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3 15:23최종 업데이트 23.03.13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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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6일 윤석열 정부가 해법이라며 내놓은 강제징용(강제동원) 최종안에 대한 국민적 반발이 만만치 않다. 대한민국이 일본 전범기업의 책임을 떠안는 제3자 변제(대위변제) 방식에 대한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10일 보도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59%가 '일본의 사과·배상이 없어 반대한다'고 대답했고, 같은 날 보도된 리얼미터 조사에서는 57.9%가 '잘못한 결정'이라고 응답했다. 약 2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정치 데이터 플랫폼 <옥소 폴리틱스>의 빅데이터 분석에서는 69%가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헤럴드경제>가 12일 보도했다.


일본 언론보도에 따르면, 사회학자이자 전 호세이대 총장인 다나카 유코 명예교수는 12일 TBC 방송에 출연해 "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정부 간의 교류로 잘되고 있는 것은 좋다고 생각합니다만"이라고 한 뒤 "일한청구권협정 때도 정부 간, 이번에도 정부 간"이라며 "국민이 방치돼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라고 지적했다.

다나카 유코 교수는 두 정부 간에는 일이 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국민들의 분위기를 봐야 한다고 언급했다. 식민지배문제의 해결 없이 민사채권관계만 봉합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때도 정부끼리는 좋았지만 국민들은 달랐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의 지적처럼 우리 국민들은 두 정부의 처사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12일 대통령실이 해명에 가까운 브리핑 자료를 내놓았다. 최종안 발표 다음 날인 7일 윤석열 대통령의 국무회의 마무리 발언을 소개하면서 "강제동원 문제 해법은 대선 공약을 실천한 것"이라고 밝히는 자료다.

이에 따르면, 7일 국무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대선 때 외교정책은 한·미 경제·안보 동맹을 통한 확장억제 강화, 김대중-오부치 정신의 계승과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글로벌 중추국가 지향이 핵심 방향이었다"라며 "취임 초부터 외교부에 해결 방안을 주문했고, 그동안 여러 우여곡절을 통해서 우리 정부의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이 이미 대선 때부터 공약했던 사항을 이번에 실현시켰을 뿐이라는 취지로 해명한 것이다.

대통령실은 위 발언을 소개하면서 대통령 집무실 책상 위에 적힌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The Buck Stops Here)"는 글귀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대통령실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작년 5월 방한 때에 이 글귀가 적힌 패를 선물했다면서 윤 대통령이 그런 의지로 이번에 책임 있는 결단을 내리게 됐다고 강조했다.

핵전쟁을 방지하는 확장억제를 강화(전략폭격기·전략핵잠수함·ICBM 과시 등)하고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하며 글로벌 중추국가가 되고자 일본의 전쟁범죄책임을 떠안는 결단을 내렸다는 대통령실의 해명은 해명이라고 하기에도 엉성하다.

동시에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끌어들여 국민적 반발을 줄이려는 시도로 비칠 여지도 있다.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고 하면서 실상은 "김대중에게도 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외교부 장관의 사실상 항복 선언
 

박진 외교부 장관이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배상 해법을 발표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한국 경제의 대일 의존이 심화된 때인 1998년 10월 8일 발표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은 사상 최초로 사죄의 대상을 "한국 국민"으로 명시하면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피해 배상이나 복구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는 한계가 있다. 말뿐인 사과를 받아냈다는 점에서 김대중 정부의 외교적 한계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이번에 벌인 일을 김대중 대통령과 연결하는 것은 무리다. 윤 정부가 기시다 후미오 내각으로부터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하겠다'는 입장 표명을 받아낸다 해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배상을 받아내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김대중 정부와 윤 정부가 다르지 않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다름'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우선, 김대중 정부는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관철시킨 반면, 윤 정부는 사과를 받아내는 것조차 실패했다. 직접적인 사과 없이 '과거의 담화를 계승하겠다'는 표명을 받아내는 선에서 사안이 봉합되고 있다.

또, 김대중 정부는 식민지배 문제를 총론 차원에서 다뤘기 때문에, 1998년의 외교적 한계 혹은 실패도 총론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 정부가 강제징용·위안부·강제징병 같은 구체적 사안에서 양보를 해준 것은 없었다.

반면, 윤 정부는 강제징용 문제라는 구체적 각론에서 사실상 100%의 양보를 했다. 그런 면에서 윤 정부의 외교적 실패는 위안부 문제라는 각론에서 대폭 양보한 박근혜 정부의 실패에 비견된다.

그런데 이번 일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때만도 훨씬 못하다. 2015년 합의 역시 외교적 실패작이지만, 그때는 한일 외교부 장관이 합의 형식으로 공동 발표한 반면 이번에는 한국 외교부 장관이 단독으로 '우리가 다 떠안겠다'며 사실상의 항복 선언을 했다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또 금전 출연 책임도 그때는 일본이 부담한 반면, 이번에는 한국 기업들 쪽으로 전가했다. 2015년에 일본이 출연하기로 한 금전은 배상금이 아니라 위로금 혹은 지원금 명목이므로 이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지만, 윤 정부는 이마저도 해내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만도 못한 결과를 산출한 윤 정부가 김대중 정부를 계승한 듯이 운운하는 것은 낯부끄러운 일이다.

무엇보다 1965년 체제에 대한 태도에서 김대중 정부와 윤 정부는 많이 다르다. 윤 정부 출범 이래로 기시다 내각이 일관되게 강조한 것은 '청구권협정을 포함한 1965년 한일협정(한일기본조약+부속 협정)에 의해 모든 게 끝났으므로 우리는 책임질 일이 더는 없다'는 거짓 주장이다. 박진 장관이 이끄는 외교부는 이런 일본에 백기 투항을 했다. 윤 정부는 1965년 체제에 빨려 들어간 셈이다.

1965년 체제 극복 시도한 김대중
 

1998년 10월 8일 김대중 대통령은 영빈관에서 21세기 새시대를 위한 공동선언에 서명한 뒤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와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대중 정부는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1965년 체제의 극복을 생각했다. 배상은 물론이고 사과도 없었던 1965년 체제에서 탈피하지는 못했지만, 총리의 사죄를 받아냄으로써 1965년 체제에 약간이나마 생채기를 만들었다.

<김대중 자서전> 제2권은 "흔히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1965년 체제'라고 한다면 나와 오부치 총리가 합의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이후의 한일관계는 '1998년 체제'라고 해야 마땅하다는 이들이 있다"고 회고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1965년 체제를 극복한 것은 아니므로 1998년 체제를 운위하는 것은 과도하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사과라도 받아내 1965년 체제의 극복을 시도해 보기라도 했다. 일본의 성의 표시를 관철시키겠다며 호언장담하다가 1965년 체제 속으로 쏙 빨려 들어간 윤 정부와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한일관계와 관련해 김대중이 받는 오해가 있다. 국회의원 시절인 1965년에 한일협정을 찬성했다는 이야기다. 1998년 10월 7일 도쿄를 방문한 그를 위해 만찬을 열어준 오부치 게이조 총리도 그런 오해를 갖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대통령께서는 일한 국교 정상화 당시 국회에서 다수 의원들이 정상화에 반대하는 가운데 용기를 가지고 정상화에 찬성"했다고 발언했다.

<김대중 자서전> 제1권은 한일협정 비준을 앞두고 양국 정치인들이 한국에서 모임을 가진 일을 회고하는 대목에서 "나도 그 자리에 가서 우리 당의 입장, 즉 국교 찬성과 굴욕외교 반대의 입장을 설명했다"라고 말했다. 김대중 자신은 이것을 "조건부 찬성"으로 규정했다.

윤 정부가 내놓은 강제징용 최종안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는 대체로 찬성한다. 다만, 굴욕외교를 반대할 뿐이다. 김대중의 입장도 그런 것이었다. 그가 2023년 지금 이 현장에 살아 있다면, 그 역시 윤 정부를 상대로 분노를 표출했을 것이다.

공개 석상에서는 조건부 찬성을 밝혔지만, 김대중의 실제 분노는 대단했다. 회고록에서 그는 "나는 협정 내용을 보고 분노를 넘어 수치심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며 "35년간 수탈의 역사를 3억 달러로 보상받는 것에는 누구도 동의할 수 없었다"라며 이럴 바에는 그 돈도 받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노라고 회고한다.

그는 국회에 나가 "차라리 일본으로부터 단 한 푼도 받지 맙시다", "이럴 바에는 청구권 따위는 일축해 버리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분노를 표했다. "이 협정으로 아무런 유보 조건도 없이 일본과 관련된 모든 과거사가 통째로 증발해버리는 셈이었다"라며 그는 그때의 분노를 떠올렸다.

이런 일화는 김대중 대통령을 한일협정 찬성론자로 둔갑시키며 그를 식민지배 문제 봉합에 악용할 근거가 없음을 보여준다. 1998년에 미비한 결과물을 얻는 데 그친 것은 그의 과오로 기록될 수 있지만, 그를 굴욕외교 찬동자로 끌어들이는 것은 실제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다. 3월 6일의 외교부 발표에 분노했을 그를 끌어들여 지금의 국민적 반발을 진화해보려는 대통령실의 시도는 그에 대한 모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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