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계 배우 앙쯔충(양자경)이 12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5회 아카데미 영화상(오스카상) 시상식에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뒤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시아계 배우가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말레이시아계 배우 앙쯔충(양자경)이 12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5회 아카데미 영화상(오스카상) 시상식에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뒤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시아계 배우가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할리우드 AFP·게티이미지

 
딸애가 지난 연말에 물었다. "엄마 올해의 영화는 뭐야? 나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나는 잠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 <헤어질 결심> 사이에서 고민하다, "만장일치로 하자. 우리 모녀 올해의 영화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이랬으니 오스카상이 이 영화에 집중되길 바라는 것은 당연지사. 무엇보다 나는 양자경을 응원했다. '양쯔충'이 올바른 표기라지만, 이 글에서 나는 옛 팬심을 담아 양자경이라 부르겠다. 독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양자경이 '여성 여러분(Ladies)'을 호명한 이유
 
내 연배쯤(50대) 되는 이치고 양자경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는 <예스 마담>의 유려한 액션으로 그 옛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후 <와호장룡> 등 여러 작품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 정점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있다. 그는 이 영화에서 그의 나이 때쯤의 여자들이 처한 실의와 곤경을 진지하게 보여주었다. 내가 그의 수상을 응원했던 이유다.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쟁쟁한 후보들이 올라 양자경의 수상을 예단하긴 어려웠지만, 내 예감은 '받는다'였다. 60이라는 나이에 아시아인으로 처음으로 오스카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물론 오스카는 '로컬'이지만, 아시아인이 이 상을 받는 데 95년이 걸렸다는 것과 그가 60이라는 늦은 나이에 이 자리에 도착했다는 것은, 그의 영광을 말하기 전에 미 로컬 영화계가 성찰해야 할 지점이다.
 
그의 수상 소식이 전해지고 무척 기쁘던 차, 수상 의미를 퇴색하게 하는 뉴스가 전해졌다. SBS가 그의 수상 소감을 편집해 내보냈다는 소식이었다. 우선 그의 수상을 옮기면 이렇다.

"저의 수상은 희망과 가능성의 증거입니다. 여성 여러분, 다른 이들이 여러분에게 전성기는 지났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세요. 결코 포기하지 마세요."
 
SBS가 그의 수상 소감을 전하며 얄미운 편집을 한 부분은 위 인용 문장의 '여성 여러분(Ladies)'이다. 논란이 일자 SBS는 "여성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잘랐다"고 해명한 후, 다시 '여성 여러분'이 편집되지 않은 온전한 수상 소감을 내보내긴 했다. 하지만 필자는 이들의 해명에 젠더감수성이 턱없이 부족했음을 지적하고 싶다.
 
우선 양자경이 굳이 '여성 여러분(Ladies)'이라고 부른 호명의 함의를 새겨보자. 그는 여성들 특히 그처럼 중노년의 여성들에게 힘(그가 언급한 대로 '희망과 가능성')을 주고 싶었을 테다. 그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연기한 '에블린' 역시, 엄마로, 아내로, 딸로 평생을 고되게 산 중노년의 '아줌마'다. 그는 엄하기만 하던 가부장인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결혼해 남편과 미국으로 떠났다. 딸 조이가 태어났고 이 아이만은 여봐란듯이 잘 키우며 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사가 어디 그리 술술 풀리던가. 딸은 엇나가고, 남편은 무능하고, 생계는 빡빡해 밀려드는 고지서에 파묻힐 판인데, 뭘 잘못했다고 세무서는 그를 고소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게다 고통의 화룡점정을 찍기 위해 늙은 아버지가 초로의 딸에게 부양 받기 위해 미국에 건너 와있다. 오, 숨구멍이 없지 않은가.

이것이 중국계 미국인 이민자 여성이 처한 각박한 현실이고, 이 꽉 막힌 현실을 타개하고자 다중우주에서 파란만장한 격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가족 모두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건 격투를 벌여야 하는 신산한 여성(엄마, 아내, 딸)의 삶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있었다. 영화가 품은 이런 함의와 아시아 여성으로서 오스카상을 수상하기까지 걸린 인고의 시간을 되새겨볼 때, 그의 수상 소감의 '여성 여러분'은 쉽게 편집될 수 없다.
 
그가 왜 '여성 여러분'이라고 언급했는지는 양자경이 오스카상 수상 후 NYT에 보낸 기고문에서도 그 함의를 찾을 수 있다. 그는 기고문에서, 자신의 수상이 기쁘지만 자신에게로 향하는 관심을 세계 곳곳의 위기에 처한 여성들로 옮겨줄 것을 요청했다. 네팔, 시리아 지진 등의 재난에 처한 소녀와 여성들은 재난뿐 아니라 성폭력 등 젠더폭력의 위험까지 감당하며 살고 있다. 그는 이런 위기에 처한 여성들에게 관심과 연대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이다. 그가 호명한 '여성 여러분'이 생략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보다 명징히 설명되고 있다.
 
여성의 전성기를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
 
 제95회 아카데미 영화상(오스카상)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말레이시아 출신 배우 양쯔충(양자경)(왼쪽)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브렌던 프레이저가 트로피를 들고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제95회 아카데미 영화상(오스카상)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말레이시아 출신 배우 양쯔충(양자경)(왼쪽)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브렌던 프레이저가 트로피를 들고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 할리우드 AFP

 
그의 수상 소감 중 "전성기는 지났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세요" 부분은 늙어가는 중노년의 여성들에게 더 찡하게 다가온다. 사느라 바빠 전성기가 있었나 싶지만, 예전엔 여자들 나이에 위계를 세워 결혼을 압박하는 무기로 썼다. 남자들에겐 전혀 없는 나이 계급이 여자들에게만 존재한다는 것은, 이 사회가 여자들에게 특히 나이 든 여자들에게 매우 불평등한 곳임을 드러낸다. 이런 면에서 양자경이 위에 언급한 말은 차별 당하는 나이 든 여자들에게 보내는 연대와 지지의 표현이다.
 
전성기 혹은 황금기라는 말은 거북하지만, 여성들이 전성기를 누릴 수 없는 이유는 여성의 탓이 아니라 성차별적 구조 때문이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는 물론이고 늙어도 헤어날 수 없는 돌봄의 굴레는 여성을 평생 옭아맨다. 한양대 임상간호대학원 김다미씨 석사학위 논문의 연구 결과를 보면, 치매 노인을 돌보는 가족 구성원의 82.4%가 여성이고, 이 중 50대 이상이 가장 많았다. 이 통계는 여성이 전 생애 주기를 통해 왜 남성과 같은 전성기를 누릴 수 없는지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여성이 전성기를 구가할 사회구조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은 나이에 뒤늦게 꽃을 피우는 인생도 있다. 모두가 살만하거나 시난고난한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뒤로 두고, 이제라도 누구의 엄마도 아내도 딸도 아닌 자신의 인생을 가지려는 분투 중에 있는 것이다. 60~70대의 여성 청소노동자들이 대기업의 불법 해고에 맞서 싸우고, 반찬값이나 벌러 나온다는 조롱과 모욕을 드잡이해 임금노동자로 호명하고 이에 걸맞은 임금을 내놓으라고 투쟁하고 있다. 공적인 영역의 싸움뿐 아니라, 내 주변의 '아줌마'들도 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 끊임없이 인정 투쟁 중이다.
 
내 주변의 '싸우는 아줌마들'은 60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남은 생은 자신을 위해, 자신이 정한 가치를 지키며 살겠노라 선언했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꿈꾸어온 이는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늘 자신의 고유한 공간을 원했던 이는 작은 책방을 3년째 운영 중이고,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지배해 온 것이 분단 이데올로기임을 자각한 이는 이를 해체하는 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 세상이 전성기를 지난 '아줌마'라 폄하하는 이들이 세간의 평가 따위를 허락하지 않은 채, 자신의 삶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들의 삶에 전성기 같은 것은 없다. 내가 사랑하고 분투하고 있는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삶에 진심이고 열심인 모든 여성들(Ladies)에게 파이팅을 보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게시됩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양자경 SBS 양자경 수상 소감 편집 오스카상 여성 연대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