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5 18:25최종 업데이트 23.03.15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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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캄보디아 프놈펜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2022.11.13 ⓒ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은 일제 피해자들의 한을 억누른 채 일본을 방문한다. 16일 도쿄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게 될 그는 번화가인 도쿄 긴자 주변의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뒤이어 돈가스와 오므라이스로 유명한 렌가테이에서 2차를 하게 된다.

렌가테이가 생긴 1895년은 1894년에 동학군을 진압하겠다며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이 청일전쟁까지 일으켜 승리를 확정한 해이자 을미사변이 발생해 명성황후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해다. 그런 1895년에 탄생한 렌가타이에서 한·일 두 정상이 2차 자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2차'라는 표현은 일본 언론 보도에도 나온다. 14일 자 <요미우리신문>에 실린 '일·한 수뇌 2차회 방안, 오므라이스 좋아하는 윤씨의 희망 배려해 긴자의 유명점에서(日韓首脳 2次会 案、オムライス好き尹氏の希望踏まえ銀座の名店で)'라는 기사에도 2차 자리를 뜻하는 2차회(2次會)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이 기사는 "정부는 16일 도쿄도 내에서 예정된 기시다 수상과 한국 윤석열 대통령의 회담 뒤의 만찬회를 이례적인 2차회로 정하고 윤씨를 대접할 방침을 굳혔다"라면서 "2차회는 오므라이스를 좋아하는 윤씨의 희망을 배려해 양식 유명점으로 알려진 도쿄 긴자의 렌가테이(煉瓦亭)에서 하는 방향이다"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1차 식사 때와 달리 2차 때는 소수만 참여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수뇌 간의 신뢰 관계를 깊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라고 덧붙였다. 1차 식사를 한 뒤 신뢰를 두텁게 하고자 2차를 간다고 하니, 2차 때는 주류도 나오리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위 보도에도 언급됐듯이, 이번 대우는 "이례적"이다. 일본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윤 정부가 강제징용(강제동원) 문제를 일본의 희망대로 해결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인터넷판 NHK 6일 자 기사인 "하야시 외상 '일한 관계 건전하게 되돌린 것으로 평가한다' 징용 해결책(林外相 日韓関係健全に戻すもの 評価する 徴用 解決策)"에 따르면, 정책위원회 의장에 해당하는 자민당의 하기우다 고이치 정무조사회장은 "윤 정권이 국내 문제로 깔끔하게 자국 안에서 해결한 것은 좋았다"라고 평가했다.

지난 6일 윤 정부가 발표한 강제징용 처리 방안(이른바 강제징용 해법)을 '깔끔하다, 좋았다'라고 호평한 것이다. 이 정도 평가가 나왔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정상회담 뒤에 식당을 두 군데나 방문하는 이례적인 접대 아이디어를 내게 됐다고 볼 수 있다.

강제징용·위안부·강제징병 피해자와 유족들은 일본제국주의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한을 억누른 뒤에 윤 대통령은 도쿄를 방문해 하루 저녁에 식당을 두 군데 가게 된다.

침략 전쟁, 동원한 자와 동원된 자
 

16일 도쿄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게 될 윤석열 대통령은 번화가인 도쿄 긴자 주변의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뒤이어 돈가스와 오므라이스로 유명한 렌가타이에서 2차를 하게 된다. ⓒ 위키 퍼블릭 도메인


그런데 그가 2차로 찾게 될 식당 역시 일본제국주의와 무관치 않다. 이곳 역시 일제 피해를 입은 장소다. 그래서 그곳에도 그 시절의 흔적이 사람들의 뇌리에 서려 있다. 식민지 사람들뿐 아니라 일본 민중도 징용·위안부·징병 피해를 입었다. 그런 흔적이 렌가테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도 묻어 있다. 

종합 출판사인 고단샤(講談社)가 운영하는 패션 사이트인 < FORZA STYLE >에 '오므라이스·커틀릿은 여기서 태어났다. 125년 사랑받은 렌가테이의 역사란?(オムライス、カツレツはここで生まれた。125年愛される煉瓦亭の歴史とは?)'이라는 기사가 2020년 7월 13일 실렸다.

인터뷰 형식인 이 기사에서, 기다 고이치로 렌가테이 사장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 식당을 운영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소개했다. 그는 할아버지가 붉은 종이로 된 전쟁 소집 영장을 받았다고 하면서 "직업 군인은 아니었지만, 만주 사변에서 히로시마의 원폭까지 경험했다"라고 말했다.

당시의 일본인 병사들은 식민지인의 눈에는 제국주의의 일원이었지만, 일본 내에서는 대부분이 민중 계급인 사람들이었다. 할아버지가 직업 군인도 아니면서 1931년 만주사변 때부터 1945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 때까지 경험했다는 기다 고이치로의 회고담 속에 과장되거나 부정확한 설명이 섞여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의 할아버지 역시 전쟁에 동원된 일반인 중 하나였다.

그의 집안은 1945년에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종전 당시 히로시마는 전멸됐다고 하며, 가족에게는 부고가 도착했습니다만"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 때문에 집안 사람들은 그의 할아버지가 히로시마에서 사망했다고 믿게 됐다. 하지만, 그의 할아버지는 무사히 살아서 돌아왔다.

군인으로 동원됐다가 죽을 뻔했던 기다 고이치로의 할아버지만 일제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렌가테이 점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쇼와 6년~18년 무렵까지는 본점인 긴자 4가와 이곳 3가의 두 점포가 있었습니다만, 본점은 전쟁으로 불타고 여기 3가의 점포 하나가 (남게) 되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쇼와 일왕(히로히토)의 연호가 사용된 지 18년째인 1943년 무렵까지는 점포가 두 개였다가 미군 폭격 등으로 불타서 분점 하나만 남게 됐던 것이다. "전쟁 중에 중단 상태로 내몰려 정말로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침략 전쟁 당시 사장도 시련을 겪고 본점 건물도 훼손됐던 곳이 윤 대통령이 방문할 렌가테이다.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일제 강제징용 문제를 또 한번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하는 장소다.

그곳으로 윤 대통령을 안내하게 될 기시다 총리는 강제징용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다. 그가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의 주역 중 하나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윤 정권을 압박해 2023년 3·6 강제징용 선언을 유도한 주역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기시다 총리의 할아버지인 기시다 마사키(1895~1961)는 이토 히로부미가 창당한 입헌정우회의 공천을 받아 1928년 중의원에 진출한 6선 의원이었다. 그는 중일전쟁 시기인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1937~1939) 때는 해군참여관을 지내고, 제2차 대전 시기인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1944~1945) 때는 해군 정무차관을 지냈다.

기시다 마사키는 장관급은 아니었지만 침략 전쟁 시절의 일본군과 관련된 고위 인사였다. 그는 당시의 렌가테이 사장과 정반대 위치에 있었다. 일본 국민을 전쟁으로 동원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의 손자인 기시다 총리가 16일 저녁 렌가테이에서 숙연한 마음으로 식사해야 할 이유다.

한국·오키나와·대만·중국 등지뿐 아니라 일본에도 제국주의 침략 전쟁의 흔적이 당연히 남아 있다. 1945년 이전의 일본 민중과 일본 땅도 제국주의 전쟁의 피해를 받았다. 한국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한을 함께 억누른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2차 장소로 잡은 식당도 그런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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