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경기도의 한 아파트 신축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한 타워크레인 기사가 15일 찍어 보내온 사진. 그는 이날 지상 80미터 높이 타워크레인 조종석에서 최대 풍속이 초속 17미터를 넘었다고 했다. 그는 "조종석 문을 잘 못 열 정도로 바람이 심하고 가만히 있어도 흔들린다"고 했다.
 경기도의 한 아파트 신축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한 타워크레인 기사가 15일 찍어 보내온 사진. 그는 이날 지상 80미터 높이 타워크레인 조종석에서 최대 풍속이 초속 17미터를 넘었다고 했다. 그는 "조종석 문을 잘 못 열 정도로 바람이 심하고 가만히 있어도 흔들린다"고 했다.
ⓒ 김성욱

관련사진보기

 
"오늘 바람이 초속 17.8미터까지 불어요. 규정상 초속 15미터 넘어가면 작업 중지해야 돼요. 근데 원청 건설사는 아무 말 안 해요. 뻔히 규정 위반인 거 알면서. 타워크레인 막 흔들리는데 우린 그냥 위에서 일해야 되는 거예요."

15일 경기도의 한 아파트 신축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타워크레인 기사 A(58)씨가 말했다. 타워크레인은 타워에 장착돼 무거운 것들을 필요한 곳에 옮기는 대형 크레인으로, 고층 건설현장에서 필수 장비다. A씨는 지상 80미터 높이 크레인 조종석에서 일한다. A씨는 "초속 15미터면 조종석 문을 여닫기 힘들 정도로 흔들림이 심하다"라며 "3톤이 넘는 인양물도 바람에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아래서 일하는 작업자들에게도 위험하다"고 했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37조 2항을 보면, '사업주는 순간풍속이 초당 10미터를 초과하는 경우 타워크레인의 설치·수리·점검 또는 해체 작업을 중지해야 하며, 순간풍속이 초당 15미터를 초과하는 경우에는 타워크레인의 운전작업을 중지해야 한다'고 명시돼있다. 하지만 순간풍속이 초당 17미터를 초과한 이날, A씨 현장은 타워크레인 작업을 중지하지 않았다. 초속 10미터가 넘었다며 '삐삐삐' 울리는 풍속계 자동 경고음만 하루 종일 요란하게 울렸다.
  
▲ 강풍이 부는 지상 80미터 높이 타워크레인 15일, 경기도의 한 아파트 신축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한 타워크레인 기사가 지상 80미터 높이의 조정석에서 찍어 보낸 동영상.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37조 2항에 따르면, 초속 15미터 강풍이 불면 타워크레인 작업을 중지해야 하지만, 초속 17미터까지 바람이 분 이날 현장에서 작업 중지는 없었다. 초속 10미터만 넘어도 '삐' 소리가 나는 풍향계만 종일 요란했다.
ⓒ 김성욱

관련영상보기


A씨 스스로 자신의 안전을 위해 크레인에서 내려오면 되지 않을까? 안 된다. 국토교통부가 최근 내놓은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이는 '태업'이 된다.  

국토부가 지난 12일 발표한 '타워크레인 조종사의 성실의무 위반 판단기준'을 보면, '순간풍속이 기준치를 초과했다는 이유로 원도급사의 승인 없이 조종석에서 임의 이탈하는 경우'도 '타워크레인 기사의 불성실 업무유형'에 포함됐다. 이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타워크레인 기사가 이같은 '태업'을 한 달에 두 번만 해도 최대 1년간 면허 정지 처분을 받는다.

국토부는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27조 2항에 대해 "조종석 이탈 등 후속 대응은 원도급사가 결정할 사항"이라고 주장했다. 순간풍속이 초속 15미터를 넘어 고층 크레인이 흔들린다 해도, 원청이 지시하지 않는 한 작업자 마음대로 크레인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장 안전을 감독해야 할 정부가 도리어 위험작업을 인정해준 꼴이다.

현장과 동떨어진 국토부 가이드라인... "건설사 말만 들었나"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14일 서울 동대문구의 한 주택재개발 신축공사 현장을 방문해 타워크레인 운용 관련 점검을 하고 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14일 서울 동대문구의 한 주택재개발 신축공사 현장을 방문해 타워크레인 운용 관련 점검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현장의 타워크레인 기사들은 '풍속' 조항 이외에도 이번 국토부 가이드라인을 두고 "현장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국토부가 ▲ '현장에서 정한 작업개시 시간까지 정당한 사유 없이 조종석 탑승 등 작업준비를 완료하지 못한 경우'도 태업으로 규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경기도 화성시의 한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타워크레인 기사 B(56)씨는 "아침 7시 '땡' 치면 조종석에 앉아있으라는 얘기인데, 높이 50~100미터 이상 되는 타워크레인 조종석까지 사다리를 잡고 올라가려면 최소 15분은 걸린다"라며 "사다리를 잡고 오르기 전 오늘 하루 어떤 작업을 하는지 미리 논의하는 조회시간도 있고, 조종석에 오르고 나서도 장비에 이상이 없는지 시운전하는 시간도 가져야 한다. 작업개시 시간보다 한 시간은 일찍 출근하란 얘기냐"고 했다.

경기도 광명시 아파트 신축현장에서 일하는 타워크레인 기사 C(59)씨는 국토부 가이드라인의 기준들이 너무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가이드라인에는 ▲ '평소보다 의도적으로 작업을 늦춰서 후속공정 지연 등 차질이 발생한 경우' ▲ '정상 가동속도에서 벗어나 고의로 과도하게 저속 운행하는 경우'를 태업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평소보다', '정상 속도' 같은 표현에 객관적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C씨는 "정상 속도가 도대체 몇이라는 건지 나도 한번 물어보고 싶다"라며 "바람의 세기, 양중물의 무게, 양중물과 크레인 사이의 거리, 착지시키는 높이 등에 따라 다 적절한 속도가 다르고 그게 작업자들 안전과 직결되는데, 마치 '내 마음에 안 들면 태업'이라는 말 같다"고 했다. 그는 "정부가 노동자들 말은 안 듣고, 어떻게든 공기를 단축시키려는 건설사들 말만 듣고 가이드라인을 만든 것 같다"고 했다.

"타워크레인에 '운행기록장치'? 원희룡 장관, 현장 몰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14일 서울 동대문구의 한 주택재개발 신축공사 현장을 방문해 타워크레인 운용 관련 점검을 하고 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14일 서울 동대문구의 한 주택재개발 신축공사 현장을 방문해 타워크레인 운용 관련 점검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원희룡 장관이 최근 타워크레인 기사들의 태업을 뿌리뽑겠다며 거론한 '타워크레인 운행기록장치 의무 부착' 방안도 현장에선 "전형적인 탁상행정"이라는 반응이었다.

A씨는 "화물차나 택시, 버스는 바퀴를 굴려서 돌아다니는 장비이기 때문에 운행기록장치가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타워크레인은 땅에 박혀있는 장비인데 무슨 운행기록을 관리한다는 건지 모르겠다"라며 "기본적으로 타워크레인 작업은 지상의 작업자나 신호수들이 요청하는 대로 움직인다. 운행기록장치를 달아서 감시한다면, 아래에서 요청이 없더라도 그냥 빈 허공에서 크레인을 계속 움직이라는 말이냐"고 반문했다.

C씨도 "이미 최근 현장에서는 안전 등을 이유로 인양물을 거는 타워크레인 후크에 카메라들이 달려있다"라며 "원청에서도 그 카메라를 통해 작업상황을 다 보고 감시하는데 무슨 운행기록장치를 또 단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원 장관은 지난 14일 서울 동대문구의 한 건설현장에서 진행한 '타워크레인 태업 특별점검 현장방문' 자리에서 "타워크레인 기사들의 정도를 넘어선 태업, 반복되는 태업은 불법"이라며 "운행기록장치 의무 장착을 법제화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건설노조 "월례비 없애고 법 지키자는 게 태업? '준법투쟁?"
  
14일 서울 동대문구의 한 주택재개발 신축공사 현장에 타워크레인이 세워져 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서울 동대문구의 한 주택재개발 신축공사장을 방문해 타워크레인 운용과 관련해 국토교통부, 고용노동부, 서울시, 경찰청 등의 기관이 참여한 건설현장 점검팀을 격려하고 현장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14일 서울 동대문구의 한 주택재개발 신축공사 현장에 타워크레인이 세워져 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서울 동대문구의 한 주택재개발 신축공사장을 방문해 타워크레인 운용과 관련해 국토교통부, 고용노동부, 서울시, 경찰청 등의 기관이 참여한 건설현장 점검팀을 격려하고 현장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국토부의 타워크레인 태업 가이드라인은 최근 민주노총 건설노조가 그간 초과근로, 위험작업 등의 대가로 음성적으로 받아온 타워크레인 '월례비'를 없애는 데 동의하고, 주 52시간과 산업안전보건법 등 법 테두리 안에서 작업하겠다고 선언한 데 대한 대응 성격으로 나왔다. 원희룡 장관은 12일 타워크레인 태업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면서 "타워크레인 조종사의 작업지연 등으로 공사차질이 발생하고 있다"라며 "신고 접수된 건들은 신속히 처분절차를 밟겠다"고 말했다.
  
정민호 민주노총 건설노조 타워크레인분과위원장은 통화에서 "잘못된 월례비 관행을 없애기 위해 이제는 우리도 불법 작업을 안 하겠다는 건데, 정부는 이를 마치 '태업', '준법투쟁'이라고 호도한다"라며 "국토부 장관이면 타워크레인 노동자들의 임금 정상화를 위해 원청 직고용 등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고민해야 하는데, 당장 공기단축이 더 중요하다는 건설사들 편만 들고 있다"고 했다. 

태그:#원희룡, #타워크레인, #건설현장, #국토부, #노동
댓글2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