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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무렵 쓰여진 <미암일기>를 비롯 <묵재일기>, <쇄미록> 등의 일기에는 일상에서 쓰는 생활용품이나 농수산물 등 다종다양한 물품들을 서로 주고받는 것을 기록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일종의 가계부처럼 꼼꼼하게 물품을 가져온 사람과 숫자, 목적 등이 자세히 적혀 있다.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이러한 물품들을 보면 단순히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경제 활동이라 느껴질 정도로 많은 물품들이 오고 간다. 이를 보면 돈을 주고 사고파는 시장경제보다는 물물교환과 같은 선물경제가 더 발달해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로인해 당시의 선물경제도 엄연히 경제체계의 한 부분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대체적으로 조선 중기까지는 이러한 선물경제가 상당히 보편화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시장이 활성화 되는 조선 후기에 와서야 상품경제가 발달하게 되어 당시의 이러한 선물경제를 경제체계의 한 부분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어 보인다.

선물은 일상적인 경제 활동

<미암일기>를 보면 유희춘은 1568년 5월 관직생활로 인해 서울에 있을 때 나주의 나사돈 형제와 해남에 있는 가까운 일가들에게 후추를 보낸다. 후추는 금보다 비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귀한 향신료였다. 나주의 나사돈에게는 전날 보내온 선물에 대한 답례 같은 것이었고 해남은 누님을 비롯 첩과 가까운 일가들에게 보낸 것이었다.

1568년 5월 초6일
나주의 나사침이 버선 두 벌, 모해의(毛海衣) 한 말, 노루포 큰 것 하나, 어란(魚卵) 한 척(隻)을 보내왔다. 나사돈도 말린 꿩을 보내왔다.

1568년 5월 초7일
후추를 나사돈 삼형제가 있는 곳에 나누어 보냈는데 나사침이 있는 곳에는 청심환, 소합환 등의 약을 첨가해서 보냈다.
후추를 해남 누님과 이생, 첩, 어란의 정홍, 생원 윤복에게 나누어 보냈다.


후추는 상당히 귀한 물품이었지만 유희춘이 높은 직의 관료였기 때문에 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주의 나사돈이 보낸 것은 버선을 비롯 일상에서 먹는 식료품 같은 것이었다.

선물은 곡물류를 비롯하여 어패류, 찬물류, 면포, 의류, 문방구류, 용구류, 포육류, 약재류 등 일상용품에서 사치품까지 망라되어 있었다.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규모도 상당하여 이것만으로 생활하여도 별 어려움이 없을 정도다.

이러한 물품은 아는 사람이 죽었을 때 부의(賻儀)용으로도 사용되었다. 화폐가 활발하게 유통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유희춘은 사위인 윤관중에게 김 두접을 부의하게 한다.

1574년 6월 초7일
윤관중에게 김 두 접을 가지고 원첨지 태부인의 상에 가서 부의하게 했다.


유희춘에게 오고 간 물품을 보면 주로 해산물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유희춘의 본가가 있는 해남이 바다와 인접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가인 윤홍중이 영광에서 보낸 것을 보면 유명한 조기를 비롯 젓갈류가 많다.

1568년 5월 20일
17일에 영광 사람이 와서 조기 100속(束), 구리 50속, 어란젓 여덟 말들이 독, 작은 새우젓 네 동이들이 항아리를 바치니 이는 윤홍중이 보낸 것이다.

 
자연산 김(해의)은 바위에 붙어있는 것을 채취하여 만들었는데 지금도 일부 섬에서는 이런 방법으로 만들고 있다.
▲ 자연산 김채취 자연산 김(해의)은 바위에 붙어있는 것을 채취하여 만들었는데 지금도 일부 섬에서는 이런 방법으로 만들고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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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에서 올라온 것을 보면 전복을 비롯, 낙지와 석화(굴)가 있고 김(해의)이 있어 당시에도 김이 생산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70년 7월 24일
아침에 해남의 잡물색(雜物色) 차무철이 바다로 해서 올라왔는데 마른 숭어 한 두름, 큰 전복 한접, 조기 다섯 두름은 성주가 보낸 것이고, 마른 숭어 세 마리는 정유공이 보낸 것이며, 큰 숭어 세 마리, 마른 준어 두 두름, 미역 두 동은 무철이 바친 것이다.


뇌물이냐 의례적인 주고받기냐

유희춘은 <미암일기>에서 뇌물성 선물로 보이는 물품에 대해서도 꼼꼼히 주고받은 내역을 기록하고 있다. 이를 굳이 다 일기에 기록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 같은 물품의 왕래 중에 관료들이 주로 더 높은 관직에 있는 이에게 수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을 보면 이것이 뇌물인지 자유로운 유통인지 분간이 안들 정도다.

<미암일기>는 잘 알려져 있듯이 개인의 일기를 넘어 선조실록을 편찬하는데 활용된 일기다. 이를 보면 개인의 일기를 넘어 공적 기록으로까지 느껴진다. 해남의 성주였던 임응룡은 수시로 유희춘에게 다양한 물품들을 보낸다. 이는 물론 유희춘이 중앙의 유력한 관료이기 때문이었다.

1569년 윤6월 16일
해남의 송원복이 올라왔는데 성주 임응룡이 말린 숭어 다섯 마리, 피왜선 다섯자루를 보내왔다.


이 같은 청탁성 선물은 다분히 대가를 바라고 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유희춘은 이러한 청탁성 물품을 받고 청하는 것을 들어주기도 한다.

1568년 7월 20일
해남의 훈련봉사 김경복이 찾아왔기에 나는 부채를 권직장과 경복에게 주었다.
첨지 윤행과 단성의 수령 권몽익이 잇달아 찾아왔는데 단성령이 그 노비가 금난군에게 붙들렸으므로 풀어주게 해달라고 청하므로 나는 들어주었다.


이 같은 청탁성 선물 중에는 지방관이 부임지의 친인척 동료에게 물품을 전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현직관료의 부탁을 받아 부임지 친인척 동료에게 물자를 전달하는 행위를 칭념이라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중앙과 지방의 양반관료는 서로간의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었다.

이처럼 물품을 통한 선물은 명절이나 절기, 생신, 혼례, 제례와 같은 집안의 대소사에 많이 오간다. 당시의 선물은 서로 주고받는 상호 부조적인 것으로 손님 접대, 선물에 대한 답례, 수고료 명목으로 지급된 것이었다.

지금도 명절이 되면 선물이 오간다.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관습처럼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떡값은 명절을 잘 지내라고 서로의 정을 담아 오간 것인데 어느 순간 뇌물이 되어 지난 2016년 김영란법이 생긴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 같다.

16세기 양반 사대부들의 선물 주고받기는 개인의 관직 그리고 친족망과 교유관계를 바탕으로 한 상호 공조의 관행 같은 것이었다. 당시 사회를 유연하게 존속시키는 방책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태그:#미암일기, #묵재일기, #선물경제, #후추, #해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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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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