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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그림책의 삽화 엽서들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다. 다른 그림들도 다 좋았지만 소년과 소녀가 나란히 서있는 그림이 맘에 들어 한동안 책장 앞에 세워두었다. 막연하게 <소나기>의 소년과 소녀가 저럴까 했었는데, 다니카와 슌타로의 그림책들을 공부하다 알게 되었다. 그 소년과 소녀가 에가시라 미치코가 그림을 그린 <전쟁하지 않아> 속 아이들이라는 것을.
 
전쟁하지 않아
 전쟁하지 않아
ⓒ 북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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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나비는 전쟁하지 않아'로 시작된 그림책은 '전쟁하는 건 어른,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기 아이들 지키기 위해', '하지만 전쟁하면 다 죽지'로 이어간다. 다니카와 슌타로의 사실적인, 그래서 진실을 드러내는 담백한 시구를 에가시라 미치코는 맑고 투명한 수채화로 받는다.

처음 이 책을 봤을 때는 '전쟁'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에가시라 미치코의 그림이 너무 맑아서 어울리지 않는다 싶었다. 그런데 찬찬히 다시 들여다 보니, 표지의 두 소년 소녀가 나무들 사이로 가르질러 햇살이 빛나는 바닷가로 달려가는 그 모습, 그들의 티없는 웃음이 외려, '전쟁'이라는 주제 의식을 역설적으로 살려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채화는 물의 그림이다. 물의 농담을 통해 대상을 투명하게 표현한다. 1978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난 일러스트레이터 에가시라 미치코는 수채화로 자신의 작품 세계를 표현해 내는데 있어 발군인 작가이다. 또한 수채화로 그려낸 풍경뿐만 아니라, 아이라던가, 소년, 소녀 등 그림 속 인물의 순간적인 표정을 잘 담아내는 화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나의 작은 아가야, 너를 사랑해
 나의 작은 아가야, 너를 사랑해
ⓒ 거북이 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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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아가야, 사랑해

사이바라 리에코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여 에가시라 미치코가 만든 그림책 <나의 작은 아가야, 너를 사랑해>는 그렇게 엄마와 아기의 순간을 잘 포착해낸다. 평화로운 하늘가, 전봇대 위에 여유롭게 앉은 새들,  '네가 태어난 그 날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해'라며 그림책은 시작된다.
 
'너무 긴장해서/ 어색하게 안은 너/ 숨은 잘 쉬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던 밤(중략)
모든 게 다 처음이어서/ "어떻게 하지"/ (중략)애태웠던 나날/ 
다들 "힘든 건 잠깐이야"라고 말했지만/ 나는 '지금' 어떻게 해 주길 바랐어.

곱게 잠든 아가의 그림이 너무 이뻐서 책을 펼치다 전개되는 글과 그림들이 '딱 내 맘이네' 하지 않을까. 엄마라면 누구나 잠든 가녀린 아기 얼굴에 귀를 대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고운 생명을 감당해내는 그 순간 순간이 너무나 버겁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 어떻게 해주길 바랬어'라고 쓴 페이지의 그림은 보름달이 뜬 밤, 마치 잠투정이 심한 아이를 달래고 있기라도 하듯 엄마가 아이를 안고 창 밖을 보고 있다. 귀엽지만 떼쟁이가 되어버린 아이, 엄마도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네 맘대로 해'라고 퍼붓게 된다. 설겆이하는 엄마한테 보채는 아이, '알았어'라고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만 대하게 되지 않는다.

표정을 잘 포착하는 에가시라 미치코이건만 좀처럼 엄마의 얼굴을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보는 이들은 그 상황 속 자신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르지 않을까.
 
알고 있어/ 이 시간은 분명 금세 지나가 버린다는 걸(중략)
집안일 같은 거, 모두 나중으로 미뤄도 괜찮을 텐데/ (중략) 왜냐하면 이 시간은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그걸 깨달았을 땐 이미 너는 새로운 꿈을 꾸며 너의 길을 걸어가고 있겠지 

우리 아이들이 '아기'였던 시간이 아주 오래 전임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데 마음이 아려왔다. 내 어깨에 얹혀진 가녀린 생명의 무게가 버거워, 그걸 감당해야 하는 엄마라는 자리가 막막해서 어쩔 줄 몰라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 데 정말 그 시간은 금세 지나가 버렸다.

아이들은 어느새 저만치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다. 돌아보면 끝나지 않을 듯했던 시간들이 훌쩍 가버렸다. 이제는 아이를 낳는 것이 귀한 세상이 되었다지만, 아이를 낳을 엄마라면, 지금 아이를 키우는 게 너무 힘들다 싶은 엄마라면 이 그림책을 한번쯤은 꼭 봤으면 싶다. 에가시라 미치코의 결이 고운, 하지만 거기에 얹힌 진솔한 이야기들이 엄마의 시간을 단단하게 여며줄 것이다.
 
엄마의 기도
 엄마의 기도
ⓒ 북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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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지켜줄게

에가시라 미치코의 그림은 흡사 순정만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듯 부드럽다. 그런데 앞서 <전쟁하지 않아>처럼 그녀가 그린 그림책들의 내용은 결코 말랑말랑하지만은 않다. 그런 또 한 권의 그림책이 부시카 에쓰코가 글을 쓰고, 에가시라 미치코가 그림을 그린 <엄마의 기도>이다 

'사랑스러운 아기가 태어'난다. 그리고 아기는 나비와 메뚜기와 함께 들판을 달리고, 나무와 숨바꼭질하고, 바람과 시소놀이하며, 흐르는 구름, 반짝이는 별에게 위로를 받으며 커간다. 그 작디작은 손이 언젠가는 엄마 손을 꽉 잡을 수 있을 만큼 커질 것이다. 

그림책은 말한다. 평화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하늘에서 받은 시간을 충실히 살아 저마다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라고. 그래서 내 아기도 시간이 '조용히' 흘러 함께 살아갈 사람을 찾게 되고, 똑 닮은 아이를 가진 아빠가 되고, 그래서 엄마가 할머니가 되는 그런 '삶의 순리'가 허락되기를. 엄마, 아니 부모된 이라면 누구나 가장 기본적으로 바라는 것이 아닐까. 공부나 무얼 잘 하는 건, 따지고 보면 그게 허용된 다음의 '사치' 같은 것일지도.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곳에 토끼 인형을 든 아이가 홀로 서있다. 그림책 속 엄마는 기도한다. '부디 이 손으로 총을 겨누는 일이 없기를' '새가 지저귀는 아침을/엄마가 지어주는 아침밥을/부디 빼앗지 말아주길!' 전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내전의 화마로 인해 많은 아이들이 희생되고 있는 걸 보면, 저 소박한 정의가 얼마나 숭고한 희망인가를 깨닫게 된다.

'사랑하는 내 아기/엄마가 지켜줄게'라며 <엄마의 기도>는 마무리된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뭘까? 그 답을 이 두 권의 그림책을 통해 찾아보면 좋겠다. 지금 너와 함께 하는 이 순간의 의미로부터(<나의 작은 아가야, 너를 사랑해>), 네가 한 사람의 어른으로 순탄하게 자라나도록 지켜주겠다는 결의에 찬 다짐까지(<엄마의 기도>).

엄마의 자리, 어른의 자리란 그런 것이다. 지금 여기라는 미시적인 삶과, 아이가 살아가는 세상을 향한 거시적인 시각, 꼭 엄마여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삶 자체가 가져야 할 '균형'이기도 하다.

나의 작은 아가야, 너를 사랑해

에가시라 미치코 (지은이), 사이바라 리에코 (원작), 황진희 (옮긴이), 거북이북스(2019)


엄마의 기도

부시카 에쓰코 (지은이), 에가시라 미치코 (그림), 김숙 (옮긴이), 북뱅크(2017)


전쟁하지 않아

다니카와 슌타로 (글), 에가시라 미치코 (그림), 김숙 (옮긴이), 북뱅크(2015)


태그:#나의작은아가야너를사랑해 , #엄마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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