를 위해 대중을 희생시키는 부조리를 찬미하는 그의 모습은 독재자를 떠받드는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5·18 광주를 짓밟은 직후인 1980년 9월 1일 제11대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1981년 2월에 새로운 헌법 하의 제12대 대선에 출마했다. 이때 66세의 서정주가 50세 된 전두환을 위해 찬조 연설을 하는 모습에서 그런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달 2일 자 <매일경제> 기사 '시인 서정주씨 첫 선거 연설'은 서정주가 1일에는 KBS 텔레비전에서, 2일에는 MBC 라디오에서 전두환 지지 연설을 했다면서 "전 대통령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정직한 사람으로서 그동안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그분을 지지하기로 했다"라는 찬조 연설자의 소감을 소개했다.

5·18이 아니더라도 12·12 쿠데타 때문에라도 전두환을 안 좋게 보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 그런 시절에,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다면서도 전두환을 정직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전두환의 업적을 높이 평가해 지지하기로 했다지만, 1981년 2월까지 전두환이 벌인 굵직한 사건은 12·12 및 5·17 쿠데타와 5·18 학살이었다. 이런데도 그를 높이 평가했다면, 전두환이 강압적으로 질서를 유지한 부분을 좋게 봤다는 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부분을 좋게 봤다는 것은 그의 내면세계가 일반적인 순수 문인들과 크게 달랐음을 의미한다.

서정주는 6월 항쟁 5개월 전인 1987년 1월 18일에는 72세 나이로 '전두환 대통령 각하 제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를 발표했다. 직선제 개헌 투쟁을 매개로 전두환에 대한 분노가 다시 고조되던 시절이었다.

서울 용산구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박종철 열사가 고문치사를 당한 지 나흘 뒤이자, 이 참혹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지 이틀 뒤였다. 이런 시점에 서정주는 한가하게 '전가 탄신일'을 찬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에 자리한 '서정주의 집'. ⓒ 김종훈

 
대중을 제압하는 강력한 권력자에게 심정적으로 기우는 서정주의 모습은 <이승만 박사전>을 저술한 데서도  수 있다. 독립운동가 출신이었던 이승만이 분단을 획책하고 친일 청산을 방해하며 4·3 제주와 여수·순천에서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는 모습을 다 지켜봤으면서도 그런 책을 출간했던 것이다.

위의 남기혁 논문은 "미당에게 전기문 쓰기는 친일 경력으로 인한 불안감에서 벗어날 탈출구였다"라고 한 뒤 "이승만 전기는 유력 정치인인 이승만을 우상화하여 정치적 입지를 공고화하려는 것이었다"라고 해석한다.

강력한 권력자에게 의존하는 것을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지만, 서정주가 미화한 대상들은 대중을 폭압적으로 억누르는 독재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렸다는 것은 그들에게 억눌리는 대중의 아픔과 상처에 대해 그가 무뎠음을 의미한다. 일제 침략 전쟁과 베트남 전쟁으로 대중을 내몰 때의 심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미당 서정주는 자신이 억지로 친일을 한 듯이 변명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의 친일 행위의 저변에 깔린 다수 대중에 대한 경시는 해방 이후의 행적들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친일 행위는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인물을 기념하고 떠받드는 세력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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